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스띠니아’에서 완벽한 고요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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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스띠니아’에서 완벽한 고요를 만나다
  • 주은경
  • 승인 2024.04.01 13:5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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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경의 순례여행 - 마돈나하우스 7화

드디어 ‘뿌스띠니아’에 들어가는 날. 하루 일정을 마치고 금요일 밤 8시부터 24시간 동안 나 혼자 만의 시간이 허락됐다. 11월 23일. 15일째.

뿌스띠니아는 러시아 정교회 전통의 기도실. 24시간 기도하고 명상하며 오롯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다. 두 평 남짓한 통나무집. 문을 열고 찬찬히 둘러보았다. 침대, 책상 위에 스탠드와 성경, 벽에는 마리아상, 그리고 세수대야와 물통, 전기포트, 심지어 요강도 있다.

 

게스트를 위한 뿌스띠니아. 여자게스트하우스에서 50미터 거리에 있다.
게스트를 위한 뿌스띠니아. 여자게스트하우스에서 50미터 거리에 있다.

 

뿌스띠니아는 어떤 곳인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 캐서린 도허티의 책 <사막의 영성 뿌스띠니아>(캐서린 도허티 지음, 이인복 옮김, 우진출판사, 1995)를 읽어보았다.

‘뿌스띠니아’란 러시아어로 ‘사막’이라는 뜻의 일반명사입니다. 동시에 또 하나의 뜻이 있습니다. 뿌스띠니아는 과거의 선지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은둔하던 장소를 말합니다. 즉 모든 사람이 자기 안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곳, 혼자 있을 수 있는 조용한 곳이죠.

현대인이 자신의 진실과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진실을 깨닫는 방법은 오직 침묵, 홀로 있기입니다. 즉 마음속의 사막을 만나는 것입니다.

뿌스띠니아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말씀을 듣겠다. 다시 말해 ‘케노시스’. 즉 자기 자신을 비운다는 것입니다.

캐나다와 미국에 뿌스띠니아를 정착시키는 것을 평생의 소명으로 삼았던 캐서린 도허티. 그는사막에 들어가는 이유를 이렇게 얘기한다.

단식합니다. 침묵 속에서 삽니다. 기도합니다. 자신을 죽이고 자기 안의 주님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나누어줍니다. 자신의 죄와 이웃의 죄를 속죄합니다. 인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성인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자신과 이웃의 영혼을 구제합니다. 하느님께 완전히 복종합니다.

요약하면 뿌스띠니아에서는 침묵 속에서 기도하며 내 안의 주님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 그렇다고 뿌스띠니아가 꼭 엄숙하기만 한 곳만은 아니다.

편안하게 쉴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예술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그냥 자신이 되면 됩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걷고 싶으면 걷습니다. 너무 지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주님의 품속에서 잠을 자는 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잠을 선물로 주셨으니 기왕이면 좋은 꿈도 꾸게 해 달라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처음 뿌스띠니아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성의 날개를 접는 일입니다. 지성의 문을 닫고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주님의 품안에서 편안하게 쉬는 것도 예술”이라는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밤 9시 체조로 몸을 풀어준 다음, 잠부터 자기로 했다. 그만큼 지쳐 있었다. 잠도 하느님과 함께 하면 기도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너무 추웠다. 영하 15도 날씨에 난방도구는 작은 코일 전기난로뿐. 내 야크 털 숄을 침대 위에 깔고, 양말 신고, 폴라텍 자켓도 입고 누웠다. 12시, 2시, 3시. 온갖 상념이 떠올라 토막잠을 잤다. 그런데 점점 큰 소리가 들렸다. 난생 처음 들어본 소리였다.

 

책상위에는 성경이 있다. 벽면의 빨간색 비둘기 나무판에는 “성령이여, 진홍빛 비둘기여. 사랑이신 주님, 우리를 축복하소서”라고 적혀 있다.
책상위에는 성경이 있다. 벽면의 빨간색 비둘기 나무판에는 “성령이여, 진홍빛 비둘기여. 사랑이신 주님, 우리를 축복하소서”라고 적혀 있다.

고요함의 소리가 이토록 크다니

완벽한 고요함, 적막함, Silence.

소리 없음이 얼마나 큰 소리를 내는지 들어봤는가? 귀 가득히 고요함, 절대적인 고요함이 들리고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엔 소리가 있다. 그런데 이토록 소리 없음도 있구나. 우리가 함께 있을 땐 소리만 들리는데. 나의 소리, 그의 소리, 우리의 소리. 이렇게 나의 소리 없음, 그의 소리 없음, 우리의 소리 없음이 함께 공존하고 있구나. 성경에, 창세기에 ‘소리’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하고 있을까. 다른 종교는? 소리에 대해 처음 생각해 본다.

잠을 자다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하얀 설경위로 쏟아지는 빛발 달빛 별빛에 눈꽃이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고요하고 깨끗한 아름다움에 눈물이 난다.

불빛 한 점 없이 완벽하게 깜깜한 밤, 천지가 이렇게 반짝반짝 빛이 나나? 보름달. 하늘에 쏟아질 듯 강렬한 빛을 내뿜는 별들, 그 빛에 반사된 눈꽃. 그 결정체가 뿜어내는 반짝임. 홀린 듯 바라보다 얼음 같은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다. 너무 추워 눈물이 난다. 문을 닫는다. 다시 이불을 끌어당겨 잠을 청한다.

설핏 잠들었는데 어두운 그림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같다. 구체적인 영상이 떠오를 만큼 선명하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려 해도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힘껏 혼신을 다해 몸을 일으켜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두려운 마음을 치워버린다. 이 상황이 약간 코믹하기도 하다. “혹시 당신이 무서운 귀신이더라도 그냥 가세요. 나 여기서 잘 있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기도가 통했나? 아침 9시까지 푹 잤다. 코끝은 얼어붙었어도.

너무 많이 잤나? 하느님께 좀 미안하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족욕하고 세수하고. 아침식사도 했다. 사막의 단순함을 명상하는 뿌스띠니아에서는 빵과 물만 먹어야 한다. 단순함과 고요함을 방해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허기질까 걱정돼 대책을 세웠다. 서울에서 가져간 선식가루에 설탕과 물을 부어 되직한 죽을 만든 다음 그것을 잼처럼 빵에 발라먹었다. 몸이 약해 이러지 않으면 하루 버티기도 힘들 것 같아서. 곡물가루를 잼처럼 만드는 것은 이곳 마돈나하우스의 금요일 금식(정확하게 말하면 절식)에서 배운 것이다. 콩 가루에 마늘, 마요네즈, 설탕 등을 섞어 빵에 발라먹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색깔이 좀 이상하긴 해도 마른 빵만 먹는 것보다는 부드럽다.

식사를 마치고 창가에 피어난 얼음 꽃을 바라본다. 창가에 낀 수증기가 맺어주는 얼음잎사귀들의 곡선은 경탄을 자아낸다. 고드름, 성에로 얼어붙은 창밖을 바라본다. 마치 내가 영화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내 마음에서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세면용 물통, 세수대야, 요강 등이 놓여 있다.
세면용 물통, 세수대야, 요강 등이 놓여 있다.

나에게 일은 무엇이었나

나는 사회적 명성과 부, 지위를 좇아 살지 않았다. 뜨거운 열정을 쏟으며 즐겁게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찾아 일해 왔다. “직업은 당신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깊은 허기가 서로 만나는 장소”라는 프레데릭 뷔히너의 말을 좋아한다. 나에게 일은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목소리가 들린다. ‘더 낮추라. 몸을 더 낮추라.’ 보름 넘게 마돈나하우스에서 설거지, 우표 붙이기, 양말 개기 등 단순노동을 하며 마음, 특히 머리가 편안했다. 동시에 다른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려왔다. 내가 이런 단순한 일 하려고 캐나다까지 왔나. 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영어가 능숙하고 돈이 넉넉했다면 아마 더 많은 곳을 여행하고 여러 강의를 찾아들으며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데 더 시간을 투여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치 있는 노동이라고 평가하는 것에 높은 기준을 두고 살았던 건 아닐까. 모든 노동하는 인간이 평등하고 똑같이 존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나 역시 돈을 더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더 높이 인정받는 노동에 대해 높은 의미를 둔 거 아닌가? ‘내가 이런 거 하러 왔나’ 할 때의 ‘이런 거’가 진짜 소중하다고 생각했다면 왜 나는 단순한 노동을 하면 안 되지? 과연 그 단순한 노동은 과연 폄하해야 하는 노동인가? 아주 단순하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노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소홀히 해선 안 되는구나. 내게 닥친 상황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성심을 다해야 한다. 결국 진리는 너무도 단순하다.

동시에 다른 질문이 고개를 든다. ‘사람들의 박수와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조차 내려놓아야 하는가?’ 매슬로우의 <존재의 심리학>에 따르면 인정욕구는 인간의 기본욕구다. 그런데 더 깊고 깊은 욕구(deep desire) 앞에 행위(doing)와 존재(being) 이것은 어떻게 자리매김을 해야 하나? 몸이 약해 방송 일을 접고 캐나다에 와서 나를 가장 많이 지배한 고민이 있었다. ‘체력이 약해 방송다큐멘터리작가를 그만둔다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어렴풋하게 답이 떠오른다. 무엇을 하든 영혼을 잃지 말자. 영적으로 성숙하는 삶을 살자. 열정을 다해 일할 분야가 아니면 선택하지 않는다. 일하기 위해 서둘러 나서지 않겠다.

 

마돈나하우스를 끼고 도는 마다와스카 강은 세인트 로렌스강으로 이어진다
마돈나하우스를 끼고 도는 마다와스카 강은 세인트 로렌스강으로 이어진다

마돈나하우스에 왜 있는가, 답을 얻다

노트에 일기를 쓰다가 오후 2시경 산책을 나갔다. 이가 시릴 만큼 춥다. 마돈나하우스를 끼고 흐르는 마다와스카 강은 하늘이 내려준 하얀 눈으로 투명한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물의 깊이에 따라 얼음이 꽝꽝 얼거나, 살포시 언 곳, 그리고 찰랑거리며 흐르는 강물이 어우러져 있다. 하나의 강에 얼마나 다채로운 그림이 살아 있는지. 각각의 무늬들이 모여 광활한 물가를 그려내고 있다. 꽁꽁 언 강 위에 눈이 쌓기고 그 위에 다시 바람이 날리며 마치 새털이 흩날리다 얼어붙은 형상. 각각의 수심이 빚어내는 자연의 곡선.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며 생각한다.

‘왜 여기 마돈나하우스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늘 뿌스띠니아에서 분명하게 들었다. ‘이 깊고 큰 고요함, 적막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구나.’ 지금까지 나에겐 이런 완벽한 소리 없음을 경청할 기회가 없었다. 이 소리 없음에서 마돈나하우스 사람들이 찾는 것은 하느님의 소리일 텐데. 나는 이 절대적인 고요함 속에서 다시 한 번 내 안의 깊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늘 뿌스띠니아는 나에게 완벽한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주은경
1980년대 인천에서 노동자교육활동을 했다.
1994년부터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며
KBS <추적60분> <인물현대사> <역사스페셜> 등을 집필했다.
1999년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기획실장으로
노동대학 첫 5년의 기반을 닦았다.
2008년부터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민주주의학교, 인문학교, 시민예술학교를 기획 운영하다
2020년 말 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현재 시민교육연구소 ‘또랑’ 소장.
지은 책으로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함께 쓴 책으로 <독일 정치교육현장을 가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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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a 2024-04-02 17:15:42
늘 무언가에 쫒기듯 바쁜 날들 속에서 뿌스띠니아에서 주샘이 경험한 것처럼 잠시 멈추고 비우는 시간을 갖고 싶네요. 일상에도 그런 귀한 시간과 공간에 머물고 싶네요.

뿌스티니아에서의 순백의 시간이 오래도록 주샘의 기억의 곳간에 남아 샘의 영혼을 맑게 해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