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사오 "그래도 너는 내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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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사오 "그래도 너는 내 형제"
  • 한상봉
  • 승인 2018.10.23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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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조연들-1

그날은 아주 청명한 날이었어요. 바람이 불 때마다 간간이 모래더미가 풀썩일 뿐 비교적 잠잠한 하늘 밑에 한참이나 혼자 서 있었습니다. 수년 전에 날 피해 바딴아람으로 도망갔던 야곱이 날 다시 만나러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전갈을 며칠 전에 들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그동안 몸붙여 살던 땅에서 결혼도 하고 어렵사리 재산도 모았던 모양인데, 외삼촌 라반과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그래서 고향이라고 다시 찾아오는 길이라지만, 아마 나 때문에 무척 망설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제 동생이지만, 예전엔 정말 얄밉게 굴었거든요. 지금이야 그저 ‘얄밉다’고 말하지만, 그때는 동생 얼굴을 다신 보지 않게 되기를 빌고, 본다 해도 가만 두지 않으리라 박박 이를 갈며 다짐했지요.

야곱은 내 인생에서 두 번씩이나 내 발꿈치를 잡아끌었죠. 우린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였는데, 그 아이가 내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 ‘야곱’이랍니다. 저는 온 몸이 털투성이라서 '에사오'라고 이름지었답니다. 할머니였던 사라처럼 제 어미 리브가 역시 도무지 아기를 낳지 못할 몸이었는데 하느님께 간청해서 얻은 아기가 우리 두 사람이고, 우린 어미 뱃속에서부터 서로 다투었답니다.

 

동생이었던 야곱은 계집애 같이 얌전하고 차분했지요. 제가 아이들하고 바깥에서 뛰어놀고 때때로 싸움박질을 하더라도 동생은 늘 문간에 앉아 햇볕을 쬐며 바라보고만 있었죠. 우린 형제라지만 같이 어울리질 못했고, 저는 그 아이에겐 별로 관심이 쏠리지 않았어요. 엄마는 늘 야곱을 두둔했는데, 아마도 야곱이 여러모로 약해빠졌기 때문일 겁니다. 여자란 흔히 동정심도 많고, 약한 자식일수록 더 감싸주는데 마음이 동하는 모양입니다. 남자들은 달라요. 보세요! 아버지 이사악은 항상 야곱보다 사내다운 저를 더 좋아했거든요.

그래도 다들 제 앞가림을 하는 모양입니다. 야곱이 허기진 내 뱃속을 담보로 떡과 불콩죽 한그릇으로 제 장자권을 가로챌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장자권이고 뭐고 사냥에서 돌아와 당장에 피곤하고 배고픈 데 그런 것 따질 여유가 저는 없었죠. 저는 삶에 자신감이 있었고, 그래서 뭐든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못된 습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미리 계획하고 움직인 적이 없어요. 그때 일은 그때 고민하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이 눈이 어두워진 아비마저 속이고 제가 받아야 할 축복마저 가로챘을 때는 정말 황당했어요. 아버지마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기가 막혀 부들부들 떨었을 정도였지요. 이 일을 꾸민 엄마도 서운했지만, 엄마가 시키는 대로 짐짓 거짓말을 하고 제 몫을 빼앗은 야곱은 정말 용서할 수가 없었죠. 야곱에게 주고나서 더 이상 나에겐 줄 복이 남아 있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저는 목놓아 울었습니다. 형제간에도 원수가 되는 것도 순간이에요. 제가 분통을 터뜨리자 겁이 난 엄마는 야곱을, 그래서 외삼촌댁으로 피신시킨 것이지요.

 

Isaac Blessing Jacob by Nicolas-Guy Brenet

그런 몇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줄곧 아버지 집에 머문 것은 저였고 야곱은 고향을 떠나야 했지요.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전 어디서든 잘 살아낼 자신이 있었고, 여전히 가부장권을 지녔던 아버지도 사실상 제편이었거든요. 아무리 요령을 부려보았지만 불쌍한 사람은 결국 야곱이었어요. 그는 그때까지 욕심은 있지만 아주 무력한 어린애에 불과했던 겁니다. 성질만 급했던 제가 그 성질만 좀 죽이고 동생을 돌봐 주었다면, 동생을 사내로 만들기 위해 뭔가 할 수 있었다면 야곱은 일찍 엄마의 치마폭에서 벗어나 제 몫의 일을 했을 것이고, 그런 불상사도 없었을 테지요.

그런 야곱이 객지에 나가 살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돌이켜 보면, 제가 하지 못했던 형 구실을 하늘이 알아서 해준 셈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바딴아람에서 객지에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그 시련을 이겨내고 어엿한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하느님께선 제 동생 야곱을 큰일에 쓰시려고 저를 걸림돌로 만들어 그에게 고난을 주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장인의 집에서 이십 년동안 낮에는 더위에 허덕이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제대로 밤잠을 잔 적이 없었고, 죽도록 일하고 양떼를 돌보았지만 장인은 갖가지 방법으로 야곱의 몫을 가로챘던 것입니다. 그 노동과 번민 속에서 그의 영혼은 강해졌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야곱이 야뽁나루를 건너서 저를 만나러 오기 전에 밤새 하느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께선 그뒤로 야곱을 일러 ‘이스라엘’이라 부르게 하고, 그를 히브리 백성의 원조(元祖)가 되게 하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땅을 “내가 여기서 하느님을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졌구나”하면서 브니엘이라고 부른 게 아닙니까?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오히려 제가 동생에게 이젠 부끄럽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던가요. 저처럼 아비의 재산을 물려받지 않고 야곱은 제 복을 스스로 짓는 사람이 되었던 거지요. 야곱은 정말 강하지만 겸손한 이가 되었습니다.

그날, 제가 야곱을 기다리던 청명한 그날, 그가 선물을 들고 와서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형님이 저를 이렇듯이 사랑으로 맞아주시니 형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마치 하느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음으로 기꺼이 이 집안의 상속권을 야곱에게 내어줍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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