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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의 예언자, 도로시 데이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년)는 피터 모린과 더불어 가톨릭일꾼(Catholic Worker)운동을 창립한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자이며, <가톨릭일꾼> 신문을 통해 자신들의 신념과 신앙을 밝혀왔던 언론인이기도 했다. 도로시 데이는 전통적인 가톨릭신앙을 고수하면서도 교회의 복음적 회심을 기대하며 살았다. 자기 자신과 교회가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하기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나는 가난하고 정결하며 순명하기를 바랐다. 나는 살기 위하여 죽고 싶었고,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입고 싶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모든 여인처럼 나는 나의 사랑과 일치하고 싶었다.”

교회, 풍부한 자선사업, 너무 적은 정의의 실천

도로시 데이는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달리셨던 십자가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또한 도로시는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일치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와 일치하기를 원했다.

“기업가 같은 사제들, 그들이 가진 어마어마한 재물. 가난한 이들, 노동자들, 흑인들, 멕시코인들, 필리핀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의 부족과 억압,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산업주의.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사제들은 아벨이기보다 카인이라고 자주 느끼게 하였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인가요?,’ 교회는 사회질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교회에는 풍부한 자선이 있었지만, 정의는 너무나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은 성사 분배자들이었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가져다주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게 해주며, 세상에서 우리가 평화와 일치감을 더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이었다. ‘최악의 적들은 집안에 있다.’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경고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란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돌보는 집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도로시 데이는 이상주의자이기는 하지만 결코 낭만주의자는 아니었다. 도로시 데이는 지상교회로서 가톨릭교회 역시 현세적 사명을 수행하면서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그 가르침과 일치해서 살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선언할 수는 있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일꾼> 신문은 신앙 안에서 교회와 세상에 대한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신앙의 핵심은 ‘사랑’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자서전인 에서 “우리 모두 오랜 외로움을 안다. 우리 모두 유일한 해답은 사랑임을, 그 사랑은 공동체와 함께 오는 것임을 이제 안다.”고 말했다.

급진적 아나키스트에서 가톨릭으로

도로시 데이는 1897년 11월 8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존 데이와 그레이스 데이의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면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경험하고, 시카고로 이주해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다문화적인 시카고의 풍경 속에서 잭 런던, 업튼 싱클레어 등의 책을 읽으며 예술적 감수성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갔다. 1914년에 일리노이 대학에 입학해 급진적인 사회사상이 담긴 책들을 읽으며 급진적인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뉴욕에서는 <부름>과 <대중>의 기자로 활동하며, 아동노동과 가난한 자들의 비참한 삶을 보도했다. 뉴욕의 급진주의자들, 지성인들, 작가들과 어울리고, 극작가인 유진 오닐과 절친하게 지내며 백악관 앞에서 여성참정권론자들과 함께

연합시위에 참여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옥중에서 유년 시절에 손 놓았던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후 <해방자>와 <뉴올리언스 아이템> 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전적 소설 <열한 번째 처녀>를 출간해 이 책의 영화 판권으로 스태튼 아일랜드 해변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여기서 생물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이며 무신론자인 포스터 배터햄을 만나 사랑에 빠져 한때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이곳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도로시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발전시켰다.

“해변을 걷고,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그 사람 곁에 앉아 쉬고, 잔잔한 만으로 나가 함께 배를 젓고, 들판과 숲을 돌아다녔다. 내게는 온전히 새로운 경험, 생명과 기쁨을 얻어 누리는 경험이었다. … 이 아름다운 세계를 보라. 어떻게 하느님이 없을 수 있을까?”

1927년에 딸 타말 테레사가 태어나면서 그해 12월 28일, 스태튼 아일랜드의 한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가톨릭에 입교하면서 포스터와 헤어졌다.

세상을 위해 헌신하다, 가톨릭일꾼운동

도로시 데이는 1932년 12월, 미국 대공황의 절정기에 일어난 ‘굶주림의 행진’을 취재하려고 워싱턴에 갔다. 시위 참여자들은 공권력에 의해 야만적인 대우를 받았고, 이런 불평등한 현실에 도로시는 깊은 슬픔을 느끼고 분노했다. 워싱턴 원죄 없이 잉태하신 마리아 성당에서 그는 “보잘것없는 재주이지만 우리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뉴욕에서 장차 영적 스승이자 동지가 될 피터 모린을 만나 평생을 바치게 될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했다. 1933년 5월 1일 뉴욕 유니언 광장에서, 가난과 환대, 그리스도교 평화주의를 호소하는 <가톨릭일꾼> 신문 창간호가 배포했다. 이 신문은 그때나 80년이 지난 지금이나 1센트였다. 가톨릭일꾼운동을 하면서 도로시 데이는 말 없는 자들의 말이 되고, 평화를 빼앗긴 자들의 칼이 되고,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 되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또한 대접하는 사람과 대접받는 사람이라는 구분 없이 나눔을 실천하는 ‘환대의 집’을 열었다. 1935년에는 푸른혁명(Green Revolution)을 위한 농경공동체도 시작했다. 도로시 데이는 이처럼 가난한 이들의 당장의 필요에 응답했을 뿐 아니라 평화운동에도 깊이 투신하였다. 스페인 내란과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도 평화주의 입장을 고수하여 안팎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한편이 되어 싸웠던 사람들을 위해, 당신이 함께하시고자 했던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싸우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분은 거절당한 사람들, 조롱당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토머스 머튼이 <가톨릭일꾼>에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글을 연재했는데, 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평화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1963년 ‘평화를 위해 일하는 어머니’ 50명과 함께 로마 순례를 떠나 바오로 6세 교종을 접견해 ‘평화의 중요성’을 밝혔다. 1965년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마지막 회기에 로마에 가서 열흘간 단식하며 공의회 문헌에 ‘평화’에 관한 내용을 담아달라고 청원했다. 이미 요한 23세 교황이 <지상의 평화>라는 회칙을 발표했고, <사목헌장>에는 ‘평화’문제를 급진적으로 다루었다.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도로시 데이는 1973년 “일생 동안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해주고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했다.”는 이유로, 노트르담 대학으로부터 레테르 훈장을 받았다. 물론 그 ‘편안한 사람’은 세상의 힘 있는 자들과 부유한 자들이겠지만, 도로시 데이는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엄격했다. 혹시 자신이 안락하고 나태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되물었다.

“덕 있는 사람이 되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결국에는 독선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진지하게 자선 활동을 행하는 실천가가 되다 보면, 주님이 자신에게 특별한 축복을 내리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신이 한 일을 굉장히 뿌듯해하며 춤을 추고 다니지요. 교만이라는 죄를 짓는 겁니다.”

이어 예수회 회원들이 수여하는 이삭 헤커상과 간디평화상도 받았다. 19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에 참석한 도로시 데이는 “우리 모두 조금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제 어머니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한 사람 몫이 더 나온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항상 한 사람 몫의 자리가 더 있었습니다.”라고 강연했다

도로시 데이는 1980년 11월 29일 83세로 이승을 떠났다. 묘비에는 빵과 물고기 문양과 함께 ‘Deo Gracias(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글이 새겨졌다. 뉴욕교구의 요청으로 1983년 시성절차가 시작되었고, 도로시 데이는 현재 ‘하느님의 종(Servus Dei)’ 단계에 있다. 도로시 데이는 생전에, 자신을 성인으로 우러러보는 사람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를 성인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나는 그렇게 쉽게 물러나고 싶지 않답니다.”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에게 영감을 받아 시작된 가톨릭일꾼운동은 미국과 세계 전역에서 수많은 공동체를 건설하고 평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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