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이 다시 그 숫자와 영향력이 커져가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 전쟁시기였다. 가톨릭 일꾼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선두에 있었고 가장 강력한 소리를 내었다. 공개적으로 징집서를 태워 감옥에 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러 형태의 저항 움직임이 일어났다.
톰 코넬은 1960년대에 도로시가 끼쳤던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가톨릭일꾼은 다른 그룹들과 많은 협력관계에 있었고, 도로시는 이러한 연대활동에 관해 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전쟁 반대연맹, 비폭력 행동위원회 그리고 내가 임원으로 함께 했던 화해동지회와 연대했다. 아마도 그 때 우리는 정부에 대해 억제하는 역할을 통하여 약간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본다.
우리는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전쟁은 12년이나 계속 되었다(멈춤). 전쟁이 길게 계속 될수록 우리 젊은 사람들은 더 절망감을 느꼈다. 1968년 쯤, 당신도 비폭력의 결단을 내린 젊은 사람들이 의문과 회의를 느꼈던 것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집단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서신을 보내고 글들을 썼다. 우리는 시위를 했고, 사람들을 교육했으며, 단식과 기도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더 악화될 뿐이었다.
캐시 맥켄나는 남편인 죤과 함께 1966년 보스톤에 일꾼 공동체인 할리 하우스를 설립했다. 캐시의 관점은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더 적극적인 구성원들의 생각을 반영해 준다:
❧ 그 때는 사납고 모진 시기였다. 징집서 문제가 모든 것에, 모든 사람들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너무나 쇠약해지고 무기력에 빠졌던 때였다! 아무것도 성취할 수가 없다고 느꼈고, 모든 에너지를 전쟁을 중지시키는데 쏟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할리 하우스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3분의 2가 전역군인들이었다. 엉클 샘이여, 영원하리! 우리 친구들 대부분은 감옥으로 갔고,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런 변화를 볼 수 없어 초조해 갔다. 참지 못하는 젊은 날의 엄청난 병폐여. 그리곤 분노 속에 익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로시는 항상 현존했고, 항상 사람들을 지지해 주었다. 이 복잡한 징집서 문제에 관하여 모든 가톨릭 일꾼들이 똑같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이것이 양심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모두 전적으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들은 젊었고 열정에 불타올랐다. 우리들 중에는 –아마도 도로시는 이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에 등급을 매기는 경향이 있었다. 알다시피, 당신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급진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가톨릭에 대해서나, 반전입장, 혹은 비폭력에 대한 결정 등등에 관하여 서로를 재단했다. 그러나 아무도 도로시에 대해서는 감히 그러지 않았다.
도로시가 수녀들에게 말하기 위하여 보스턴에 온 적이 있었다. 죤과 나는 그때 활동하고 있었던 지역 사람들을 대표하여 똑같은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었다. 나는 격정으로 떨고 있었다. 여기에 대모가 왔다니!
죤과 나는 그 때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평화주의에 관하여 도로시의 입장이 너무나 단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나누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수녀들에게 말했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때 우리는 매우 감정적이고, 격앙했었다. 우리는 수녀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도로시도 기대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때 도로시가 나타나 우리에게 가까이 와서 그 놀라운 딱딱하고도 따스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믿고 있는 내용에 대하여 매우 강력하게 느끼고 있네요.” 그리고나서 웃음지으며 그 상태로 우리를 떠났다.
도로시가 동감을 표현한 것은 그의 주장과 너무나 분명하게 대치되는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투쟁에 대해서였다. 심리학자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이런 동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다. 도로시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런 동감대는 우리가 무료급식을 하고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고약한 성질에 대해 말할 때 들으면서 일어나는 바로 그것과 똑같은 것이다.
손님들은 악의와 원한 그리고 짜증에 가득차 있고, 그러면 당신은 다만 단순하게 “나는 당신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느끼고 있으며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이해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말을 걸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편안해지고 당신은 또 다른 일로 넘어 갈 수 있다. 일단 그들의 느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도로시가 우리에게 했던 일도 바로 그것이었다.
톰 코넬도 그 당시 뉴욕 일꾼의 집에서 있었던 느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때는 1969년이었고,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도로시의 방에 뛰어들어 온갖 상스러운 말을 다 써가며 떠들었다. 그 여자는 왜 이 전쟁을 중지시키지 못하는가? “당신은 사기꾼이다. 당신은 가짜야. 당신이 하는 일이란 엉터리 교황이나 보려고 돌아다니는 것 밖에 없어. 세계는 불타고 있는데 당신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잖아!” 일꾼 공동체의 매우 훌륭한 어떤 사람들은 진짜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교회권위에 대한 증오가 그들에게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증오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 도로시는 매우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심지어 미사에 대해서도 경멸했다. 도로시는 경악했다. 만일 그런 태도를 취하면, 당신은 어떤 고려의 절차도 없이 그냥 나가야 했다. 나는 도로시에게 물었다… 왜냐하면 과거 어느 때보다 훨씬 많은 어떤 광기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로시는 “아니, 아니, 아니, 아닙니다. 항상 이랬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생애 끝 무렵에 도로시는 그 때가 참으로 어려웠던 시기였다고 인정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들 중의 하나는 로저의 죽음이었다. 로저 라포르테는 가톨릭일꾼에 있었던 젊은 자원 봉사자였는데, 1965년 유엔 앞에서 분신했다. 나는 새벽 다섯 시 반에 기자들로부터 분신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아침 8시 반경 도로시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전화했던 것 같다. 도로시는 이미 소식을 듣고 있었다. 크리스는 방금 모든 기자들을 쫓아 보냈다. 집의 모든 사람들에게 만일 이 소식에 관하여 기자들과 이야기 한다면, 그건 도로시의 의사와 반대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꾼 집을 떠나야 한다는 내용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론에 무엇인가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시 30분경, 나는 기사를 작성했고 도로시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그 내용은 언론에 발표해도 되겠네요”라고 말했다. 기자들이 카메라와 기타 기구들을 가지고 왔다. 하루 종일 인터뷰가 계속되었다.
갑작스레 자살이나 분신을 하게 되는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도덕적 판단을 한다: “이것은 나쁜 일이다.” 우리의 독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더 젊고 더 불안정한 상태의 사람들, 아니면 그냥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도 더 이상 그런 일을 할 수 없도록 무엇을 말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로저 라포르테의 희생을 존중하는 길은 무엇인가? 매우 미묘한 상황이다. 나는 또한 가톨릭일꾼 운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이 걱정했다.
짐 윌슨도 그 비극의 날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 로저에게 일어났던 일은 우리들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일꾼 공동체의 아무도 로저 사건이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걱정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로저처럼 같은 일을 저지르고 또 비슷한 일들을 할까봐 근심하는 그런 불쾌한 모습들을 보이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다만 그런 비극적인 방식으로 친구를 잃었다는 기본 공감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로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또한 그가 겪었을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에 더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에 대해서도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도로시가 이런 측면들에 대해 걱정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걸 증명할 사실은 없다. 댄 베리건 신부가 와서 예식을 했다. 그리고 도로시가 말했으나, 그 내용을 글로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일은… 로저가 즉시 사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병원으로 실려가 있을 때, 뉴욕에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정전이 됐을 때는 그의 죽음이 매우 임박했던 때였다.
그 당시에 대하여 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밤새 자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들 몇몇 사람은 길을 걷고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길 가던 사람들이 차들이 잘 빠져 나가도록(정전상태에서)돕고 있는 등등. 모든 하부구조들이 정지된 상태였지만, 사람들은 일이 돌아가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매우 상징하는 바가 컸고 어떤 장엄함도 느껴졌다.
앤 퍼킨스는 로저가 죽은 후 토마스 머튼이 도로시에게 보낸 편지에 관해 기억하고 있다:
❧ 도로시는 토머스 머튼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토머스 머튼이 나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렇게 말해요, ‘내가 만일 당신이었으면 당신네 사람들이 이런 일을 저지르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도 도로시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말한 것처럼 들리는… 그러나 도로시는 토머스 머튼의 그런 지적이 전혀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톰 코넬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마무리 말을 한다:
❧ 그 사건은 1965년에 일어났다; 1968년도 쉽지는 않았다. 절망과 두려움이 어떤 결정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었다. 가톨릭일꾼 집이 폭탄에 날아가면? 나는 사람들의 격앙을 가라앉히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였다. 대안들을 제안하려고 노력했다. 단식과 기도, 화해의 식사, 정치범에 대한 작업, 베트남의 스님들을 닮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기, 그리고 대형 집회시위를 조성하기 등. 우리는 빠짐없이 이런 시위에 참석했다. 미국 주교들이 1983년 평화에 관한 사목서한을 발표했을 때, 나는 세 명의 평화주의 자문단에 한 명으로 참여했다. 나는 도로시가 그 서한에서 인정된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은 만일 우리가 1960년대에 한결같은 입장과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척 메타이는 시카고의 북쪽 교외에서 자랐고 1960년대에 반전운동을 하면서 도로시를 알게 되었다. 여기 십여년 동안 알게된 도로시의 느낌에 대해 척크가 분석한 것을 싣는다:
❧ 도로시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양성되었다. 그렇다, 1960년대는 다르지만, 60년대는 다른 어떤 때보다 가톨릭일꾼이 시작됐던 30년대와 공통점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두 시대에는 다른 변화들도 있다. 알다시피 태도의 변화, 생활방식의 변화가 있다. 도로시는 섹스, 약물, 록크엔롤 문화 때문에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가끔씩 도로시에게도, 60년대는 이상주의의 시기이며, 사회유동화의 시기였다고 본다.
가톨릭 일꾼과 같은 곳에서, 60년대는 종교적 투신과 이상주의의 시기로 정의 되었으며, 많은 경우에 희생과 다른 이들의 안녕에 대한 우선적인 배려로서 이 같은 투신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가능성과 개인적 책임감에 대한 의식으로 이루어졌다. 도로시는 보수적인 가정교육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고, 한편으론 전통주의와 보수주의의 기이한 혼합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러한 혼합이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같은 세대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도로시는 전국의 많은 가톨릭일꾼들이 비폭력에 대한 결단을 철회하고, 베트남의 「전국 해방 전선」을 지지하거나 무력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믿는 것을 보고 매우 우려했다. 그는 여러 일꾼공동체들을 방문하였고 이러한 경향에 관하여 일종의 비공식 사목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경향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알고 있었다. 도로시는 분명히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절망, 분노, 긴박감, 변화에 대한 긴급한 요구들에서 이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고 다년간의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런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다.
나는 또한 일꾼공동체의 여러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개인행동에 관하여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우려를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도로시가 60년대에 대하여 편안치 못했고, 그의 관점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방어적이고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고 말하는 것은, 그때의 정황을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도로시가 “이건 틀렸어요, 집에서 나가세요”라고 말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로시가 또한 사건들의 다른 차원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고 활력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도로시는 방관자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나이가 들어 젊은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 여성은 당신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당신의 동지이다. 그는 당신과 함께 일하는 동업자이며, 그가 전달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정신이다. 그리고 충실함이다. 도로시가 어떻게 우리를 지지해주었는가를 생각해 볼 때 떠오르는 말은 바로 충실함이었다.
짐 윌슨 역시 그러한 존경과 충성심을 느꼈다. 그는 징집카드를 처음으로 불태운 사람들 중의 하나였고, 1965년 11월 6일 유니온 광장에서 조직화 된 시위 때에 그렇게 했다.
❧ 그 시기 내내 신문의 머릿기사 제목들을 살펴보면, 일꾼운동에 참여하는 젊은 가톨릭인들의 존재는 꽤 무서웠다. 도로시는 이런 모습이 교회 안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편 도로시는 일꾼들의 모습에 재미있어 하기도 했다. 어떤 모순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런 모든 것들은 그가 오랫동안 가르쳐 왔던 메시지이며, 마침내 더 큰 청중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나는 세대들이 실제로 교차하는 것을 느꼈고, 도로시와 상호존경을 나누었다. 도로시는 이런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으며, 집안의 운명에 대해서가 아니라 시위와 항의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또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가 나머지 우리들처럼 함께 투쟁하고 있었으며,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의 올바른 다스림을 깨닫기 위하여 애썼다고 생각한다.
징집서를 불태우는 첫 번째 시위는 매우 잘 조직화된 노력이었으나, 나는 정치적인 계획과정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도로시와 다른 친구들이 그 자리에 있었고 군중은 “모스코바 마리아”와 “징집서가 아니라 너희들 자신이나 태우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징집서를 태우는 동안 그 불길이 군중들을 비추고 있었다. 군중 속의 어떤 이가 튀어나와 소화기를 뿜어댔다. 그 때 내가 첫 번째로 생각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이 들었겠지만– 소화기에 들어있는 휘발유에 미쳤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도로시는 연장자였고 강력한 지도자로서 나에게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나의 영성과 간디의 평화주의에 대한 믿음에 관해 쓴 글을 보았고 많이 지지해 주었다. 도로시는 징집서를 태우던 날 그렇게 말했고, 아무런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도로시가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짐 윌슨은 그 때 체포되지 않았으나, 후에 체포되었을 때에는 유일하게 징집서를 소지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재판정에 출두했고 “가톨릭일꾼의 전통”에 따라 도로시의 전적인 협력을 얻으며, 유죄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단지 3년의 집행유예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징집국은 그에게 소환장을 발부했고, 짐이 거부했을 때 이번에는 3년 징역형의 판결이 났다. 이것은 짐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가 감옥에 간지 얼마 안 되어 태어난 아들에게 매우 힘든 시간이 되었다. 일꾼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패트 머레이는 도로시가 감옥에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젊은이들(징집거부로)과 그들의 친지, 가족들에 대해 슬퍼했다고 말한다.
댄 쉐이는 그가 워싱톤에서 체포되었을 때 도로시가 보석금을 내 주었던 감명 깊은 이야기를 전한다.
❧ 열흘째 되던 날(감옥에서), 도로시가 밖에 와 있으며 누가 보석금 지불을 원하는지 묻는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환대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곳에 있는 노약자들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보석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고, 도로시가 보석금을 지불했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 도로시는 나를 껴안고 키스 해주었다. 도로시로부터 키스를 받다니! 그리고나서 그는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당신은 좀 더 오래 있을 수도 있었는데요!”
빌 그리핀은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캐나다로 피신했다가 일꾼으로 왔고, 대신 주립병원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그는 일꾼에 신문편집인으로 참여하고 있다.
❧ 나는 손자가 베트남에서 안전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돌아온 후 도로시가 신문에 썼던 글을 기억한다(그렇지만 후에 손자는 고엽증에 걸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도로시는 한편으로 손자의 안전에 대해 감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공포스럽고 사악한 전쟁에 대해 썼다. 이처럼 도로시도 미국사회의 한 부분이었다. 미국을 사랑하지만 비판도 하는 것이다. 일꾼의 사람들은 전쟁에 저항했지만, 그들이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만큼 폭력적이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60년대의 가톨릭일꾼 운동은 조국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