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릴라, "삼손이 판관이라니, 그는 살인자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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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릴라, "삼손이 판관이라니, 그는 살인자일 뿐"
  • 한상봉
  • 승인 2018.12.09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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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조연들-8
삼손과 들릴라, by 반다이크

저는 블레셋의 여자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통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의 행실을 보았다면, 저를 그리 탓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유배된 채 살고 또 죽어갑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에집트 노예들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그들이 에집트를 떠나와 이 땅에 자리잡기 시작할 때의 심정을 다시 기억할 수 있다면,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렇게 모질게 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히틀러가 그들을 인종차별적으로 박해했던 것처럼 그들은 저희 팔레스타인 백성들을 인종차별적으로 박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는 자치구 둘레에 장벽을 세우고, 팔레스타인을 감옥으로 만들고 있지요.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이들조차 이스라엘 사람들을 증오하고, 날마다 틈틈이 그들의 탱크에 맞서 돌멩이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조상 다윗이 골리앗에게 던지던 돌멩이를 이제는 팔레스타인의 가엾은 아이들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던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느님은 한정 없이 이스라엘 편만을 드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건설된 공동체라지만, 모든 이스라엘의 행실이 정당한 것은 아닐 수 있겠지요. 제가 만났던 삼손은 참 두려운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소렉 골짜기 살 때에 그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저를 보자마자 자기 여자로 삼았습니다. 삼손의 요구를 당장에 눈 앞에서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저를 사랑하게 되었다지만, 아무리 절실한 사랑이라도, 강요해서 얻어진 사랑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그는 알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때 삼손은 저희 블레셋의 처녀를 사랑하게 되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가를 오게 되었지요. 잔치를 벌이던 그날, 그는 들러리를 섰던 블레셋 사내들에게 모시옷 서른벌과 예복 서른벌을 걸고 내기를 하자고 했답니다.

삼손이 내놓은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블레셋의 사내들이 그녀를 윽박질러 삼손에게서 해답을 알아내게 하자, 삼손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너희들이 내 암소로 밭을 갈았던 게 분명하군!”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삼손은 이내 아스콜론이란 데로 내려가 나들이하던 블레셋 사람 삼십 명을 죽이고 그 옷을 벗겨 내기를 한 사내들에게 나눠주고 화를 내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무서운 일을 겪고 나서 그 처녀가 들러리 섰던 다른 사내에게 시집을 가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저라도 삼손에게 시집을 가진 않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녀를 잊지 못해 다시 찾아왔던 삼손은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 했습니다.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꼬리에 홰를 달아매고, 이 홰에 불을 붙인 다음에 여우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한 해 농사가 온통 불타버린 블레셋 사람들은 감히 삼손에게 달겨들지 못하고 애꿋은 그 여인과 그 일족을 모두 불태워 죽이고, 다시 블레셋 사람들에게 대한 삼손의 보복이 잇달았습니다. 힘센 사람의 맹목적인 사랑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지요.

악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고, 타협책으로 오랏줄에 묶였던 삼손은 거인다운 힘으로 오랏줄을 끊어버리고 닥치는 대로 블레셋 사람들을 때려눕히며 자신의 힘을 자랑하였다지요. “당나귀 턱뼈로 이 자들을 모조리 묵사발을 만들었네. 나는 당나귀 턱뼈로 천 명이나 쳐죽였네.” 눈 먼 사랑에서 시작된 일이 우리네가 사는 땅을 온통 피범벅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소문이 무성한 자가 내 침실로 왔을 때 제가 어떻게 처신해야 옳았겠습니까? 순진하게 그 사람의 수청을 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블레셋의 원한을 갚아야 할까요? 저에 대한 그의 사랑이 진실이라 해도, 저는 그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알아 주셔야 합니다.

블레셋 추장들은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봐 준다면, 그 대가로 은 천백 세겔을 준다고 하였는데, 그 돈이 아니더라도 저는 그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삼손은 사내들에겐 사나운 사람이었지만, 여자에겐 약한 사내였지요. 날마다 제가 졸라대자 그는 자신의 힘이 머릿카락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제 무릎 위에서 맥없는 어린아이가 되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혔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삼손은 눈이 뽑힌 채 가자에 있는 감옥에서 연자맷돌을 돌렸다네요. 그런데 어느새 머리카락이 자라서, 힘을 다시 얻게 된 삼손이 저희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전에서 양쪽 기둥을 밀어붙였던 겁니다. 신전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동안 삼손이 죽였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삼손과 함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피차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고, 저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두 족속들 사이에 얽힌 앙금이 사라져 평화가 오기를 갈망할 따름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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