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되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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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되신 하느님
  • 참사람되어
  • 승인 2024.04.0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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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러 세상에 온 예수는 ‘교리’에 관심 없다 -1

1. 사람이 되신 하느님

“머문다는 것”, 어느 특별한 장소의 하느님 현존은 곧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특별한 관계 양식을 암시한다. 하지만, 야훼 하느님은 인간들이 세운 성전 안에 갇혀 머물러 계시지만은 않는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이 하느님을 가두어 놓을 수는 없다. 성전 그 자체는 빈 공간일 뿐이다. 하느님의 현존은 돌이나 금은으로 치장한 성전과 동일시될 수 없다.(예레 3,16; 이사 66,1-2) 사실 하느님이 더 좋아하고 어여삐 살피는 것은 훌륭하게 치장된 성전이나 희생제물이 아니라, 사람의 속 깊은 마음이다.(에제 36,26-27)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현존하실 것이다.

하느님 현존의 약속은 당신 외아들의 육화사건으로 결정적으로 성취된다. 하느님은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드러내 보이셨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에게도 성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 공동체는 살아있는 돌의 성전이며, 이 공동체의 한 사람 한 사람은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이다.(1고린 3,16-17; 6,19)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진 성령과 그의 아들은 세상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사람들 안에 머무신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느님의 성전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이다.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요한 1,14) 하느님이 살을 취하셨다. 하느님은 숨 쉬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현존하신다. 더 이상 하느님은 장막이나 높은 곳, 성전에 머무는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육신이요, 인간 역사와 함께 하시는 역사적 존재요,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살을 취하신 하느님은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의 정의와 평화를 세우시기 위해 더 깊이 인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다. 하느님의 이러한 현존 양식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규정한다. 이웃을 경시하고,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신명 24,14-15; 출애 22,21-23; 잠언 17,5) 야훼를 아는 것,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가난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에게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예레 22,13-16) 가난한 자들에게 구체적인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이사 1,10-17; 58,6-7)

사람들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 안에서 절정을 이룬다.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2. 아빠, 하느님의 아들

아빠!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아주 단순하고 친밀감을 가지고 말했다.(갈라 4,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느님을 대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며, 그의 속성들은 무엇이며 등등의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요한 14,8-10).

예수님의 메시지는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알고자 할 때에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아는 데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예수님의 길을 따라 참 인간이 되고, 참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법을 배우고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로 이를 수 있는 확실하고 참된 길이다.

예수님이 행한 일들은 그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그 일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일이었으며, 그분의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행해진 일들이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고, 이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삶 전체를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교리를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삶에 동참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보여주었다. 주여, 주여, 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마태 7,21). 이처럼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참다운 순종은 온 힘을 다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삶을 끊임없이 창조해 나가는 데 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본뜨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 그것이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참 아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애 전체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예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와 하느님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무엇인지 예수님을 통해 들은 적이 없다.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 혼자만의 독백일 뿐이다. 하느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당신과 나’와 같은 식의 뚜렷한 인격적 교감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과 하느님 사이의 실질적인 대화는 오직 구체적으로 인간을 위해 바쳐지는 전폭적인 봉사와 섬김의 삶 그것이었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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