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탄생이야기는 신학적 '설화'이다
상태바
예수탄생이야기는 신학적 '설화'이다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6.11.07 18:1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태오복음-3 :탄생설화

우리는 아직 마태오에 의한 복음서의 1, 2장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이 1. 2장도 예수에 대한 내용이지만, 이 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드라마의 일부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대신 이 부분은 마태오 복음서의 중요한 사건 전개에 일종의 서문격이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은 따로 다룰 필요가 있다. 루가 복음서에도 이와 비슷한 서문이 보인다.

예수 탄생이야기는 역사라기 보다 신학적...
부활이후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생각이 낳은 이야기
성서 근본주의는 미숙한 신앙 표현

우리는 이미 복음서들이 예수의 전기가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같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 쓴 신앙에 대한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의 예수탄생에 관한 설화는 이러한 특성이 더 분명하다. 이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마르코와 요한 복음서에는 없고, 사도행전(예를들면, 사도행전 2,22-36의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여지듯이 복음서의 초기 설교 어디에도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탄생이야기는 전기가 아니라 훨씬 더 신학에 가깝고, 역사라기 보다 매우 신화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창세기의 창조 신화와 비슷하다. 우주의 발생에 대한 과학적인 정보가 없을 때 사람들은 시간의 시작에 맞추어진 이야기를 가지고 종교적인 상상력으로 현재 모습의 세계가 있게된 경위를 묘사한다.

모든 종교 문화에서 이런 일은 아주 흔하게 일어났고 유대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예수탄생의 구체적인 전기에 관한 정보 없이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렇게 불러도 되는지 모르지만)은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발전시켰는데, 이는 부활 후의 예수에 대한 그들의 현재 생각을 표현한 것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종교적 진실을 이런 신화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다. 이런 문서들을 잘못 이해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문서가 쓰여진지 20세기가 지난 후에 우리 문화에 비추어 그 뜻을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들이다. 그 결과는 성서적인 근본주의로서, 이는 고대 문서를 현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읽는 잘못된 방식에 근거하여 성서를 미숙하게 자구적으로 해석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성서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성서를 변함 없는 말씀으로 이해하기 전에 먼저 옛날에 쓰여진 문서로서 자주 이해해야 한다.

Paintings of the Birth of Christ, Lorenzo Costa, Birth of Jesus, 1490

예수의 족보:  "메시아라면, 그분은 다윗 가문이어야"
예수의 직계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고 성령(?)

이러한 경우의 예는 마태오 복음서 1장에 나오는 예수의 가계이다. 자세히 보면, 그 가계는 예수의 선조를 인위적이고 상징적으로 추적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아브라함에서 예수 사이에는 복음서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세대가 있었을 것이다. 성서적으로 볼 때 여기에 언급돤 세대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세대들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분명히 신학적인 설명을 위해 실제로, 상당히 많은 세대들의 이름들을 정렬했던 것이다.

예를들면, 마태오는 예수의 가계를 다윗과 아브라함(마태오 1,1)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 이 두 사람인가? 만일 예수가 메시아라면, 그분은 다윗 가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정통적인 다윗 가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만일 예수가 메시아라면, 그분은 이스라엘인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 한다. 또한 예수는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진리의 사람이므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그의 선조이어야 한다.

마태오는 가계를 설명할 때 14세대를 한 묶음으로 하여 세 목록을 보여준다. 14(혹은 7의 곱)는 유대인들에게 완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수였다. 이처럼 목록들은 각각 14세대가 들어가도록 인위적으로 구성되었고, 이제 메시아가 오실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름들을 세어보면서, 마태오는 1장 17절에서 각 목록에 14개의 이름이 있다고 말하나 마지막 것에는 단지 13개의 이름만 있다. 왜? 그는 예수의 직계 아버지가 요셉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 자신이 14번째에 속하고 그분이 예수님의 직계 선조시라는 것이다. 마태오는 여기서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 즉 이름을 생략함으로써 그 사실을 말하고 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마태오는 같은 것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 이었다."(마태오 1,18)

종교적 상상력의 산물인 예수탄생 이야기 조연들...
-천사: 하느님 현존의 문학적 표현
-동방박사: 예수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세주

루가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난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말한다. 고대 문학에서 천사의 등장은 어떤 장소나 사건의 성스러움을 상징한다; 천사는 하느님의 현존과 권능을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나타낸다. 아마 마태오와 루가도 예수와 하느님의 가까운 관계를 상징하기 위하여 문학적인 양식으로서 천사를 도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예수탄생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 예수라는 인격에 관한 이야기이다.

The Flight into Egypt by Vittore CARPACCIO 1500,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몇 줄 뒤에 동방박사가 나오는데, 이들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성서학자들의 방법대로 자세히 읽어보면 이 이야기가 역사적인 성격보다 신학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예수가 태어날 때 그렇게 많은 재물이 성가정에 주어졌는데도 요셉이 왜 은퇴를 안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태오는 왜 1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발견한 이 이야기를 구성했거나 혹은 (더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의 복음서에 포함시켰나?

초기 그리스도인들(모두 유대인)이 당면했던, 곤란했던 문제 중의 하나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알게되고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했던 이방인의 나라에서 온 현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마태오는 교회 내에서 예수가 단지 유대인만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고조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해서 그는 먼저 일어난 사건을 통해 나중에 인식된 진실을 가르치고 있다: 즉 예수가 선택된 민족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구세주시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동방박사를 왕들이었으리라고 생각하나, 마태오는 세상의 지혜가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였다고 말하려는 듯이 그들을 천문학자나 과학자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현자들이 보통 세 명이라고 알고 있으나,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몇 명인지 확실히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세 가지 선물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래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사람이 선물 하나씩을 가져 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이야기가 후대로 가면서 계속 미화되었으므로, 우리는 종교적인 상상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약간의 통찰을 할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실제인가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는 상징으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영아 학살과 에집트 망명설: 예수는 새로운 모세

마태오 복음서의 탄생에 관한 설화에서 마지막 중요한 이야기는 성가족이 에집트로 도망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이 이야기가 현대적 의미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고 신학적 이야기라는 매우 강력한 단서를 발견한다. 지리적으로 네게브 사막은 현대식 찦차로도 건너기가 아주 어렵다. 아기를 데리고 남자와 여자가 걸어서 건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헤로데가 베들레헴에 있는 모든 신생아를 학살하였다는 것도 의심스럽다. 우리가 이렇게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헤로데를 아주 싫어해서 그의 모든 잘못을 파헤친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프스도 이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것이 신학적인 이야기인가? 그것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 연구를 해봐야 하지만, 마태오의 유대인 독자들에게는 그 의미가 분명했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새로운 모세로 이해했다 -사실 모세보다 훨씬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세는 파라오의 히브리 어린이 학살(출애굽기 1,15-2,9)에서 구해졌다. 이와 비슷하게 예수는 헤로데가 신생아를 학살할 때 구조되었다.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에집트를 탈출했다. 그래서, 헤로데 사망 이후 에집트로부터 나오게 묘사함으로써 마태오는 예수를 다른 모세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마태오는 출생 이야기 내내 그리고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덜 자주, “이는 예언자의 말씀을 완성하시는 것이다”란 구절을 쓰면서 구약성서를 인용한다. 마태오는 성서에 친숙한 유대인들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인용된 구절은 개종한 이방인들에게는 공감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개종한 이방인과 같다. 우리는 유대인으로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일이 예언을 완성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복음서가 말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언을 일종의 예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성서를 한번 잘 들여다보면, 현대적인 의미의 예언이 아주 적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성서는 어느 내용이나 다 예언적..예수는 예언을 완성하신 분

다시 한번 우리는 마태오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유대적인 관점에서 마태오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유대인에게 성서의 모든 책들은 어느것이나 하느님으로부터 온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히 진리를 말했다. 십계명을 예로 들어보자. 십계명 하나하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간주되었으며, 그래서 사람이 십계명에 복종했다면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완성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예언자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들은 회개하라고 하고, 멸망을 알렸고, 위로를 주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예언이란 단순히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 것을 뜻하므로 성서는 어느 내용이나 다 예언적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정서로 볼 때,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 계명, 잠언, 시편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마태오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수가 성서를 완성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마태오가 유대인(혹은 우리들)들에게 구약성서의 저자들이 메시아를 염두에 두고 그 내용을 썼다고 믿을 것을 기대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수차에 걸쳐 예수께서 메시아이고, 하느님의 완전한 아들이심으로 하시는 모든 일 속에서 그분은 성서를 완성하셨다고 말한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충현 2019-12-05 19:57:28
이 글을 보니 왜 일부 개신교에서 카톨릭을 이단이라고까지 하는지 알겠습니다.
성서에 거짓이 섞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셨다면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저는 카톨릭이 뭘 믿는지 참 모르겠습니다.
성서가 하나님이 주신 책이라면 거기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나는 나의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우리는 죽어서 같은 곳에서 만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