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 값싼 은총 넘어서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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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값싼 은총 넘어서는 신앙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6.11.15 1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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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4: 사막에서의 유혹

복음서들은 혼합된 작품이다. 즉 복음서의 마지막 저자나 편집자들은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전해오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복음서를 구성했다는 말이다. 이런 구전 외에도, 격언 모음, 비유, 예수의 기적, 예수의 수난에 관한 소문을 내용으로 하는 기록이 점점 늘고 있었다. 복음사가들은 저마다 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에 예술적 기교를 가미하여 작품으로 완성했다.

마르코는 마치 조각보를 만들 듯이 한다. 그의 작은 각 부분은 “그리고” “그러나” 와 같은 단순한 접속사로 다음 내용에 연결된다. 요한의 복음서는 직조물과 유사하며 아마도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원본에 가깝다. 루가와 마태오는 하느님 나라와 같은 기본주제를 바탕으로, 수집한 것을 예술적으로 배합했다.

그러나 복음서는 수많은 이야기와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각각의 주제는 해석이나 설교의 주제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남는다. 그러한 풍요로운 가능성들 앞에서 우리는 이 장과 이어지는 다른 장들에서 몇가지 중요한 주제들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요르단강 세례터 인근의 광야. 사진=한상봉

사막에서의 유혹

각 복음서에서 예수의 공생활의 서막이 되는 사건은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일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성령을 받으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확인되었고, 그분은 하느님 나라를 알리라는 소명을 받아들이셨다. 예수께서 하느님께 “예”라고 말한 직후에 “사막에서의 유혹”이 따른다. 이는 정화의 시기로, 모든 사도들이 다 당면해야 할 유혹이다.

그것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우리와 닮았다. 아주 크고 멋진 것을 약속하고 나서 별안간 도대체 우리가 어디에 빠져 있는가를 깨닫고 놀란다! 예수가 받았던 유혹은 아버지가 그분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도와준다. 마찬가지로, 유혹은 우리가 그분 사명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첫 번째 유혹에서 악마는 예수 앞에 돌을 갖다 놓고 말하기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마태 4,2)라고 한다. 악마는 실제로, “당신의 인간적인 허기를 채우고 만족해 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아주 실제적인 유혹이다. 우리는 종종 세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 나면 행복해 질 것이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이 유혹에는 사회적인 면도 있다.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 딸이라고 부르는 우리가 세계의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볼 때, 그저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단지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것이라고 믿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의 양심과 비평가들은 사회 프로그램이 세계의 굶주린 사람을 먹여야한다고 하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구세주 같은 충동을 느낀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에게 빵을 주어야하나, 단지 “빵만으로는” 그들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마태 4,4).

예수님의 대답은 육체적인 배고픔의 현실이나 요구를 거부하시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그분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신 후에 허기를 느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육체적인 필요 차원을 넘어서, 구원에 대한 인간의 소망이 궁극적으로 만족되기 위해서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더 깊은 영적인 굶주림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먹을 것과 옷, 집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을지라도,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우리의 욕구를 충족 시켜 주지 못한다고 상기시키신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않다. 그것들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가슴속에서 해주시는 한마디 한마디의 사랑의 말씀이다. 우리는 빵과 사랑의 말로써 이웃의 삶에 의미를 준다.

다음에 사탄은 예수를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서 ‘뛰어내려 보시오 천사가 당신을 구하도록 해봅시다’ 라고 말했다. 여기서의 유혹은 예수나 우리에게 종교적인 구원 놀이를 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엉터리 종교적 진리, 값싼 은총, “편안한 의자에” 대한 유혹이다. 만일 우리가 이 유혹에 넘어간다면,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종교적인 재간이나 습관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가 주려는 전언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서의 말씀으로 대답하신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마태오 4,7). 하느님의 계획은 신앙의 부르심을 듣고 거기에 응답하는 인간의 참여가 있는 그런 계획이다. 그건 어떤 종류의 마술이 아니다. 아주 느리게 진행되며, 정말 진실하고 유일한 인간의 발전 단계이며, 우리를 완전히 구속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유일한 계획이다. 다른 변화들은 단지 외형적이고 기계적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다움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완전한 구원을 하시는 하느님의 길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예수께 세상의 왕국을 보여주면서, 만일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면 그것을 다 주겠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장면은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서 도망 나온 후에 사막에서 받은 유혹의 반복이다. 또다시 그들은 안전하게 살던 노예시대를 그리워하는 덫, 때때로 하느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두려움을 동반하는 자유를 포기하고 싶은 덫에 걸리곤 한다. 하느님의 나라 대신 세상의 제도와 장치에서 우리의 안전과 권위를 찾으려 할 때 우리는 똑 같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했던 잘못을 예수께서는 이제 올바로 하신다. 예수께서는 유혹하는 자에게 자기를 설득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마태오 4,10).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길로부터 벗어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사막에서도, 모든 익숙한 목표물들이 사라질 때에도, 그리고 돌아가라고 끊임없이 유혹을 받을 때에도 여전히 복종하실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새로운 모세이자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분은 야훼의 아들과 딸로 불린 이스라엘의 사명을 완성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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