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모든 길마다 당신과 함께, 예수님이 모든 언덕마다 당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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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모든 길마다 당신과 함께, 예수님이 모든 언덕마다 당신과 함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4.0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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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기도의 길] , 에스더 드발, 비아토르, 2023

얼마 전에 성공회 용산 나눔의 집에 다녀온 적이 있다. ‘선교적 교회’를 지향하는 개신교 목회자들이 주로 모여서 한 달에 한 번 함께 책을 읽고 수다를 떠는 ‘독.께.비’라는 모임이다. “독서 모임: 함께 맞는 비”라는 뜻이다. 처음 가 본 모임인데, 그 자리에 모인 분들은 목사지만 참 다른 목사들이었다. 퀴어 활동을 하는 분도 있고, 목수 일을 하는 분도 있고, 청소업체에서 일하는 분도 있고, 문화기획 분야에서 일하는 분도 있었다. 이른바 이중직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들인데, 저마다 고민의 축이 다양하지만, 대형교회와는 아예 담을 쌓고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며 성무에 임하는 목회자들이다. 이들은 전혀 보장되지 않는 불확실한 삶의 조건 속에서 복음적 투신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들의 복음적 분투가 나의 복음적 분투와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함께 하려고 한다.

이번에 그들과 함께 읽은 책이 에스더 드 발이 쓴 <켈트 기도의 길>이다. 에스더 드 발 여사는 영국 성공회 사제의 딸이며, 가정주부라는 점에서 ‘일상의 모든 공간을 거룩하게 바라보는’ 켈트 영성과 맞닿아 있음이 확연히 느껴진다. 여기서 말하는 켈틱 그리스도교의 영적 전통은 6세기 이후에 영국 선교를 시작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베네딕토의 영성이 유입되기 이전에 자리 잡은 영적 갈래라고 한다. 그리고 로마의 선교로 설립된 교회가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면, 켈틱교회는 주로 시골지역에서 수도원이 마을의 영적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 글은 우리에게 거룩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켈틱영성의 기도에 대한 글을 읽어나가면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목을 ‘다시 읽는’ 차원에서 옮겨놓으려고 한다. “기도가 힘이 되는 생활”을 기대하면서 켈틱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전통 안으로 들어가 보자.

 

얇은 장소

켈트인들의 기도는 오늘날 흔히 발견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이며 자기에게만 관심을 쏟는 경향을 발견할 수 없다. 모두가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이런 관계는 인간을 넘어 자연 생물, 새와 동물, 지구 자체까지 확장된다. 이것은 테이야르 드 샤르댕이 말한 “만유가 함께 숨쉬는” 기도이다. 이런 기도는 보편적인 갈망을 담고 있으며, 독특하고 세속적이며 신비하다. 참회의 깊이와 찬미의 높이를 보여준다. 이 기도는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부분을 만지면서도 외부의 타자들과 끝없이 연결시킨다.

켈트예술에 늘 나타나는 ‘끊어지지 않는 매듭’은 복잡한 패턴 안에서 질서를 창조하면서 만물 속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켈트인들은 자연, 동물, 계절의 변화 속에서 창조의 아름다움과 거룩한 체험을 기도로 고백한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참회와 찬미가 만나고, 물리적 영역과 영적 영역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얇은 장소’(thin place)이다. 굳이 성지나 순교자의 무덤이 아니어도 좋다.

그 얇은 장소는 하늘과 땅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곳이며, 하느님을 민감하게 느끼는 공간이다. 그곳은 켈트인들에게 생명을 위한 쉼터이며, 한적하고 비옥한 계곡일 수도 있고, 산 정상이나 높은 성벽처럼 안전을 보장하는 곳이며, 여기서 그들은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이 ‘얇은 장소’를 우리 일상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달려 있다. 우물가와 상점, 거리와 대장간, 부엌과 안방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면 이곳이 나의 ‘얇은 장소’로 편입되는 것이다.

아남카라-영혼의 친구

켈트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감각은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들의 거룩함과 신성함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키고,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를 기도의 공간과 성전으로 변화시키며, 파괴되고 훼손되는 지구 생태계의 고통에 민감한 연민을 느끼며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편 대륙의 가톨릭교회가 죄에 대한 감수성을 극대화시키면서 공식적이고 공개적이며 성직자 중심의 죄 처리 절차를 ‘고해성사’를 통해 강화하는 동안, 켈트교회는 상처에 대한 감수성을 통하여 동료 신자들 사이에 ‘영혼의 친구’로서 나누는 영적 동반을 선호한다. 고해신부를 아일랜드어로 ‘아남카라’(anamchara)라고 부르는데, ‘영혼의 친구’라는 뜻이다. 이들은 아픈 영혼에게 적절한 치료법을 제공하는 일을 한다. 결국 죄 많은 인간은 보속과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영적 치료란 영혼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약한 것을 완전하고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영혼의 친구는 다른 이들의 영혼을 돕고, 영혼의 약을 챙겨 주고, 평생 지지하며 도전하도록 격려해 주는 사람이다. 켈트교회에서 아남카라는 사막 전통의 ‘독방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곧 자기 삶의 비밀스러운 면을 드러내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단순히 내 죄를 고해소에서 몇 가지 보속을 통해 처리해 주는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 독방은 하느님과 참된 나, 그리고 세상이 만나는 곳이다. 따라서 독방을 공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마음과 정신을 나누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진실하고 깊은 형태의 ‘우정’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우정 안에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그러므로 영혼의 친구는 성직자와 신자를 가리지 않고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화해와 치유를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9세기의 <컬디 수도사 욍거스의 순교록>에 자주 인용되는 성 브리짓(Brigit of Ireland, 451-525)의 말이 있다.

“영혼의 친구가 없는 자는 머리가 없는 몸에 불과하나니, 영혼의 친구가 없는 자는 마시거나 씻을 수 없는 더러운 호수의 물과 같다.”

그러니 남성과 여성이, 여성과 여성이, 남성과 남성이, 성직자와 신도가 영혼의 친구가 되는 것은 중요하다. 영혼의 친구는 모든 이가 자기 길을 찾도록 영적 길라잡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스승이 없는 학생이 불행하듯이, 영혼의 친구가 없는 이는 길을 잃는다. 영혼의 친구를 정기적으로 만나는 수행은 영적 관계 안에서 우리를 성장시킨다. 영혼의 친구는 온정과 친밀함, 정직으로 가득 찬 참된 우정을 나누고, 나이와 성별에 구분을 두지 않고 서로의 지혜를 깊이 존경하는 축복의 원천이 되는 관계이다.

 

켈트인의 기도

켈트 그리스도인들은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교회전통과 달리 일상적인 활동과 경험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수도원은 늘 마을과 생활의 중심이었으며, 그들은 농사를 짓고,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늘 기도를 드렸다. 그들에게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실질적인 구분은 없었다. 하느님은 늘 가까이 있으며, 가장 친숙한 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성인과 천사도 가까이 있었다.

켈트 그리스도인들은 요한복음에서 많은 통찰력을 얻었는데, 요한복음의 상징은 독수리다. 독수리는 더 깊이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 너머를 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매일 매 순간 어디서나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는 켈트인의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동반하며 삶을 지탱하게 돕는다.

하느님이 모든 길마다 당신과 함께
예수님이 모든 언덕마다 당신과 함께
성령님이 모든 개울마다 당신과 함께
해안의 절벽과 산등성이, 빈 들
바다와 땅, 황무지와 초원마다
누울 때와 일어날 때
일렁이는 파도와 자욱한 물보라에서도
내딛는 모든 걸음마다 당신과 함께

사우스 유이스트의 소농이었던 매리 맥도날드(Mary MacDonald)가 남긴 여행자를 위한 축복기도이다. 여행자들은 길 위에서 만나게 될 낯선 이들을 떠올리고, 앞으로 마주칠 미지의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소통하는 상상을 하며 자신을 위한 축복을 구한다. 이 기도는 여행자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후렴처럼 다음 노래가 이어진다.

나의 말에 생명이 있어
살아 움직이고 깨어 느끼게 하소서.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 입술에 핀 꽃이 지지 않게 하소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내 모든 마음을 채우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모두를 위해 내게 넘치게 하소서.
산 중턱의 동굴을 지나, 숲을 가로질러,
길고 거친 계곡을 가로지를 때,
순백의 마리아여, 나를 들어 세우시고
목자 예수여, 나의 방패 되소서.
순백의 마리아여, 나를 들어 세우시고
목자 예수여, 나의 방패 되소서.

그때 작별인사를 하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이 찾아와 선물을 건네주고, 새롭게 정착할 땅에서 평화롭게 지내며 번영하도록 기도한다. 유이스트의 한 눈먼 노파는 이런 인사를 한다.

“규칙을 따라서는 사랑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당신의 마음은 벅차서 흐르는 눈물을 도무지 거둘 수 없게 되겠지만요.”

이 기도들은 보는 바와 같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앞에서 단순하고 반복적인 선율로 느리게 읊조리거나 노래한다.

하느님의 복이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복이 당신에게,
성령의 복이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자녀에게
당신과 당신의 자녀에게.
하느님의 평화가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평화가 당신에게,
성령의 평화가 당신에게,
당신의 모든 삶 동안에,
당신의 모든 날 동안에.
하느님이 모든 길목에서 당신을 살피시고,
그리스도가 모든 길 위에서 당신을 돌보시고,
성령이 모든 시내에서 당신을 정화하시기를,
당신이 가는 모든 육지와 바다에서.

 

성 패트릭의 흉갑기도

성 패트릭의 ‘흉갑기도’만큼 그리스도인들에게 든든한 기도는 없다. 흉갑(胸甲, coriaceus)이란 “가슴 부위를 보호하는 금속제 갑옷”을 뜻한다. 그러므로 흉갑기도란 그리스도인 전사들의 보호이며, 삶의 여정에 필요한 방패이다. 이 흉갑기도를 읽고 내 삶의 기도로 삼는다면, 저 높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지금 내 곁에 계시어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분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 일부를 먼저 읽어보자.

그리스도여, 오늘 나의 강한 보호자가 되어 주소서.
독에 물들거나
불에 데지 않도록
물에 빠지거나
해를 입지 않도록
넓고 풍성한 도우심을 구하나이다.
그리스도 내 옆에, 그리스도 내 앞에,
그리스도 내 뒤에, 그리스도 내 안에,
그리스도 내 아래에, 그리스도 내 위에,
그리스도 내 오른편에, 그리스도 내 왼편에,
그리스도 내가 눕고, 앉고, 서는 곳에
그리스도 나를 아는 모든 이의 마음에,
그리스도 나를 만나는 모든 이의 혀에,
그리스도 나를 보는 모든 이의 눈에,
그리스도 나를 듣는 모든 이의 귀에.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현실이 곧바로 뒤바뀌지는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어둠의 힘에 짓눌려 있을지도 모른다. 흉갑기도는 값싼 낙관주의를 제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무미건조한 확신이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파괴적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과 고통과 슬픔에 직면하면서도 끝내 넘어지지 않도록 돕는다. 흉갑기도는 내가 지치고 우울하며 타인에게 무관심해지고 마음이 표류할 때, 그래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동력을 제공한다. 그 기도 안에서 생기를 얻어 새로운 걸음을 내딛게 한다.

흉갑기도를 바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지금 내 안에 살기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천천히 기도해야 이런 생각을 충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사방으로 그리스도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분은 내 삶의 모든 차원에 존재하신다.

그러니, 성 콜롬바누스의 아래 설교를 기도 안에서 기억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는 복되다.

“주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게으른 잠에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 안에 거룩한 사랑의 불을 피우십니다. 그 사랑의 불꽃은 모든 별 위로 솟아오릅니다. 거룩한 불이 내 안에서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기를! 내게 불을 돌보고 살리며 결코 꺼지지 않도록 불꽃을 피울 불쏘시개가 있다면, 그리하여 끄는 법을 모른 채 그저 불을 키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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