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민란의 시대에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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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민란의 시대에 태어나다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6.05.17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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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시대의 정치적 상황 - 2 : 헤로데 가문의 통치

로마 황제는 지배 엘리트들과의 협력적인 관계 안에서 로마 제국을 통치하였다. 이것은 제국의 중앙에서뿐 아니라 여러 속국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제국에서는 도시에 기반을 둔 지배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그것을 통한 사회 통제가 이루어졌다. 지배 그룹의 활동과 통제는 도시와 촌락에 두루 미쳤다. 이 두 영역 모두 제국의 엘리트들에게는 그들의 사회-정치적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시키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로마 제국은 지배 엘리트가 지배하는 현 상황(status quo)을 유지하기 위하여 피보호자(client) 왕들을 협력자로 내세웠다. 곧 지배 엘리트들이 그들의 권력, 지위, 부를 안전하게 지키고 증진시키면서 민중을 통제하던 방식이 바로 후원자-피보호자의 관계(patron-client relation)였다. 이와 같이 로마 제국은 지배 엘리트 후원자와 종속적인 피보호자의 복잡한 체계로 이루어졌다. 지배 엘리트들은 지배자의 지위를 강화하고 일반 민중의 순종과 복종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이 후원자-피보호자의 종속적 관계를 확대시켰다.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팔레스티나에서 로마 제국 시대는 세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히르카누스 2세 치하의 속국 단계, 헤로데 가문의 통치 단계, 그리고 로마의 직접 통치 단계이다. 헤로데 대왕(Herod the Great, 기원전 37-4년)은 유다와 갈릴래아를 다스리던 로마 제국의 피보호자 왕(client king)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던 팔레스티나에서 로마 제국의 평화(Pax Romana)를 유지하는 책임을 가졌던 헤로데는 공포와 착취를 통한 통치에서 성공적이었다.

헤로데는 대대적인 토목 사업을 벌였다. 특히 이두매아인이었던 그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바빌론 유배 이후 약 5세기 동안 유다인들의 경신례의 중심이 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개조하는 작업을 기원전 20년에 시작하였다. 성전은 더욱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졌고 그 면적은 두 배로 확장되었다. 이 헤로데의 작업은 요세푸스의 문헌인 <유다 전쟁사> 5권 184-237과 <유다 고대사> 15권 380-425 뿐 아니라 랍비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헤로데의 대규모 토목 사업으로 인해 팔레스티나 민중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마태 2,1-12에 따르면, 헤로데 대왕 때에 예수가 유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다. 그 후 마태 2,16-18은 헤로데가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학살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루카, 2,1-20에 의하면, 아우구스투스 황제(Augustus, 기원전 27-기원후 14년) 때에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 등록을 위해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갔다. 거기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하였다.

기원전 4년에 헤로데 대왕이 죽은 이후, 그의 세 아들들인 아르켈라우스(Archelaus), 헤로데 안티파스(Herod Antipas), 필립포스(Philip)가 여러 지역을 나누어 다스렸다. 사실 헤로데 대왕은 자신의 장남인 아르켈라우스에게 왕국을 물려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헤로데의 요구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로마 황제는 아르켈라우스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 대왕 이후 세 아들에 의해 나라는 분할 통치되었다. 이것은 헤로데 가문이 얼마나 로마 제국에 종속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르켈라우스에게 유다, 이두매아, 사마리아를 다스리게 하고,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갈릴래아와 베로이아를, 필리포스에게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를 다스리게 하였다. 아르켈라우스는 혼란스러운 십년 동안의 통치(기원전 4년-기원후 6년) 이후 황제에 의해 쫓겨나 유배된다.

영화 <부활>의 한 장면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 갈릴래아의 영주는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였다. 그는 로마의 대행자(agent)로서 제국의 질서와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40년 이상 통치하였다. 기원전 4년에 에제키아스(Ezekias)의 아들 유다(Judas)는 세포리스의 궁전을 공격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유다는 사도 5,37의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라는 기록에서 소개된 인물이다. 시리아의 로마 총독 바루스(Varus)는 자신의 아들을 군대와 함께 갈릴래아로 보냈다. 바루스의 아들은 유다를 처벌하였고, 세포리스를 불태우고 그곳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었다.(<유다 고대사> 17권 289)

다른 지역에서도 유다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바루스가 직접 팔레스티나로 와서 진압하고 약 2000명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유다 고대사> 17권 295)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포리스 도시를 재건축하였으며 요새화하였다. 그는 세포리스를 갈릴래아의 수도로 삼았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아우토크라토리스(Autocratoris)라고도 불렀다.(<유다 고대사> 18권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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