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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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인이다
  • 최태선
  • 승인 2024.04.22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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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나는 옥상에 작은 정원과 텃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단한 것은 아니다. 화분 일곱 개에는 꽃이 피는 작은 화초들이 심어져 있다. 작년에 잎을 다 따 먹은 케일이 겨울에도 살아남았다. 물론 실내로 옮겨주고 물을 주었다. 꽃대가 나오고 마침내 노오란 꽃을 피웠다. 그 꽃이 지면 씨앗이 맺힐 것이다. 농사는 씨앗을 채집해야 농사다. 오늘날 농사는 종묘상에서 매년 씨앗을 산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에서 벗어난 것으로 온전한 농사라 할 수 없다.

케일은 사실 화초가 아니다. 작년 봄 예쁜 꽃이 핀 화분을 사서 보고, 시든 것들을 잘 보관했더니 오늘 아침 마침내 꽃이 피었다. 그 꽃을 혼자 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행복하다. 잘 살아주었다는 것, 기대도 안 했는데 꽃을 피워주었다는 것이 내겐 기쁨이요 행복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화분 여섯 개로 옥상이라는 공간에 내 작은 정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두 개의 목욕통과 정원용 화분보다 더 큰 화분 일곱 개로 텃밭을 이루었다. 쌈 채소와 들깨, 호박, 오이, 대추토마토와 파가 내 작물의 전부다.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것들도 심고 싶지만 그것들은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매일 물을 주고 나서 빛나듯, 행복해 하는 듯 고개를 곧추 세우고 있는 작물들을 보면 녀석들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딧물의 공격만 없다면 녀석들은 내게 풍성하지는 않아도 간간히 재미를 주는 소출을 내게 줄 것이다. 손자 녀석에게 그것들을 따게 하고, 딴 것을 녀석이 먹는 것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나는 할 일이 없어 이런 일을 하며 지낸다. 이것이 목사로서 불행일까. 그런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 나는 무언가 복음을 위해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주님은 내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는다. 그래도 아주 단절시키지는 않아서 설교를 하러 가는 곳이 여전히 있다. 물론 보잘 것 없는 예배다. 치매노인들이 드리는 예배는 얼마나 초라한가. 하지만 나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내게 가장 큰 일을 맡겨주셨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 할만한 것이 전혀 없는 목사의 삶을 살고 있다.

목사라는 내 자의식이 여전한 것은 내가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내 장례식을 치렀기 때문이다. 나는 목사로서 주님께 드려졌다. 목사를 특별한 직위나 직업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목사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더 이상 변할 수 없다. 내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가장 인간 답게, 아니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목사로서의 나의 정체성에 가장 부합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스도는 해방자시다. 성서는 그분이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자유로운 분이셨다. 그분은 모든 세상의 질서를 필연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유를 살아내셨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신의 방식이 필연이요 질서요 정의임을 주장하고 그에 따라 살 것을 강요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바로 이러한 세상의 강요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세상의 강요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이유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세상에 절망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그 새로운 삶의 시작이 자유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모르거나 오히려 그 반대를 신앙으로 이해한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된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은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시작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세상이 필연으로 강요하는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요, 그 질서를 끊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시작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권력을 영원히 이기셨다. 그리고 세상이 강요하는 모든 필연의 근거인 죽음을 파괴하셨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결과적으로 모든 필연이던 세상의 질서는 파괴되어 붕괴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해방자로 우리에게 오셨고, 마침내 죄의 노예인 우리들을 해방시켜주셨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자유의 근본적인 의미이다.

이를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은 자유롭게 하시는 영이다. 성령은 볼 수도 만질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 하지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신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성령을 예언이나 기적을 행하게 하는 주체로 인식한다. 그러나 성령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유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도우심이며 인도하심이다. 이 이해가 중요하다. 하지만 시공에 갇힌 인간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성령을 매개로 기적을 기대한다. 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살려는 사람은 성령의 자유롭게 하시는 역사를 체험할 수 없다.

자유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계시의 담지자요, 자유의 담지자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체계화될 수 없다. 규범화될 수 없도 없고, 윤리화시킬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유롭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정형화될 수 없으며 온전한 모습 또한 설정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성령은 자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 초월자이신 하느님이 보내시는 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윤리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정형화 되거나 규범화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인들의 행위는 강령으로 체계화될 수 없으며 그것을 판단할 수도 없다. 잘못된 것은 누군가 권한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하려는 것이다.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과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그런 일을 하는 곳은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민들레 홀씨처럼 창공을 날아가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곳으로, 씨앗은 날아가지만 씨앗은 씨앗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의미를 가지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교 윤리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의미한다.

목사로서 나는 전형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목사 아닌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내가 돌보는 히야신스 하나, 수국 하나, 그리고 토마토 모종 하나가 내 자유의 상징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그것들을 사랑하고 아낀다. 물을 주며 가꾸고, 그것들이 내게 주는 것들을 즐기고 향유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만든 옥상 정원과 텃밭에 묶이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내가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유의 삶에서 매 순간은 내게 최선을 요구하고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요구는 요구이기 이전에 나의 자유이며 나의 선택이기도 하다.

나는 일에 얽매여 내게 주어진 삶을 허투루 살지 않는다.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나는 그 선물을 받아, 나 자신을 선물로 다른 이에게 주는 삶을 산다. 그래서 내게 다른 이들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내 앞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는 흥분할 수밖에 없다.

내게 이 자유가 주어지지 않고, 내가 이 자유의 의미를 모른다면 나는 실패한 목사로서 내 삶을 불행으로 규정하고 부분적으로만 주님께 감사하고 충성하는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이들이 행한 불법은 해방자이신 주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져오신 자유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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