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도로시의 위대한 피정, "이탈(離脫)은 하느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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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도로시의 위대한 피정, "이탈(離脫)은 하느님의 선물"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09.2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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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워싱톤의 고 리챠드 맥쏠리 신부는 도로시가 성녀 소화 데레사와 그의 작은 길에 대해 깊은 사랑을 지녔다고 회상했다:

❧ 나는 도로시가 성인들의 삶에 관해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글을 쓸 때 인용하는 것을 보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성인들을 충실하게 따랐고 항상 그들에게서 새로운 것을 기꺼이 배울 자세가 되어 있었다. 도로시는 처음에 소화 데레사를 알지 못했고 더군다나 기도를 많이 했던 관상 수도회 수녀였다는 것을 알고 실망했다.

그러나 도로시는 소화 데레사를 깊게 바라보았고, 그럴수록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점을 발견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진보적인 내 친구들 가운데 어느 누가 아기예수의 데레사 수녀가 매일같이 살았던 그런 똑같은 삶을 하루라도 살 수 있을 까 알 수 없네요.” 그리고 그 때에 도로시는 진보주의자의 관점으로부터 소화 데레사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도로시의 유명한 자서전, <긴 외로움>은, 회심이야기에 관한 고전서가 되었다. 가톨릭 일꾼에 합류한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도로시의 두 번째 회심이라고 하는 사건에 관하여 말한다. 이 두 번째의 회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인은 죤 휴고 신부의 영향이었고 도로시는 이를 “위대한 피정”이라고 불렀다.

도로시의 영성을 심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던 피정들은 이나시오 방식의 영적 연습에 느슨한 바탕을 두고 예수회 신부인 오네시무스 라꾸튀르(몬트레올)가 발전시킨 것이었다. 도로시는 처음에 친구인 피터 클라버 수녀에게서 피정노트를 받았는데, 클라버 수녀는 <가톨릭일꾼> 신문 창간호에 1달러를 기부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피터 수녀의 제안에 따라, 도로시는 1944년 휴고 신부와 함께 펜실베니아의 오크몬트에서 피정을 했고 “황홀해 하며, 기쁨으로 가득 차” 돌아왔다고 피터 수녀가 전한다. 그 후로, 도로시는 이 피정을 자주했고 가톨릭 일꾼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도 피정을 하도록 격려했다. 휴고 신부는 피정에 관한 많은 논쟁을 견뎠고 후에 수년 동안 피정에 합류했다.

가톨릭일꾼 가족의 한 구성원은 피정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휴고 신부님은 사례에 관하여 말하곤 했다. 사례들(모범적인 예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완전히 합법적인 경우들로서 우리는 아무런 착오없이 그 예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추락한 본성을 고려할 때,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런 사례들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다. 위로 가지 않는 모든 걸음들은 밑으로 내려가는 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사람이었던 도로시, 피터 모린의 이탈(離脫)을 모방하고자 했던 도로시에게 모든 것을 다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영성인 이탈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졌다. 도로시는 오페라를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을 무거운 책임의 삶 속에서 취하는 휴식이며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하는 은총의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욕설을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보복하는 말로 응답하지 않는 일은 도로시에게 매우 심각한 속죄의 행위였음에 틀림없다.

에이드 베썬은 피정에 관해 더 실용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로시는 피정에 가기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주로 주중의 피정동안 평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며 피정 때 읽고,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비 이건 신부는 미네아폴리스의 신부로서 신학생 때 가톨릭일꾼에서 살았으며 이후 편지와 방문으로 도로시와 내내 연결을 하며 지냈다:

❧ 피터 클라버 수녀가 처음 나에게 피정기록을 주었다. 나도 그 후 수차례 피정을 하였고, 도로시처럼 피정은 나의 삶에 큰 기쁨이 되었다. 피정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말타기나 하고 지냈을 것이다. 아니면 사제직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일꾼에서 피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피정은 논쟁꺼리였고 사람들은 매우 강한 반감을 가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도로시가 “위대한 피정”이라고 말했던 피정을 했고 “피정가족”에 속하였다. 피정을 한 사람들은 큰 가톨릭 일꾼 공동체 안에서 또다른 가족이 되었다.

그런데 이 피정은 하루 밤에 해치우는 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8일 동안의 침묵 피정이었다. 해방과 자유의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꽉 채우는 피정이었다. 사회문제에 관한 해방적 시각이라기보다, 개인의 기도생활과 참회 생활 그리고 교회에 대한 섬김 같은 개인 문제들을 다루는 피정이었다.

알려졌듯이, 도로시는 실제로 두 번의 회심을 거쳤다. 두 번째 회심은 피정을 한 후 일어났는데, 그의 외적인 생활에 내적인 생활을 첨가시켜준 회심이었다. 도로시는 1933년 이후로 첫 번째 회심기에 있었고 이때는 가톨릭 일꾼 운동이 시작되고 피정을 하기 전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주로 외적인 생활로 애덕을 실천했다. 피정 후에도 도로시는 외적인 애덕 활동을 계속했으며, 그것을 줄이지도 않았고 혼자 있거나 집에서 떨어져 살지 않았다. 그러나 도로시는 매일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했다. 그는 미사에 가고, 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참으로 전통적인 종교체험에 매달렸다.

사우스 벤드 가톨릭일꾼 공동체의 쥴리안 플레잔츠는 1941년에 피정을 했다:

❧ 도로시는 가톨릭일꾼 사람들이 피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피정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삶을 중도에 단념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피정을 가지 않는다면 일꾼에서 쫓겨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피정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 아이구! 나는 병원에서 방금 퇴원했지만, 우리는 펜실비니아 오크몬트의 작은 피정 집으로 차를 얻어 타며 갔다. 우리는 8일간의 봉쇄 피정을 했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피정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묵상의 필요성이었다. 우리는 매일 미사에 갔으나 집에 할 일이 그렇게나 많은데 묵상을 한다는 것이 황당한 일로 보였다. 휴고 신부님은 묵상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나를 설득했고, 나도 그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묵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매우 추상적이거나 영적인 어떤 것에 대해 관상하는 보통 의미의 묵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주 나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에 불과했다. 즉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예수님은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나 같은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셨을까?” 등등.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휴고 신부님은 좋아하는 것들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들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휴고 신부님의 의견이 도로시의 태도와 같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도로시는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도로시는 좋아하는 것들을 넘겨주고자 했다–이것은 전혀 다른 접근방식이었다. 도로시는 그의 문학, 좋은 음악을 사랑했고 그것들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고 느낀 적이 결코 없었다. 나는 도로시가 피정에서 깨달은 것이 단지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피정으로부터 자신에게 적절한 것을 받아들였으며 다른 사람들도 그들 자신에게 적절한 것을 취하도록 원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피정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휴고 신부님은 그런 사람들의 영적 안내자가 되었고, 그들은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신부님을 맹목적으로 따랐다. 나는 도로시가 피정을 한 어느 여인에 관해 쓴 편지를 기억한다. 도로시는 그 여인이 순종의 가치에 관하여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나에게 그 문제에 관해서 신문에 글을 쓰도록 요청했다.

도로시와 빌 고샤트는 클리브랜드에 가톨릭 일꾼 집을 운영했고 피정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들이었다. 갑작스레 죽기 얼마 전에, 도로시 고샤트는 피정에 관한 기억들을 나에게 말했다:

❧ 피정은 십자가의 성 요한에 관하여 진행되었고, 성 요한은 대단한 남자였다. 그 때 도로시는 아주 심한 골초였다. 경제 대 공황시기 때 많은 사람들처럼, 도로시는 잎담배를 말아 피우곤 했다. 그러나 도로시는 휴고 신부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모든 개념과 모든 이상에 완전히 승복했다. 그리고 그 때 바로 그곳에서, 갑자기, 담배를 끊어버렸다. 담배는 너무나 바쁘고 부담이 큰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위안들 중의 하나였는데 말이다. 그러나 도로시는 단지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것이야! 이건 내가 포기할 수 있어, 난 너무나 집착했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 피정에서 … 우리는 식당에 모여 있었고, 그 집 수녀들이 매우 훌륭한 식사를 차려 놓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식탁에 앉아서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휴고 신부님이 식탁에서 말하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 “자 여러분!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맛있는 스테이크를 여러분 앞에 차려 놓으면,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맙다고 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 매일 스테이크를 먹고 온갖 사치와 좋은 것들을 누리게 된다면 그건 소비에 미친 것이고 잘못하는 것이지요.” 그 때 도로시가 나에게 남겨준 메모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우리는 누구에게 줄때와 마찬가지로 겸손하게 받아야 해요.”

미네소타에서 온 베티 도일은 피정의 매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려고 애쓴다:

❧ 도로시는 참으로 휴고 신부님의 사상 전체를 받아들이려고 무척 애썼으나, 나는 신부님의 태도 자체가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냉정하고 충분히 인간적이지 않다고 여겼다. 나는 그렇게 따뜻한 도로시가 어떻게 신부님의 사상에 호감을 가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도로시는 신부님을 잘 알았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가톨릭일꾼 사람들 사이에는 이 모든 것에 관하여 많은 불일치와 마찰이 있었다. 나는 그때 우리들이 사용했던 단어를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다. 아, 그렇다! 이탈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했다. 사람들은 초연했다. 휴고 신부님은 엄청난 이탈자였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세상에서 이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다 버리고 그렇게나 엄격하고 메마른 삶을 살아야 하다니. 그러나 나는 도로시가 너무나 많은 것을 … 항상 너무나 많은 필요와 가난을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치스럽게 사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은 초기의 모습이었다. 세월이 흐른 후 매리 하우스에 살게 된 후로, 도로시는 훨씬 더 편안한 사람이 되었다. 옆으로 다가 가기에 편한 모습이 된 것이다.

피정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 친구가 나에게 지적한 것처럼, 피정은 정확하고 꼼꼼한 사람들에게나 늑장부리는 사람들 모두에게 재앙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에게 피정은 초기의 행복한 도취시기가 사라졌을 때 굳건하게 견딜 수 있는 영적 갑옷을 마련해 주었다. 휴고 신부는 도로시가 일생 동안 찾고 있었던 바로 그 유형의 사람이었다.

나는 도로시가 부분적으로는 자신이 지니고 살 수 있는 정체성을 찾기 위하여, 또한 군중과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을 태생의 느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가톨릭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피터 모린을 만나고 일꾼 운동을 창설하면서 도로시는 그런 정체성을 형성시켰지만, 그것은 기쁨으로 혹은 신앙과 의로움의 확신을 갖고 한 것이 아니었다. 좋게 봐서, 도로시는 길고도 생산적인 삶을 계속 수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피정은 그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해 주었고, 그가 깊이 사랑했으나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묵과할 수 없었던 그리스도교와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영적 실천을 마련해 주었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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