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의 딸 "아이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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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의 딸 "아이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어요"
  • 한상봉
  • 승인 2018.10.29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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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조연들-2

그 아이는 히브리인의 아기였어요.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역창과 송진을 바른 왕골상자 안에 담긴 아기를 보고 나는 대번에 그걸 알 수 있었죠. 히브리인들은 가엾게도 저희 땅 에집트에서 중노동에 시달렸고, 당연히 불만도 많았을 겁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채고 제 아버지는 파라오의 권세로 히브리인들의 사내아기를 죽여 본때를 보이고 반란의 기미를 없애려고 했지요. 아마도 그 아이 중에 하나가 제 눈빛에 부딪쳐 제 마음 속으로 들어왔던 것이겠지요. 아이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어요. 제 마음대로 세상에 나온 것도 아니고, 세상에 나와 지은 죄도 없잖아요. 정말 불쌍하지 않아요?

자식을 아홉 달 동안 뱃속에 넣어서 키워본 어미들은 알지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다 귀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가 에집트인이든 종살이하는 히브리인이든, 피부가 까무잡잡한 아이든 구릿빛이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누군가 그 아이를 동굴 같은 자궁 속에서 은밀한 사랑으로 보듬어 왔고, 그 아이도 안전한 어둠 속에서 충만한 사랑을 배우고 눈부비며 세상을 맞이하였던 것이지요. 충분히 어둠을 경험하고 나서야 맞이하는 햇살을 고맙게 여겼을 테지요. 그 아이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태어날 때는 벌거벗은 채 맨몸뚱이로 세상에 나왔을 테고, 공주라는 딱지를 붙이거나 금붙이 같은 걸 물고 나오진 않았을 겁니다.

강가를 걷다보면 알아요. 모든 자유로운 것들을 보면 알아요. 발끝에 차이는 풀들조차 한껏 제 생명을 노래하지요. 이슬을 털며 다시 일어서는 풀들은 정원의 꽃들처럼 누가 가꾸지 않아도 강가의 습기를 머금고 싱싱하고 생생하게 푸른빛을 버리지 않고 살지요. 이름도 외지 못할 만큼 다양한 그 풀들 사이에 경계란 없어요. 우열도 없고 높고 낮음도 없어요. 그들은 그들대로 받은 목숨을 마음껏 살고 때가 되면 주저 없이 시들어갑니다. 사람도 다 이유가 있어 목숨을 받아 세상을 살고, 또 세상을 여의게 된다고 저는 믿어요. 물론 그 이유란 그네들을 지은 분만이 알겠지요.

 

Pharaoh's daughter finding baby Moses Author Artist: Konstantin Flavitsky (1830–1866)

그날도 저는 갑갑한 궁궐을 벗어나 갈대가 무성한 강가를 산책하고 있었던 거지요. 궁궐에선 노예들이 채찍을 맞아가며 성벽을 보수하고, 궁궐을 호위하는 병사들은 날마다 조금씩 숫자가 늘어나 가는 곳마다 구비마다 창검을 든 군인들 투성이었답니다. 궁궐은 예전보다 더 튼튼하게 담장을 치고, 더 화려하게 장식되었지만, 아버지는 늘 불만스러워했죠. 궁궐을 생각하면, “조금 더! 조금 더!”하고 되뇌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쟁쟁하게 들리고, 저는 그때마다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요즘 아버지는 이승너머 저승까지 생각하십니다. 한 목숨이 다해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집을 짓고 싶어 하십니다. 산처럼 큰 피라미드를 지으려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무덤이지요. 한적한 강가를 거닐며 생각합니다. 하늘의 새와 숲 속의 나무와 무성한 갈대와 강물 속을 지나는 물고기, 그리고 들짐승 어느 것도 제 무덤을 미리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무덤을 짓지요. 그리고 그 무덤을 지으려고 노예들은 날마다 일하고 또 날마다 몇 명씩 죽어갑니다. 아버지도 모르시는 그 노예들의 원한 때문에 제가 밤잠을 설칩니다. 그 악몽을 잊기 위해서라도 저는 자꾸만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서늘한 바람에 가슴을 씻고, 목욕이라도 하면 나을까, 해서 그렇지요.

그날 강가에서 아기를 발견했을 때, “아기에게 젖을 빨리게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유모를 하나 데려다 드릴까요?”하며 앞에 나섰던 그녀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저는 방법을 몰랐고, 그녀가 제 부담을 덜어주었으니까요. 그녀가 미리암이라지요? 친누나였던 미리암은 기지를 발휘해서 그 아이를 제 엄마에게 데려다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제 그늘 아래서 목숨을 얻을 수 있었고, 제가 치른 삯으로 엄마의 젖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저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히브리인을 위해 뭔가 할 수 있기를 원했지요.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세상의 모든 미래라면, 저는 그날 히브리인의 미래를 건져낸 셈이 되는 것이고, 아버지가 지은 죄를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였답니다.

그 아이는 말을 할줄 알게 되면서, 엄마에게서 제게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아이를 양자로 삼고 이름을 ‘모세’라고 지어주었습니다. 물에서 건져냈다는 뜻입니다. 아기에게 물속이란 ‘죽음’일 테고, 저는 그 물에 빠진 아이를 가엾게 보았던 것인데, 그 누이와 어미가 더불어 그 아이에게 생명을 준 것입니다. 여자들이란 참 대단합니다. 누구보다 생명에 가까이 서 있는 존재이지요. 그녀들과 함께 양육한 모세가 훗날 자기 백성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해방시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물속에 빠질 뻔한 백성을 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 된 것은, 사실 우리 여자들의 일을 본받은 것이지요. 그는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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