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문답으로 충분치 않다" 역설적인 행복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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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으로 충분치 않다" 역설적인 행복선언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6.11.2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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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6: 산상설교

마태오 복음서를 처음 읽었던 독자들은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과 마찬가지로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에 대단한 주의를 기울였으나, 최초의 제자들과는 다르게 그들에게는 일상생활에서 제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가르쳐주시는 예수가 안 계셨다.

그래서 나중에 마태오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사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았는데 이것이 “산상 설교”이다. 복음서에서 이것은 하나의 긴 설교 같으나, 사실은 예수님이 공생활 중에 여러번 하신 말씀을 요약한 것이다.

예수는 새로운 모세: 산상설교는 새로운 삶의 방식 

마태오가 이 자료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놓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주님의 많은 가르침을 한데 모아 다루기 쉽게 하려고 했던 그의 문학적인 관심때문이다.

두 번째는 예수를 새로운 모세로 표현하려는 신학적 관심이다. 루가의 복음서에도 예수께서 광야에서 하신 연설(루가 6,20-49)에 같은 내용들이 있다. 마태오의 유대인 공동체에게,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율법이자,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인에게 율법을 가져온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산 위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선포하시는 예수를 보여준다.

진복팔단 : 행복의 새로운 기준

담화는 십계명이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에 기본인 진복팔단으로 시작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 것이다. (마태오 5,3-10)

진복팔단을 자세히 보면 아주 역설적인 “계명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는다. 이 설교는 하느님 나라에서 살고있다면 그들의 삶이 어떨지 말한다: 그들은 영이 가난할 것이고,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위해 일하는 온유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들은 또한 옳은 일에 굶주릴 것이고 그것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슬퍼할 것이다.

아주 행복한 예측은 아니다! 그러나 진복팔단은 제자됨이 행복한 삶이라고 한다. 왜? 제자들이 하느님과 또 이웃들과 서로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살 때에 그들은 위로를 받고, 굶주림이 채워 질 것이며, 자비를 받을 것이고, 그들은 하느님을 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울 것이고,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 살 것이며 세상이 모두 그들의 것이다!

“Sermon on the Mount,” Cosimo Roselli, 1481

계명을 넘어서는 계명: 율법에서 생명으로

행복선언(진복팔단)은 초기 이스라엘에서 십계명이 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부모님께 영광을 드리고 살인, 거짓말, 도둑질, 혹은 시기하지 말고 남을 속이지 말라고 말한다. 진복팔단은 십계명이 전혀 법이 없는 상태를 뛰어넘은 것처럼 구약을 넘어서는 더 나은 자질들에 대해 말한다. 진복 팔단은 계시에 정말로 새로운 것, 즉, 단지 율법에 맹목적으로 복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나약함에 대한 인식, 자신을 비우는 것, 그리고 협력에 근거하는 생활방식을 보탠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덕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계명을 생각한다. 그들은 아직도 신약 성서적인 도덕이 아니라,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도덕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것은 이 세상의 제도 안에서 사는 옛 방식에서 나와 훨씬 더 큰 진리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실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신앙의 초기단계에서 좀 더 성숙한 수준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는 회원의 위치에서 제자됨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율법을 주시는 분이라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것에 관한 이 산상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과거에 어떻게 행동하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나는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앞으로 더 나아가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내가 있는 곳에 합류하라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인하지 말라고 들었습니다: 쓸데없이 화를 내지 마십시오. 약속을 어기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정직해야 하며 맹세하지 마시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마태오 5,17-48)

무엇보다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분을 따라 하느님과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자고 초대하신다. 그분은 당신처럼 그들도 하느님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라고 초대하신다.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의 기도

그 분은 충만한 하느님 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지배를 포기할 만큼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이 매일 매일 주시는 것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똑 같은 방법으로 용서받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알려진 대로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의 기도이기도 하다. 이 기도는 모든 제자들이 열망하고 목표로 하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마태오 6,7-13 참조). 게다가 제자들이 공동체에 살고 있다는 가정 하에 기도문은 복수로 표현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속 깊이 갖고 있는 소망이 축복 받았으므로 그들의 삶은 행복하고 자유롭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소망으로부터 자유롭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돈, 먹을 것, 옷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며,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신다.

산상설교, 도덕적 문화적 전향 "좁은 문으로!"

아주 매력적이기는 하나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개종, 사고방식, 느끼는 것, 행동하는 것을 완전히 바꾸어야 가능하다. 그것은 도덕적, 문화적인 전향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쉬운 길을 택하고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좁은 문을 통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찿아드는 사람이 적다."(마태오 7,13-14)

그러나 좁은 문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혼자서 하느님나라에 산다는 뜻은 아니다. 마태오 생각으로는 교회는 예수님을 그들의 주님과 스승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함께 예수께 배우고 그것을 실제 실천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나라와 교회가 같은 것은 아니다. 교회에는 아직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교회에 속하지는 않으나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

이러한 사실의 좋은 예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12년이라는 종교 교육을 받았으나 예수님을 그들의 개인적인 주님으로 받아들이며 그분께 결코 승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하시는 말씀을 주일미사에서 듣는 많은 말들 중에 하나로만 받아들여 결코 그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 말씀이 그들에게 어떤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그들은 그 말씀을 마치도 멀리서, 추상적으로 우주를 다스리는 삼위의 하나이신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하느님나라 사람들은 예수를 그들 삶의 주님이며, 이 세상의 모든 제도, 조직, 나라와 문화(미국과 가톨릭 교회도 포함)를 다스리는 주님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복음서들은 분명히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있는, 수많은 비(非) 가톨릭인들이 있다. 다시말해 주님이 여러분 삶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가족이 첫째가 될 수 없다. 직업이 우선이 될 수 없고 돈이 첫째가 될 수 없다. 군대도 첫째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주님이십니다”라고 그저 사도신경이나 교리문답을 하듯이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입으로만 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듯 해야한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오 7,21)

중요한 것은 예수께 귀 기울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분의 개인적인 제자가 되는 것이다. 제자라는 말의 본뜻은 “학생”, “배우는 사람”이었다. 중요한 것은 성서를 통해서, 또는 기도 중에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항상 하느님의 뜻이다.

비록 교회에 속해 있지는 않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거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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