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도로시의 동지들 … 피터와 아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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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도로시의 동지들 … 피터와 아몬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12.27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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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모린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일꾼운동을 이끌어가면서 강한 의지를 지닌 몇몇 남성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일꾼운동의 공동 창립자인 피터 모린(1877~1949)과 “한 사람의 혁명” 주인공인 아몬 헤네시(1893~1970)와는 특별한 동지관계였다. 피터 모린과 매우 가깝게 지냈던 매리 알리스 자렐라는 일꾼 운동의 두 창립자들 사이의 공생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피터는 도로시의 선생이었다. 그는 도로시에게 교회에 대해, 가톨릭으로서 도로시가 어떻게 이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지를 가르쳤고, 책 읽는 것을 지도했으며 도로시가 현재의 모습으로 형성되는 기반을 주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남자들은 제안하고, 여자들은 처리한다.” 이 말은 피터와 도로시의 경우에도 확실히 맞는 말이다. 피터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고, 도로시는 그것들을 실행했다.

나는 도로시가 이상을 살기 위하여 일꾼에 오는 사람들과 친밀했던 것처럼 그렇게 피터와 친밀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예를 들면 나는 그들이 함께 소곤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함께 산책은 했을 것이다. 도로시는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물론 피터는 다른 사람이 차에 태워주지 않으면 절대로 차를 타고 어딜 가는 법이 없었다.

아일린 이건이 더 상세하게 표현한다:

❧ 도로시는 피터 모린에게서 여러 생각들을 얻었다. 그리고 도로시가 그 생각을 받아서 실행한다는 것은 대단히 겸손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피터를 보면 … 그는 마치 옷을 입고 밖에서 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터에게는 도로시가 원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었고, 도로시는 그를 자신의 영적인 스승으로 선택했고 그 선택을 지켰다. 피터는 도로시에게 교회의 가르침, 교황회칙들을 가르쳐 줄 수 있었다. 가톨릭인들 대부분은 그냥 회칙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쳤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몰랐고, 노동자들의 권리와 자본주의와 금융의 사악함에 대해 회칙이 어떤 입장인지도 몰랐다.

죠오 자렐라는 일꾼에 피터만 있었다면 자기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 도로시는 피터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 젊은 친구들이 피터를 충분히 존경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피터의 정신과 역사의식에 감명을 받았지만 나를 움직이게 하진 못했다. 도로시가 –그는 이 말을 혐오하지만– 운동의 심장이었다. 그렇다고 피터가 전혀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거인을 변화시켰다. 바로 도로시를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도로시가 피터에 대해 말하는 방식들은 약간 이중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제인 쌔몬은 도로시가 피터에 관해 말했던 이야기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 두었다. 그 때 제인은 도로시에게 피터를 성인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여기 도로시의 대답이 있다:

❧ “아, 그래요. 피터는 마음이 올곧은 사람입니다. 그는 비전을 갖고 있어요. 예를 들면 내 올캐 테사의 아파트에서 한번은 라디오의 콘서트 음악을 듣고 있었고 나는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있었어요, 난 피터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냥 대고 있었을 뿐이지요, 그런데, 피터가 일어나더니 테사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자기의 「쉬운 글들」 중의 한 부분을 속삭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피터에 대한 도로시의 비꼬는 유머를 시애틀의 죤 윌리암스가 알려준다:

❧ 1979년 이곳 시애틀에 가톨릭 일꾼 환대의 집을 시작했을 때, 우린 도로시에게 편지를 보내서 집 이름을 '도로시 데이 하우스'로 부르게 해달라고 청했어요. 도로시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 왔어요, “아,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요, 항상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바보들의 얼굴들처럼, 바보 같은 이름입니다. 대신 ‘피터 모린 하우스’라고 부르세요.”

그러나 도로시는 피터에 관해 끊임없이 말하고 글을 쓰곤 했다. 그래서 아마도 피터가 일꾼 운동의 중추였다는 전설을 도로시가 만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톨릭 일꾼에 매우 중요한 인물로 도로시와 모호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은 아몬 헤네시였다. 아몬은 1952년에 일꾼에 왔고 잠시 동안 가톨릭교회에도 나갔다. 스스로를 “1인 혁명”이라고 칭하면서 아몬은 그 때 미국에 퍼져있었던 냉전에 신선한 해독제 역할을 한 항의, 시위에 대한 열정을 일꾼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아주 매력적인 사람으로, 아몬은 아마도 도로시와 사랑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일꾼 운동의 몇몇 여성들에 대해서도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아몬이 가톨릭이 된 것은 단지 도로시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이클 해링톤이 말하는 것처럼, “그건 성령과 상관없는 문제였고 인간적 사랑과 더 관계가 있는 문제였다.”

로버트 스티드는 도로시에 대한 아몬의 관계에 대해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 아몬은 도로시와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일꾼에 왔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그럼에도 아몬이 그런 상황을 파악하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렸다. 아몬은 일꾼에서 5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매일같이 일꾼 신문을 가지고 나가 팔았고, 모든 우편물에 답신을 보냈다. 노예처럼 일했다! 도로시는 아몬이 반가톨릭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말해도 그를 참아주었다.

아몬은 태생이 저항자였다. 그는 99% 도로시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가톨릭이 되었고 난 그가 가톨릭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성직자들에 대해 말하거나 믿지 않는 교의들을 말함으로써 도로시를 화나게 만들었다. 도로시의 생각은 누군가 일단 가톨릭이 되었으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몬은 도로시를 숭배하고 도로시가 말하는 모든 것은 법이 되었다. 그러나 도로시는 그냥 그를 칭찬했을 뿐이다.

내가 말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몬과 도로시가 가까웠던 것은 함께 나누는 이상과 관심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개성은 서로 어떤 정서적인 매력을 오래 지속시킬 수 없을 정도로 달라서 많이 부딪쳤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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