세례자 요한, 어머니 강에 몸을 씻고, 마음에 새살 돋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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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 어머니 강에 몸을 씻고, 마음에 새살 돋게
  • 한상봉
  • 승인 2019.01.0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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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조연들-12

세상엔 참 가엾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세상엔 죄도 들끓어 말세(末世)가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어머니께선 늘 제게 이르셨지요. 세상 때문에 제발 지치지 말라고. 어머니의 머리가 하얗게 셀 무렵에 나는 때 묻은 땅, 유다를 마음으로 버리고 몸으로 지워버렸습니다.

광야를 향해 길을 나서던 새벽, 마지막 남은 별빛이 사그라지기 전에 꾸벅 절하는 저를 보고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세상을 여의고 또 다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오라는 전갈 같았습니다. 앞길엔 거친 먼지만 뽀얗게 피어오르고 발길에 걷어채이는 풀포기마저 물기를 잃어버렸더군요.

저는 사막으로 갔고, 사막에서도 그 별빛을 자주 보았습니다. 토굴에서 기도를 하다 문득 고개를 쳐들면 그날처럼 새벽이 오고, 먼데 그분의 눈빛이 햇발처럼 떠오르더군요. 세상은 미친듯이 종말을 향해 달음질치는데, 그래도 어김없이 아침이 온다는 사실이 문득 새삼 놀랍더군요. 우리가 하느님을 포기한다손 치더라도 도리어 그분은 우리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순간입니다.

제 옷이 낡고 제 영혼이 남루하더라도 끝내 제 손을 놓치지 않으시고 불쑥 잡아끄시는 분을 거기서, 사막에서 만났습니다. 이미 이승을 떠나 살아생전에 뵙지 못할 어머니와 이별하던 그날 새벽 그 별빛아래서 이미 예감했던 깨달음입니다. 서둘러 토굴을 빠져나올 때, 제게 쏟아져 내리던 말씀이 있었지요. “세상에 의인이 한 사람만 있어도 이 도시를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Baptism Of Christ Poster by Veronese Paolo

쉽사리 사람의 마음을 모질게 만드는 광야에서 저는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허리에 가죽띠를 질끈 두르고 살았습니다. 이제 광야에서 강으로 가야 합니다. 흙이 물기를 머금지 않으면 어떤 생명을 키워내지 못합니다. 사막을 옥토로 뒤바꿀 수 있는 힘은 물에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요르단 강이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젖줄이지요.

여인의 자궁에서 터져 나오는 양수(羊水)가 그 생명을 안전하게 어둠에서 광명한 세상으로 한 목숨을 옮겨놓는 법이지요. 우리는 그 물가에서 우리를 낳으신, 우리를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던 하느님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그분과 계약을 맺어야 하고, 그렇게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홍해처럼 죽음의 수렁 같은 이 세상을 모세처럼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백성에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남은 것은 다만 회개할 것인가, 함께 죽을 것인가? 그뿐이지요. 살아도 영혼이 죽었다면 시체와 다름 없지요. 하느님께서 그를 독수리에게 먹이로 내어줄 것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데, 대사제부터 율법학자, 군인, 세리까지 완장만 채워주면 누구나 거들먹거리며 제 뱃속을 채우려고 눈에 핏대를 세우며 눈알을 굴립니다.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은 저절로 신세 한탄이 나오고, 메시아를 기다리던 눈동자도 풀이 죽었습니다. 혁명전쟁으로 사람이 죽고 로마의 창끝은 더욱 가혹해졌습니다. 누군가 희망이 없는 세상에 모닥불이라도 지피고, 불쏘시개라도 얹어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르단 강에 제가 처음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동요했습니다. 이제 그만 주저 앉아 있지 말고 마음으로 회개하라고,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닥쳤다고 선포하자 순식간에 온 유다가 술렁거리고,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사심 없이 내뱉는 한마디 말을 그들은 숨죽여 기다렸던 것이지요. 그들 가운데는 이런 분도 계셨지만, 저런 놈도 있었습니다. 뜻 있는 젊은이도 있었지만, 징벌을 피하려고 끼어든 자도 있었습니다. 독사의 족속이라 불러야 마땅할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조차 세례를 청하는 것을 보니, 그들도 어지간히 마음이 졸아붙은 모양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얼추 저랑 비슷한 동년배 같은데, 단아한 입술을 꼭 다문 그이의 눈빛이 제 시선을 머물게 하였지요. 언제가 어디선가 꿈에선가 한번쯤 본 듯한 얼굴, 삼삼하게 혈족처럼 느껴지는 사내였습니다. 멈칫 거리고 있는 사이에 그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죠. “제게 세례를 베풀어 주십시오.”

물속에서 그를 건져 올리는데, 갑자기 제 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의 눈빛엔 잔잔한 평화가 깃들고, 착하고 따뜻한 기운이 가득했고요. 그이가 물밖으로 걸어나가는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제 저이로부터 참된 기운이 뻗어나갈 것임을. 저 사람을 만나려고 제가 요르단 강까지 이끌려 왔음을.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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