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 "여자들 우정이 더 애틋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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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 "여자들 우정이 더 애틋해요"
  • 한상봉
  • 승인 2018.12.1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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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조연들-9

사람들은 제 인생을 참으로 기구하다 말합니다. 기근이 들어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남편과 더불어 모압 땅에서 남의 집 살이를 하였는데, 그 남편마저 죽고 없는 가운데, 자식들마저 제 곁을 아예 떠나버렸습니다. 그들은 객지에 연약한 여인을 홀로 남겨둔 채 저승으로 물러나 버린 것이지요. 하늘은 적막하고 땅에선 마른 먼지만 일어나는 내 생애의 끝자락은 자칫하면 저를 벼랑으로 밀어 넣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걸 ‘희망 없음’이라 불러야 하는지요.

그러나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던가요. 사내들이 떠나간 자리에 남겨진 풀씨같은 목숨이 있더군요. 누가 물을 따로 주지 않아도 제 힘으로 자라나 작은 꽃망울을 무더기로 터트리곤 하던 그런 풀씨 말입니다. 그건 온실이 필요 없는 생명의 힘이겠지요. 사내들이 사라지고서야 그런 힘이 우리 여자들에게도 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윌리암 블레이크, 1795년, 유화

제겐 남겨진 며느리가 둘이나 있었습니다. 모압에서 얻은 오르바와 룻입니다. 이들은 이방인이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하느님께서 언제 유다인과 이방인으로 사람을 갈라서 창조하신 적이 있답니까? 그저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고, 세상의 절반은 그저 여자일 뿐이지요. 그 여자들은 내 집에서 어려운 살림에도 아랑곳 않고 함께 들일을 나가고 부엌에서 밀가루를 반죽하고 물을 길어왔지요. 그 불쌍한 며느리들은 아이를 낳아보지도 못하고 저처럼 과부가 된 것이지요.

우리가 겨우 슬픔을 추스릴만 할 때였나요? 바람결에 들리는 소문이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고 합디다. 어쩌겠어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지요. 처음엔 무작정 길을 나섰지만, 기운을 차리고 보니, 모압 땅이 제게 그러했듯이 유다 땅 베들레헴 역시 낯선 객지겠구나, 생각했답니다. 피붙이 하나 없는 그 땅에서 며느리들도 저처럼 고초를 겪으리라, 외로움에 사무치리라, 생각 되더군요. 남편들도 죽고 없는 마당에 그런 사람은 저 하나로 족하겠다 싶더군요.

이젠 내가 그네들에게 뭔가 해줄 차례가 된 것 같아서 말했죠. 그동안 늙은 시어미를 봉양하느라 애썼다고, 너무 고마웠다고, 이젠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아직 젊으니 가서 새 남편을 맞아 보금자리를 꾸미라고, 하느님께서 너희들을 보살펴 주실 것이라고, 그렇게 타이르고 손을 잡아 주었지요. 다행히 큰 며느리는 이별을 눈물로 아쉬워하며 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막내 며느리였던 룻은 한사코 저를 따라 가겠다고 막무가내니, 어찌합니까? 우리네 목숨이 들풀 같이 질기다면 어디 간들 굶기야 하겠어요? 그렇게 룻은 제 사람이 되었지요. 그때부터 룻은 며느리가 아니라 척박한 운명을 함께 열어가는 길동무가 된 것이지요.

“어머니 머무는 곳에 저도 머물겠어요. 이제부턴 어머니의 겨레가 제 겨레이고, 어머니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입니다.” 룻이 그날 제게 한 말입니다. 그녀는 그날로 저와 같은 족속이 된 셈입니다. 이런 관계를 두고 동지(同志)라 해야 하나요? 그저 참되고 든든한 가족이라 불러야 옳을까요?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마음으로 곁에 두고 싶은 인인(隣人)이 되었던 것이지요. 베들레헴에 돌아갔을 때 룻은 흉금 없이 저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김없이 서로에게 사랑을 주었지요. 룻은 제가 기뻐할만한 일을 찾아서 하였고, 저는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갈망했지요.

저는 룻이 내 친척이었던 보아즈에게서 새로운 사랑을 얻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보아즈는 보기 드물게 다정하고 친절한 사내였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곧은 사내였습니다. 이방의 땅에서 온 그녀는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여자랍니다.

룻은 보아즈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고, 관습에 따라 그 아들을 제 품에서 키웠지요. 율법에 따르면, 룻은 제 남편 엘리멜렉의 손자를 낳은 셈인데, 그렇게 우리 가문의 소유가 보존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구나!”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시어미와 며느리의 가없는 마음이 낳은 그 아이는 나중에 거룩한 유다왕국을 통치할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보아즈의 씨를 받은 나오미와 룻의 아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던 것입니다. 사랑에는 경계가 없고, 경계가 없는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역사를 쓰시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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