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 상식을 넘어 새 하늘을 잉태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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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벳, 상식을 넘어 새 하늘을 잉태한 여인
  • 한상봉
  • 승인 2018.12.3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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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조연들-11

그녀가 저를 찾아온 것은 제가 임신하고 반 년이 지난 어느날이었습니다. 그 먼 갈릴래아에서, 그것도 시골 나사렛에서 마리아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혼자서 타박타박 걸어 왔을 것입니다. 그녀의 피부는 아직 어려서 맑게 빛나고 있었으며, 눈빛은 할 말이 많은 여인처럼 깊고 웅숭하였고, 가슴엔 뜨거운 불덩이를 한 삽 퍼서 담아 왔더군요. 저는 그녀를 보자마자 꼭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었지요.

아이를 갖고 나서 저는 문밖 출입을 삼가하고 있었습니다. 늘그막에 아기를 얻은 것도 민망했고, 이를 두고 쑤군거리는 사람들의 입방아를 듣기도 싫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동안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가리야의 묘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혼자서 이런 황망한 사태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편은 제 아이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비아조에 속하는 사제의 한 사람이었고, 우린 시골성소를 지키며 옛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거룩한 열망에 대하여 항상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그야말로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순례자들 같았습니다. 로마제국의 힘이 하늘을 덮었으며, 불안하고 가슴 시린 나날이 가뭄처럼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알려진 대로 이윽고 메시아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를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구해주시고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한평생 거룩하고 올바르게 살게 하시리라 믿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 엄청난 소식이 저희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닿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사제 집안이었지만, 제 아비도 사제였지만, 모든 거룩한 성무는 중앙 성소의 권력자인 대사제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외세와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by Luc Blomme

남편은 반듯한 사람이었지만 고지식한 게 흠이라면 흠이라고 하겠습니다. 즈가리야가 천사의 전갈을 들었을 때 이를 받아들이기 주저했던 것은, 제가 늙어서 아기를 갖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탓도 있었겠지만, 이제 사제들이 백성들을 돌보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남편 생각에, 새로운 역사는 날 것처럼 새로운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푸성귀처럼 싱싱한 낯빛을 하고 마리아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녀 역시 몸에 아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아기가 남다른 아기라는 것은 그 엄마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기는 결국 엄마를 닮게 되어있으니까요.

그녀는 아직 처녀의 몸이었고, 약혼자였던 요셉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 사람도 제 남편 즈가리야처럼 무척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기운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거룩한 아기씨를 기꺼이 제 몸에 받아 모셨지만, 요셉은 이해할 수 없는 이 신비에 대하여 제 남편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충분히 이해받지 못하는 답답한 심경으로 마리아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제 집까지 먼 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녀에게도 자신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마음에 새길만한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이럴 때 혼자서 들길을 걷거나 여행을 떠나는 것은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가 천사의 전갈을 받고 며칠 만에 훌쩍 제 집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요셉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마리아는 제게로 와서 위로를 받았고, 실상 저 역시 그녀에게서 희망을 발견하였답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앉아 있었던 석 달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요한에게, 그리고 예수에게도 좋은 태교(胎敎)가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유다 땅의 들판을 걸으며 해가 지도록 오랫동안 들꽃을 바라보기도 했고, 농부들이 밭에서 땀 흘려 일하는 광경도 보았지요. 옥빛 하늘에 빨래를 내다 걸면서 그렇게 말끔한 세상이 지금 여기에서 시작됨을 알게 되었지요.

일하는 사람들의 천국, 생명을 잉태하는 대지를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마다 저녁연기가 평화롭게 피어올랐습니다. 그때마다 뱃속의 아기는 봄놀며 기뻐함을 저도 느끼고 마리아도 아직 돋지도 않은 자기 배를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제게 마리아는 그렇게 존재 자체로 축복이었답니다.

이윽고 요한이 세상에 나올 때쯤에 마리아는 아쉬움을 남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나사렛에서 마리아를 내내 기다리던 요셉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겠지요. 그들의 사랑은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그들에게서 정말 새로운 하늘이 열리기 시작하였으니까요.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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