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는 기록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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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는 기록물이 아니다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6.10.2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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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1: 복음서들의 의미

신약성서는 27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고 중심적인 4가지 문학 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음서, 사도행전, 서간, 묵시록이다. 그러나 이 책들의 현재 모습이 원래의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또 원래 짜여진 순서대로 기술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는 대체로 공관 복음(그리스어로 “한가지 견해”라는 뜻인데, 그것들이 쓰여진 방식에 있어 단일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과 요한 복음서(다른 세 복음서와 매우 다른 관점에서 쓰여진)로 되어있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공생활을 거쳐 초기 사도들의 행적을 복음서 형식으로 다루고 있으며, 서간문들은 좀 긴 신학적 성찰에서부터 짧은 실질적인 편지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 혹은 계시록은 매우 예언적인 문체로 쓰여졌으며 구약성서의 표현을 빌려 썼다.

사진출처=desiringgod.org

복음서는 예수의 역사가 아니라
예수의 정체성을 다룬 문서다 

신약성서에 있는 네 복음서는 독특하다. 이 세상에 있는 종교서나 세속적인 문학 중에 성서와 같은 책은 하나도 없다. 신약성서는 어떤 의미에서 사건의 세세한 내용보다 그 의미를 더 중요시했던 구약성서의 영웅들의 이야기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예수님이 누구였는지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가 누구인지를 말하려고 했다는 점이 다르다.

복음서는 믿는이들이 다른 믿는이들을 위해 기록한 살아 계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증언이다. 예를들면, 복음서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이들을 납득시키려는 -비록 후에는 그런 목적에 사용되긴 했으나-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들 복음서들은 믿는 이들이 자기들이 믿고 있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더 충만하게 설명하기 위한 시도였다.

우리는 현대적인 연구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글로 쓰여지기 훨씬 전부터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내려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라고 인정한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팔레스티나에서 사신 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구성이나 편집이 되어 있지 않았다. 비록 복음서에 그들의 이름이 나와 있지만 학자들도 신약성서에 나와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정말 복음서를 썼는지에 대해서는 확답을 하지 못한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 그들이 썼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고대시대의 저작자라는 개념은 지금같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네 권의 책은 예수님을 알았거나 예수님을 알았던 사람을 안 사람들의 증언에 그 권위를 두고 있다고 거의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실제로 쓴 사람이 누구든지간에 한가지 점은 매우 분명하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자서전이나 어떤 종류의 역사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서들은 현대 역사나 신문잡지의 기준에 맞게 사소한 것까지 정확하게 기술되지 않았다. 성서가 현대 문학적 진리의 개념에 맞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성서문학가나 근본주의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의 잘못은 고대문학을 현대 사실주의 잣대로 측정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고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것은 보이고, 들리는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정말로 실제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 성령의 힘, 혹은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일 수 있었다. 그래서 고대 작가들은 독자들에게 그러한 경험을 일깨워 주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꾸몄다. 마찬가지로 옛날 사람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주 우리를 사로잡곤 하는 세부적인 것들이 아니고 이런 세부적인 것들 속에서 빛나는 종교적인 의미였다. 이런점을 염두에 두고 성서저자들은 자료로부터 알아낸 것들을 자신들의 목적이나 혹은 그들을 따르는 특정한 청중들의 필요에 맞추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복음서는 '표절'이기보다 신앙공동체의 공동유산이었다 

몇몇 복음사가들은 그들 이전에 쓰여진 “복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서에는 비슷한 내용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누군가가 다른이의 것을 빌려 온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것을 표절이라고 하지만 그당시 저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지닌 공동의 유산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서로 이야기를 빌어와서 그들은 자기가 강조하는 것에 맞추기 위해 세부 내용을 가끔 바꾸기도 했고 이렇게 하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네 복음서 모두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네 복음서가 각각 약간 다르게 말한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 중 누구도 세부 사항을 다르게 배치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네 복음서를 비교하고, 어느 저자가 옳고 그른지를 묻는 것은 복음사가들 보다 우리가 진실을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복음서들의 아름다움, 모든 성서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 대한 경외심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읽으면 성서는 문학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교육을 받지 못하고 아주 단순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영보(예수 수태)이야기를 읽을 수 있고 정말 천사가 젊은 처녀에게 나타났다고 믿고 마리아가 기꺼이 주님의 뜻에 따르는 것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더 고상한 배경을 가진 사람은 똑같은 이야기를 읽을 때 마리아가 천사를 그녀의 삶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명상했을 때 그녀에게 온 말씀이 천사로 상징된다고 생각하며, 주님을 섬기려고 끊임없이 준비하고 있는 마리아에게 놀란다. 우리는 위의 두 개의 견해 중 어느것이 더 정확한지 모른다; 또 알 필요도 없다. 두가지 견해를 놓고 볼 때 종교적 의미는 결국 모두 같다는 것이 분명하다.

복음: 신앙의 도약 이후에 얻는 지혜 

마태오에 의한 복음서에는 복음사가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창(窓)역할을 하는 장면이 있다. 16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하였고 이를 듣고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행복하다.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한 사람으로 알았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서 그들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뛰어넘어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지에 달했다. 그때 그들이 본 것은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그것을 다른이들에게 들려주었을 때 그것은 단순하게 좋은 소식이라고 불리었다. 복음의 본래 단어는 글자 그대로 “좋은 소식”을 뜻한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정확히 말해 좋은 소식이다. 복음은 그당시에 영화용 카메라가 있었다해도 필름에 담아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복음은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공평하게 관측될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도약”이 있은 후에만 경험할 수 있는 지혜이다.

어떤 의미로 복음이란 한 그리스도인들의 세대의 믿음을 다음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될 수 없고 단지 이야기나 그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야기나 그림을 너무 지나치게 분석하는 것은 본질을 못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시키고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선물로서 받고 신앙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즉 경험되어질 수 있을 뿐이다.

복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은 관계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를 직접 보지 못했고 단지 성령 안에서 그분과 함께 걸어갔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구세주이시고 치유자이시며 죄를 사해주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복음서 이야기는 직접 예수님을 만났던 소경, 병든자, 절름발이들처럼 그들이 어떻게 믿음 안에서 그분에게 다가가 그분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지 그 본보기를 보여 준다.

이 다음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부활하신 주님과 “지체 안에서” 관계를, 즉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관계 맺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었다. 오랜 동안 예수의 말씀과 비유는 이런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으나 이제는 구전되던 전통이 문자화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지체 안에서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해 사는 것에 관한 좋은 소식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초기 그리스도교 문서들은 결코 기록물이 아니다. 이 문서들은 그당시 예수님의 삶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에 관한 것이다. 이 문서들은 믿음의 사람들을 위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쓴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사건들보다 현재의 사람과 현재 맺고있는 관계들을 묘사한다.

만일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 현존을 느끼지 못한다면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이 현재 우리의 상황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한다면 그 의미를 놓치는 것이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부활하신 주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 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 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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