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중심의 일사분란한 유다이즘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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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중심의 일사분란한 유다이즘은 없었다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6.06.1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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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이즘에 대한 오해와 사실 - 2
ⓒ한상봉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직접적인 배경을 이루는 제2성전 유다이즘에 대하여 어떤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이 시기 유다이즘의 제도들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것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사제직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당시의 유다이즘을 성전과 대사제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체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피라미드 모양의 조직 안에서 성전의 대사제가 그 정점에 위치하고, 그를 중심으로 통일된 종교 사상과 제도를 가진 획일적인 유다이즘을 상정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제2성전 시대에 하나의 “규범적 유다이즘”을 말할 수 없다. 규범적이고 획일적인 단 하나의 일사불란한 유다이즘이라는 것은 당시의 사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의 산물일 뿐이다. 이 시기의 유다이즘 안에는 다양한 종교적 그룹들과 사상적 경향들, 제의적 실천들이 존재했었다. 특히 히브리 성경 곧 구약 성경과 관련하여 그것의 정경 목록이 정해진 것은 기원후 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이다. 제2성전 시대에는 정경이니 외경 혹은 위경 등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의 유다인들을 아무런 창조성을 가지지 못한 채 단지 과거의 전통만을 고수하는 사람들로 여겨서도 안 된다. 그들을 엄격한 율법주의의 굴레에 사로잡혀 살았던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물론 당시의 유다인들은 과거의 전통에 충실하려 하였으나 동시에 새로운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이라는 긴장과 도전 안에서 전통에 대한 역동적인 해석을 통한 응전을 시도하였다.

더욱이 당시의 유다이즘 안의 다양한 현상을 정통과 이단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곧 예루살렘의 성전과 그 대사제는 정통이고, 성전과 그 사제직에 비판적인 그룹이나 개인을 이단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해서도 안 된다. 사실 정통과 이단이라는 개념은 훨씬 후대에, 곧 기원후 4세기경에 그리스도교적 논쟁 안에서 등장하게 된다. 후대의 상황과 개념으로 그 이전의 역사적 사실을 규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흔히들 제2성전 유다이즘 안에는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 젤롯파 등의 네 종교적 당파가 존재했다고들 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요세푸스의 역사 서술에 근거 한다. 이 기술도 마찬가지로 경향성을 가진 도식적인 서술이다. 우선 우리는 종교적 당파 혹은 종파(sect)라는 표현에 동의할 수 없다. 종파라는 말마디는 사회학적으로 “다수의 강력한 그룹에 적대적이며 그로부터 박해를 받는 소수의 특별한 그룹”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한 그룹들은 종파에 해당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에세네파에게서 종파적 경향을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제2성전 유다이즘에 네 개의 종교적 당파가 존재했다 해서 당시 대부분의 종교적 유다인들을 이 네 그룹들 중의 어느 하나에 소속되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다수의 유다인들은 이 네 그룹에 소속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바리사이파가 유다인들 안에서 다수파인 듯이 상정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유다이즘과 헬레니즘 사이의 관계에서도 여러 가지 잘못된 선입견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당시의 유다이즘을 둘로 나누어 헬레니즘적 유다이즘(Hellenistic Judaism)과 팔레스타인 유다이즘(Palestinian Judaism)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사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 이후 팔레스티나는 헬레니즘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된다. 곧 팔레스티나는 주변의 다른 세계와 동떨어진 외딴 섬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정치적 상황 안에서 주변 세계와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헬레니즘적 유다이즘의 범주에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을 포함시키고, 팔레스티나의 유다이즘을 그 헬레니즘의 영향으로부터, 혹은 그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분명한 오해이다.

그리고 헬레니즘적 유다이즘은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인 <70십인역>을 정경으로 삼고, 팔레스타인 유다이즘은 히브리 성경을 정경으로 삼았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헬레니즘이라는 도전은 팔레스티나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응전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곧 친 헬레니즘적 경향과 동시에 반 헬레니즘적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유다이즘을 굳이 분류하자면 팔레스타인 유다이즘과 디아스포라 유다이즘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제2성전 시대의 유다이즘에 대한 다양한 오해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오해를 넘어 역사적 사실에로 접근하려는 우리에게 비판적이고 방법론적인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사료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통해 기억이 전하는 사실에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송 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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