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목적 아니다 …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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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목적 아니다 … 수단이다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6.12.21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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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8: 하느님 나라와 교회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하려는 이 마음의 준비를 마태오는 16장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는 다시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 이번에는 필립비의 가이사리아 근처에 계신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그를 누구라고 생각 하느냐고 물으신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옛날 예언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제자들이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아 서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신다(마태오 16,15).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자신들에게 물어봐야 할 기본적인 질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바닥에 닿는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는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없다. 만일 여러분이 이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정말로 하고 정면으로 이 문제를 대면한다면 그 대답이 책에서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여러분의 가슴에서 나와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경험에서 나온 대답이어야 한다. 그것이 정말로 진실이려면 여러분 자신의 삶에서 나와야 한다.

"나는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지?"

모든 제자 중에 그날 새벽 호수에서 참으로 믿음의 교훈을 배운 사람은 베드로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 전에 베드로가 말한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16,16). 그는 예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은 아들이시라는 것을 즉시 고백한다. 예수께서 이스라엘인 모두가 기다리던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라고 말한다. 그러면 베드로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마음 속에서 추론한 것이 아니었다. 그 대답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온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마태오 16,17-18)

시몬의 별명은 그리스어로 “바위” 인데,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원래의 철자법 "peter"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기서 베드로에게 그의 이름처럼 견고하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질문에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대답을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질문을 우리 모두에게 하신다.

베드로는 진정한 제자, 참으로 배우는 사람의 근본적인 신뢰에 도달한 것이다. 신뢰, 혹은 신앙은 모든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관계의 근간이다. 만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께 대한 신뢰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앙이라는 깊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교회를 세우는 작업은 계속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계속 말씀하신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오 16,18-19)

사진=한상봉

교회 건설의 기반: 예수에게 배우려는 굳은 믿음 

예수께서는 그런 믿음 위에 당신이 공동체를 세우시겠다고 말하신다. 그런 기반 위에 그분은 당신의 교회를 세울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이런 깊은 차원의 신뢰를 서로에게 갖고 있다면 그리고 예수를 자기들의 주님으로 믿는다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온 믿음의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예수님으로부터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기 시작한다.

비록 교회의 토대가 바위같이 견고해도 교회 자체는 확장되고 자라난다는 것을 주목하라. 예수께서는 교회를 그 어느것도 이길 수 없는 움직임, 역동적인 힘이라고 말씀하신다. 교회가 어디에서 저항을 받든지, 그것이 경직된 마음이거나, 사탄의 반대이든간에, 움직임은 정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어떤 저항이라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사그러 들지 않는 믿음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열쇠들을, 즉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교회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열린 문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사람의 가슴에 전해지고 모든 인간 사회에 선포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의 사명은 예수의 사명과 같다: 하느님 나라가 여기 있고, 이미 부분적으로 그것이 도달했다는 것, 그것에 마음의 문을 열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퍼져나가고 있는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주님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리는 것 역시 교회의 사명이다.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 세워 지는 것은 예수의 제자 공동체가 되는 것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그분에게서 배울 정도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써 가능하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수단...목적으로 삼으면 안돼

하느님 나라가 온전하게 세워지는 것이 교회의 목표이다. 교회는 단지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사랑스럽고 충실하신 하느님과의 철저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거기로부터 모든 것, 즉 우리가 서로 맺고 있는 사랑과 신뢰의 근본적인 관계가 따라온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주권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온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우리는 너무도 자주, 교회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것처럼 행동해왔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와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대신 교회에 대해 설교해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설교하실 때 지체하시지 않았다. 그 분은 이스라엘을 사랑 하셨고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시기 위한 하느님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보셨다. 그래서 그분은 이스라엘이나 유대교와 싸우지 않고, 꾸준히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고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에 그들을 다시 부르셨다.

우리는 교회와 가톨릭교에 대해서 똑같은 태도를 취해야한다. 우리는 진정한 예수의 제자라면, 교회를 선포하거나 가톨릭교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예수에 관한 전체적인 관점을 놓치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하느님 나라를 번성시키는 대신 그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나쁜 소식 같은 종교적인 일과 제도적인 장벽 뒤에 하느님의 통치라는 좋은 소식을 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 계명을 깨뜨리고 교회를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뚫고 들어온다는 마태오의 이러한 관점은 이 시점으로부터 더 풍요롭고 더 넓어져간다. 17장에서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시어 그분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보여 주었다. 18장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용서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21장에서는 예수께서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그분을 메시아라고 선포한다.

예수의 길은 동트기 전처럼 어둡다

그러나 예수가 체포되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보았듯이 무대는 어두워진다. 예수께서 초기에 말씀 하셨듯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험하고 그리로 가는 문은 좁다. 자신을 주는 사랑은 종종 고통스러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길은 항상 쉽지 않다. 낮은 동트기 직전같이 아주 어두울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예수가 이미 말씀하신대로 새벽은 부활날에 반드시 도달한다. 그래서 그분은 충만한 영광, 아버지 하느님의 충만한 나라로 들어간다.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장인 28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다. 이제 그들은 그분의 교회이고 그분은 이제 그들의 주님이시다. 그분은 그들에게 그들의 목적을 상기시키시는데, 그것은 교회의 사명을 통해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개방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28,18-20)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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