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교회비판,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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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교회비판,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10.31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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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피터 럼스덴은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 교계와의 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통찰을 하고 있다:

❧ 여성들은 사실 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도로시도 많은 이점을 누렸다. 그는 어떤 측면에서 그다지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들을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남자가 그랬다면 일으켰을 반대, 대립이 일어나지 않았다.

도로시는 또한 개종자가 갖는 순박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고 이런 모습은 스펠만과 맥킨 타이어 추기경들에게 매우 좋은 모습으로 비쳐졌다. 나는 도로시가 이들 공포스러운 반대자들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운동을 꽃 피울 수 있게 한 외교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로시는 그의 마지막 연설에서 매력이나 외교술 그 이상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예수회 회원 리챠드 맥쏠리는 이렇게 말했다:

❧ 도로시는 항상 최고로 할 수 있다는 신뢰를 주는 사람이었다. 19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 때에도 그랬다. 주최 측은 대회의 한 일정으로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날에 군인미사를 잡아놓았다.

우리 위원회는 이 미사를 준비하고 있는 신부를 만나러 갔다. 그 신부는 기가 막히게 그 날이 히로시마 원폭일인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든 주요 연사들이 이 사건에 관해 언급하도록 요청했는데, 유일하게 말한 사람은 도로시 뿐이었다. 그러나 도로시는 필라델피아 대교구를 비난하지 않으면서 그의 고유한 방식으로 말했다. 도로시는 다만 그날이 히로시마를 기억하는 날이어서 우리가 그 미사에 간다면, 분명히 후회하면서 미사에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때 가톨릭 일꾼에 있었던 로버트 엘스버그는 도로시에게 떨어진 책임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기억한다:

도로시는 그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슬픔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주교들의 얼굴을 보고 비판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는 대회에 초대받은 것을 큰 영광으로 느꼈고,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 교회에서 도로시보다 더 위대한 도덕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79살의 나이에 도로시는 이곳에 있고, 그런 불편한 말을 하도록 초대된 유일한 순간이었다. 꽤 오랫동안 도로시는 급진주의자로서 교계와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도로시의 마지막 연설이었고 대회는 그에게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이라는 주제를 주었다. 그는 자신이 초대된 것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무료 스프 급식 그리고 도시의 모든 굶주림 사람들과 자기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어서 도로시는 성체에 대한 자신의 신심을 말하면서 이렇게 전개해 간다, “저의 개종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제 주위의 물질세계가 저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 교회에 대한 저의 사랑과 감사는 오랜 세월 동안 커 왔습니다. 교회는 저의 어머니였으며 저를 키워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도로시는 계속 말하기를 교회가 또한 그에게 참회의 필요성을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이 참회에 관해 언급하면서 도로시는 히로시마에 관하여 도전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도로시는 정치적인 측면과 신비적인 측면 두 가지를 다 내놓았다. 「긴 외로움」(자서전)에 나오는 구절에서 도로시는 그의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이 교회에 대한 불만족과 분리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교회에 대한 사랑이 열정적으로 정통파이고 매우 고집스럽지만, 교회에 대한 어떤 비판도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의 태도와 도로시의 이런 태도는 너무나 대조를 이룬다.

마음으로부터 말했기 때문에, 도로시는 성체에 대한 사랑과 교회가 세상과 맺는 타협적인 태도에 대한 깊은 불만족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었다. 도로시는 이 두 가지 측면의 필연적인 연결을 보았으며, 아마도 청중 속에 있는 대부분의 주교들보다도 더 잘 깨달았을 것이다. 톰 코넬이 지적하듯이, “도로시의 급진주의는 교회에 대한 충실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도록 촉구하였다.맥쏠리 신부 역시 로마 가톨릭으로서 도로시의 삶에서 또다른 통합적인 측면들을 보고 있다:

❧ 도로시 이후 교회 안에는 복음적 차원에서 볼 때 좌,우라고 할 수 있는 분열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오른쪽 사람들은 종교를 개인적인 것으로 보고, 아무런 사회적 차원이 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왼쪽 사람들은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일하며, 개인 기도를 거의 하지 않는 가톨릭인들이다. 이러한 분열은 좌우 양 그룹 사이의 오해와 잘못된 정보로 인해 더 넓어지고 있다. 도로시와 가톨릭 일꾼은 양편을 한데 모은다.

그러나 교계는 상황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특히 일꾼 운동 초창기에는 더욱 힘들었는데, 스페인 내란 때 도로시가 취한 중립의 입장, 2차 세계대전시의 평화주의입장, 그리고 커져가는 노동 운동에 대한 그의 일관성 있는 지지 등은 재정면에 있어서 또한 정치 차원에서 보수적인 성직자들과 그를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했다.

하지만 도로시 데이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 이런 불협화음은 점차 조용해졌다. 맥쏠리 신부는 도로시가 죽기 1년 전에 방문하였고 그때, 그는 성직자들과의 초기 관계에 관하여 말했다. 맥쏠리 신부는 도로시에게 온갖 “미묘한” 질문들을 던졌다고 말한다:

❧ 도로시는 질문들에 답할 때 매우 차분하고 평온했다. 예를 들면 그는 여성 사제들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나는 상황이 똑같이 영원히 지속 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우리는 여성 사제들을 갖게 될 것이지만, 지금 현재 미국 가톨릭교회의 문화가 여성 사제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먼저 단계는 결혼한 사제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여성들이 사제들과 협력하며 제단에 더 가까이 있게 될 때, 사제들과 결혼하게 될 때, 미국 교회 문화는 여성 사제들을 맞이할 준비가 될 것입니다.” 도로시는 이렇게 말하면서 매우 평화롭고 침착해 보였다.

록펠러 제단 건물 앞에서 본 뉴욕의 성 패트릭 대성당. 사진=한상봉

나는 그가 교구와 무슨 마찰이 있었던 적이 없는지 물었다. 그는 “아니요, 난 기억나는게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묘지 인부들의 파업을 지지했던 때는 어때요? 그 때 대주교는 신학생들을 동원하여 묘지에서 일하도록 조처했지요?”하고 말했다.

도로시는 그 질문에 이렇게 말하면서 슬쩍 받아 넘겼다, “난 한 번 뉴욕 교구청으로 호출을 받았지요. 그래서 비서들과 직원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방을 지나 마침내 몬시뇰의 책상에 도착했더니, 그는 일어서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고맙습니다, 와주셔서, 데이 여사님. 이제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앉았고 몬시뇰은 말했어요,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우리 사무실 안에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압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지시를 따를 필요가 없지요. 우린 그들에게 당신과 이야기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당신을 보았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도로시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대교구와 관계를 맺었지요.” 주교관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도로시는 복음과 가난한 이들과 그런 분명한 방식으로 자기를 동일시했으므로 그에 대한 어떤 비판적인 견해도 마치 주교관이 복음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자주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만일 대주교가 가톨릭 일꾼 운동을 끝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도로시는 항상 대답했다, “뭐, 난 끝낼 것이다. 일꾼운동이 하느님의 일이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할 것이다.” 이제 대주교는 도로시의 그런 순명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일꾼운동을 시험해 볼 의미가 없었으며 교구도 마치 복음 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도로시가 그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단지 사실일 뿐이었다.

대주교는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바를 대변하고 있었고, 교회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때라도 표현해야 했다. 그래서 … 예를 들면 교회가 고용했던 묘지 인부들이 교회에 반대하여 파업을 일으켰을 때, 나는 비록 묘지 인부들은 생계임금을 위해 싸워야 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교구가 그들의 파업을 깨뜨렸다는 사실이 공개되기를 원치 않았다고 확신한다.

도로시는 언젠가 빵과 물고기의 기적이 매일 일꾼 운동의 삶 속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어떤 창립기금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세월 동안에 도로시는 어떤 주교에 의해서도 중단되거나 간섭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교회 역사를 고려할 때, 이런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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