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와 빌라도, “로마에 평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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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와 빌라도, “로마에 평화는 없었다”
  • 송창현
  • 승인 2016.05.09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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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2] 예수 시대의 정치적 상황 - 1
ⓒ한상봉

역사의 예수는 기원후 1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 초반에 팔레스티나에서 공개적으로 활약하였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는 로마 제국이 통치하던 세계였다. 사실 로마 제국에 대한 이해 없이 예수와 그에 대한 역사 기록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로마 제국은 역사적 예수를 위한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예수가 공개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시기를 루카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 3,1-2)

루카는 예수 당시를 식민 지배의 상황으로 서술한다. 그것은 정복한 지역에 대한 복종, 평정, 착취를 목표로 하는 폭력 정치에 의해 유지되던 제국적 상황이었다. 여기서 언급되는 티베리우스 카이사르(Tiberius Caesar)는 기원후 14-37년에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였다.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Potius Pilatus)는 기원후 26-36년 동안 유다의 로마 총독이었다.

티베리우스, 본시오 빌라도와 예수의 관계는 로마 제국의 역사가인 타치투스(Tacitus, 기원후 56-118년경)의 기록에서도 언급된다. 그의 말년에 기록한 <연대기>는 기원후 16-66년의 로마 제국 역사를 서술한다. 그는 <연대기> 15권 44.2에서 기원후 64년에 발생한 로마의 화재를 묘사하면서 예수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기에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래서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하여 네로는 그들을 용의자로 만들어 매우 잔인하게 처벌하였다. 추행으로 인해 미움을 받은 이들을 군중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 때 행정관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했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다. 이 가증스러운 미신은 잠시 억눌려 있다가 악의 발생지인 유다 뿐 아니라 온갖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들이 모여들고 퍼져 나가는 로마에도 다시 침범했다.”

이 문헌에서 타치투스는 빌라도를 부정확하게 행정관(Procurator)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실 빌라도는 총독(Praefectus)이었다. 1961년에 지중해변의 카이사리아에 있는 로마 시대의 반원형 야외극장에서 본시오 빌라도의 이름이 포함된 라틴어 명각이 발견되었다. 이 명각이 새겨진 돌은 극장의 좌석으로 들어가는 입구들 중의 하나에서 계단의 층계참으로 시용되었다. 그래서 발견될 당시 이미 돌의 왼쪽 부분이 심하게 깎인 상태였다. 이 명각에서 본시오 빌라도는 유다의 총독으로 표현된다. 카이사리아에서 발견된 이 명각은 예수 시대에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 본시오 빌라도의 존재를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그리고 타치투스는 <연대기> 15권 9-10에서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하에서 모든 것이 평온하였다.”라고 기록한다. 이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지배자들의 관점을 충실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실상 당시 세계 질서를 이루던 로마 제국의 평화(Pax Romana)는 폭력에 의해 유지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peacemaker)로 자처하였지만, 로마 제국이 주장하는 통치 질서의 실상은 결코 평화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았다.

제국 안에서는 억압과 착취에 고통 받던 민중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이를 탄압하는 폭력과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로마 제국의 평화는 억압과 착취 그리고 군사력에 의한 침묵의 강요와 다름없었다.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진 수많은 폭력사태는 로마 제국이 내세운 새로운 질서의 허상을 폭로한 것이었다.

기원후 1세기의 유다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그의 저서 <유다 고대사> 18권 85-87에서 티베리우스 황제와 빌라도 총독 당시의 사건을 전한다. “사마리아인들도 소란으로부터 예외는 아니었다. 거짓말을 가볍게 여기고 모든 계획에서 군중에 영합했던 어떤 사람이 사마리아인들을 모아 그들이 가장 거룩한 산으로 여기던 그리짐 산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이 도착하면 그곳에서 그는 모세가 숨겨둔 거룩한 그릇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럴듯하다고 믿은 이들은 무장을 하였다. 그들은 티라타나라는 마을에 모여 무리지어 그리짐 산으로 오르려하였다. 그러나 빌라도는 기병과 중무장한 보병으로 그들이 산으로 오르는 것을 가로 막았다. 사마리아인들은 일부 죽고 일부 도망쳤다.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혔는데, 빌라도는 중요한 지도자들과 도망친 이들 중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이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이와 같이 기원후 1세기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팔레스티나는 갈등의 세계였고, 민중의 다양한 저항 운동들이 발생하였다.


송 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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