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마음의 환대 "먹기 위해 일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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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마음의 환대 "먹기 위해 일할 필요는 없었다"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10.26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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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도로시의 가장 놀라운 측면은 그가 끝까지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쥬디스 그레고리)

환대는 가톨릭 일꾼의 핵심이며 중심이었다. 환대는 신체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들은 흔히 손님들이라고 불리웠다)과 영적인 필요를 원하는 사람들(이들은 일꾼이라고 칭하는데) 양쪽에게 제공되었다. 가톨릭 일꾼의 이론은 이 둘 사이의 구분을 두지 않지만, 보통 말할 때에는 환대 일을 도우러 온 사람들을 일꾼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손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1988년 캐시 템플이 나에게 말한 것처럼, “가톨릭 일꾼의 철학을 좋아해서 뉴욕의 환대의 집에 오는 사람들은 이곳에 더 짧게 머물고 손님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12년 이상을 살고 있다. 그러니 누가 주인인가?”

지난 수년간 손님들의 구성에 변화가 일어났고 그것 때문에 손님과 일꾼 사이의 구분이 더 뚜렷해졌다. 대공황시기에 스프라인(급식)에 선 사람들과 스프를 나누는 사람들을 갈라놓았던 것은 대부분 단지 불운 때문이었다. 하퍼 앤 로우 출판사의 앤 퍼킨스는 도로시의 나이 60대에 그를 만났다. 앤은 가톨릭 일꾼이 섬겼던 사람들 사이에 일어났던 변화에 관하여 도로시가 얘기해줬던 것을 기억한다:

❧ “(도로시) 우리는 진짜로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어요. 어느날은 한 남자가 목에 뱀을 걸고 오기도 했어요.” 우리는 도로시가 신문에 쓴 글을 모두 읽었다. 그래서 일꾼에 오는 사람들이 넉넉지 않고, 잘 먹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건장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수 년 후 도로시가 나에게 알려준 사실은, 1930년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일이 없고 가난해서 왔는데, 후기에는 또한 정신적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왔다는 것이다.

일꾼에서는 먹기 위하여 일할 필요가 없었다. 무상으로 어떤 제한도 없이 환대가 제공되었다. 환대는 도로시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였다. 짐 윌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가톨릭 일꾼 환대의 집에는 누구나 올 수 있었고, 그 사람이 어떤 짐을 갖고 와도 들어올 수 있었다. 도로시는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스펠만 추기경에 대해서는, 그리고 국방성의 장성들에 대해서는 판단했으나, 그것도 잘 풀어나갔다). 이 지상에서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 누구도 도로시는 판단하지 않았다. 낙태를 해야 했든, 자해를 하는 사람이든, 알콜 중독과 성 문제를 가졌든 누구도 판단하지 않았다.

베티 바텀도 덧붙인다:

❧ 스프 급식은 모든 것이었다! 애덕활동 없이 일꾼 집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로시는 또한 다른 면에서 사려가 깊고 관대하였다. 예를 들면 자원 봉사자 중 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자 도로시는 그에게 레슨을 받게 하고 수업료를 지불했다. 그 봉사자는 아주 훌륭한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고 시 문화관에서 독창회도 열었다. 이처럼 도로시의 애덕은 단지 바우어리 지역의 손님들에게만 미치지 않았다.

그의 애덕은 길의 나그네들뿐만 아니라 오랜 친구들에게도 미쳤다. 클리브랜드 가톨릭 일꾼 집의 도로시 고샤트는 감명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 나는 남편 빌이 알콜 중독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도로시는 나에게 계속 기도하라고 말했고 덕분에 절망에 빠지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나에게 충고를 했지만 도로시 자신도 그런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내가 너무나 녹초가 되어 뉴욕으로 가는 기차를 탄 적이 있었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도로시는 나를 한껏 포옹해 주었다. 그는 내가 얼마나 피곤한지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침실로 나를 데려가서 침대를 깨끗한 이불로 갈아주며 말했다,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했으니 천천히 오랫동안 욕탕에 앉아서 쉬세요.” 그는 매우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때때로 도로시는 심각하고 단호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나 강하게 보이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도로시는 모든 사람의 고통에 너무나 민감했다. 모든 사람의 고통에.

그의 고별식 때에, 모든 유명한 사람들이 다 모였다. 그 때 한 노숙자가 관 옆에 서서 울기 시작했다. 넝마를 걸치고 초라하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계속 중얼거렸다, “그는 우리를 사랑했어요, 우리의 말을 들어줬어요, 우리를 사랑했어요.” 그리고 나서 그는 도로시에게 키스하기 위하여 몸을 구부렸다.

리챠드 맥쏠리 신부는 말한다, “도로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가를 진짜로 알아볼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혐오감을 일으키는 사람을 사랑하는 거라고 자주 말했다.” 그리고 짐 훠레스트는 한 사회사업가가 도로시에게 사람들이 환대의 집에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가를 물었던 것을 기억한다:

❧ 도로시는 “우리는 그들이 영원히 있도록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와 함께 죽고, 우린 그들에게 그리스도교식 장례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죽은 다음에 기도합니다. 그들이 일단 환대의 집에 들어오면,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아니, 그들은 항상 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지요.”

실제로, 도로시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가장 놀라운 인내심을 갖고 있었다. 톰 코넬은 가톨릭 일꾼집을 자기집으로 삼았던, 전형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한 사람을 기억한다:

❧ 폴 부르노를 기억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를 '미친 폴'이라고 불렀다. 도로시는 폴형제가 정신에 있어서는 얼마나 프란치스코회 회원다웠는지, 그가 동물과 새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들을 먹이는지, 새들이 그가 먹이를 갖고 나타나기를 얼마나 기다리는가에 대해 쓰곤 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가 했던 것은 가톨릭 일꾼 집에서 젖은 쓰레기를 갖고 나가서–냄새가 너무나 고약한 쓰레기들– 길가에 내버리면, 그 끔찍한 비둘기들이 나타나 싹 먹어 치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도로시는 이런 행위 속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보았다. 그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건 도로시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부족함일 것이다. 나는 그런 도로시를 사랑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아름다움과 고귀함과 따스함과 가치를 보았다.

도로시는 또한 사제들에게도, 때때로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런 사제들에게도 환대를 넓혔다. 성찬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는 항상 집들 안에 사제가 살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물론 수십년 동안 사제들은 일꾼 공동체를 방문했다. 신학교에 있을 때나 서품 받은 후에도 왔다. 수많은 사제들이 도로시 데이의 영향을 받았다. 예수회 회원인 제임스 죠이스는 도로시가 “사람들은 사제를 필요로 한다”고 그에게 말했던 것이 계속 사제생활을 하는 이유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고 팻 러스크“도로시가 사제들에 대해 각별했다”고 말했다. 전 가톨릭 일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도로시는 “자연인”으로서 사제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독신 약속의 십자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교구 사제들이 은퇴한 후 홀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알았다. 어떤 노인 사제들은, 특히 노동조합을 지지했던 사제들은 그들에게 반대했던 주교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을 너무나 당당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많은 주교들이 조합을 반대하는 자본주의 고용주들의 신세를 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노동조합 사제들 중의 한 사람인 활리 신부는 서해안 국제 부두 노동자 연맹을 지지 했는데, 그 연맹의 지도자는 공산당으로부터 기금을 수락했다. 연맹을 둘러싸고 폭력사태가 자주 일어났다. 이런 사태는 고용주들과 공산당 탄압정책의 선동으로 일어났다. 그래서 활리 신부는 지역 교구에서 징계를 당했다. 그가 은퇴했을 때 도로시는 그를 매리 농장에 거주 사제로 초대했고, 그가 젊은 일꾼과 충돌했을 때 활리 신부의 편을 들고 젊은이를 도시로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나치와 공산주의자들 치하에서 고통을 겪었던 알콜 중독의 동유럽 사제 엘리아스 신부가 있었다. 이 신부는 도로시를 공산주의자로 여겼고 한번은 술에 취했을 때 일꾼 집 바깥에 서서 수 시간동안 도로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도로시는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

팻 죠르단은 도로시의 이런 연민과 상식의 조화에 대해 말한다:

❧ 캐트린과 내가 가톨릭 일꾼에 있을 때, 가장 놀라운 일은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용서의 느낌이었다. 당신은 일꾼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못할 짓들을 하는지 알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 쓰여지지 않은 이 그리스도교의 용서의 정신으로 인해, 사람들은 다시 돌아올 수 있었고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수없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도로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계속 되풀이 말했다. 우리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해야 한다.

도로시는 환대와 용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냥함으로 모범이 되었다. 죠한나 휴 터너가 말한다:

❧ 도로시는 참으로 당신이 있는 곳을 절대적으로 편안하게 만들고 보호받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솜씨를 지녔다. 그는 많은 책들과 편안하게 해 주는 것들을 갖고 있어서, 당신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안락의자나 침대에 들어가도록 해주고 당신이 편안하고 보호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적당한 높이의 베개를 찾아줄 줄 안다. 적절한 음악, 적절한 책들 … 적절한 음식을.

그가 살고 있는 어느 곳에서나, 도로시는 “호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고 니나 폴린 무어는 말한다. 쉐일라 듀간은 도로시를 “완전한 잠자리와 아침 식사의 여주인”이라고 불렀다. 함께 있어야 할 사람들을 어떻게 함께 있게 하는지를 파악하는 여주인이었다.

도로시의 딸은 어머니로부터 “훌륭한 가톨릭 일꾼은 당신에게 기운을 불어 넣어주고 모든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드는 사람이며, 그것이 환대의 정수이며 기본요소라는 것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친절함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게 된다. 당신은 그저 옆으로 비켜나 있으면서 치유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친절함은 환대가 사려 깊게 주어지지 않을 때 생겨날 수 없다. 브라이언 터렐은 도로시가 어떻게 한계를 긋는가를 알고 있었고 일꾼에 오는 젊은이들에게 이것을 가르치려고 했다고 회상한다:

❧ 젊었을 때 처음 가톨릭 일꾼 집에 있게 되면, 당신은 온갖 종류의 이상함과 혼동을 견디기가 매우 힘들다. 나는 처음에 한계를 두고 문을 닫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스프가 남아 있는 한, 아무리 늦어도 나는 스프를 제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 날 사람들은 유리창을 부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날 그들은 늦은 시간에 왔고 스프를 먹었기 때문이다.

도로시는 나에게 말하곤 했다, “당신은 왜 이 사람들을 다 들어오게 했습니까? 이건 미친 짓입니다!” 실제로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젊고 빠르다. 당신은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들은 다른 갈 곳이 없다. 그들은 조용하게 앉아 있을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사람이 들어와 온갖 인종차별적인 쓰레기 같은 말들을 소리치며 정신분열 같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스프를 벽에다 던져대는 일없이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당신은 젊고 이상주의자이고 낭만적이고, 그런 당신을 꽤 냉철하고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사람들의 집이고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유지해야 한다.”

아일린 이건은 길거리 사람들에 대한 도로시의 민감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말한다:

❧ 우리는 항상 식사 전에 기도를 했는데 보통 이렇게 했다, “주님께서 다른 이들의 소원을 마련해 주시고 우리 영혼에 영원한 음식이 되시기를.” 어느 날 나는 도로시에게 말했다, “알다시피, 때때로 사람들은 그들이 갖지 말아야 할 것을 원할 때가 있어요. 그러니 대신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들의 영혼에 영원한 음식이 되시기를.” 그러자 도로시가 그렇게 하자고 했다. 두 주간 동안 우리는 “주님께서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를”이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로시가 말했다, “아일린, 그 전 기도를 다시 해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해요.”

아일린은, “물론, 사람들은 우리가 승인하지 않을 것들 혹은 우리자신을 위해서는 원하지 않을 것들을 많이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짐 훠레스트는 도로시가 실천했고 가르쳤던 환대를 “마음의 환대”라고 부르고 “그런 환대는 우리가 보고 응답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그런 환대를 우리가 실천할 때에, 도로시가 가르쳤던 것을 마침내 이해하게 될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어떤 성스러운 것 앞에 있음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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