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내 손을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뻗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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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내 손을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뻗으라고"
  • 헨리 나웬
  • 승인 2019.08.0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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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마무리]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983년 가을 렘브란트의 그림 포스터를 처음 보았을 때, 나의 모든 관심은 돌아오는 아들을 꼭 끌어안고 있는 늙은 아버지의 손에 모아졌다. 나는 용서, 화해, 치유를 보았다. 또한 안전, 쉼, 집에 있음을 보았다. 생명을 주는 아버지와 아들의 포옹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내 안의 모든 것이 돌아온 아들이 받았던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를 염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만남이 나 자신의 돌아옴의 시작이 되었다.

라르슈 공동체는 점차 나의 집이 되었다. 온 생애동안 나는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손을 축복의 행위로 나에게 얹고 집을 주리라고 꿈도 꾼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나는 안전과 안정을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아왔고, 하느님 나라가 “철부지들”(마태11,25)에게 드러난다는 것도 거의 깨닫지 못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이들을 택하셨다”(1코린1,27)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겸손한 받아들임을 경험했을 때, 그리고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포옹을 경험했을 때, 나는 참다운 영적 귀향이란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속한 영이 가난한 이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임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하느님의 포옹은 정신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포옹 속에서 매우 실재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 그림을 보면서, 나는 우리 구원의 신비 속에 깊숙이 뿌리내린 연결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에 의한 축복과 가난한 이들에 의한 축복 사이의 연결이다. 라르슈에서 나는 이 축복이 참으로 하나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네덜란드의 대가는 나의 마음속 가장 깊은 염원과 나를 만나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 공동체에서 이 염원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도록 이끌었다.

라르슈, 그들의 장애는 나의 장애를 벗겨놓는다

트로슬리에서 렘브란트의 포스터를 처음 본 지 6년 이상이 되었고 라르슈를 나의 집으로 결정한지 5년이 되었다. 이 세월을 되돌아보니,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협력자들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다 더 완전하게 내가 “살도록” 해주었고, 그것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수많은 라르슈 집에서 받은 따뜻한 환영,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많은 기념잔치들은 작은 아들의 돌아옴을 내가 더 깊이 경험하도록 해 주었다. 환영과 기념은 참으로 “방주 공동체”에서의 삶에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이다. 그곳에는 수없이 많은 환영의 표시들, 껴안음과 입맞춤, 노래, 촌극 그리고 잔치음식이 있어 라르슈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일생 집으로 돌아오는 잔치가 계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 역시 큰 아들의 이야기를 살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전체 그림을 볼 때까지는 큰 아들이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 그림에 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실제로 보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렘브란트가 불러일으키는 긴장을 발견하였다. 그림에는 아버지와 작은 아들 사이의 빛으로 가득한 화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큰 아들의 어둡고 원망에 찬 거리가 있었다. 그림에는 참회가 있지만 또한 분노도 있다. 친교가 있지만 소외도 있다. 치유의 따스한 불꽃도 있지만 비난하는 눈초리의 차가움도 있다. 자비가 쏟아지지만 그것을 받지 않으려는 엄청난 저항도 있다. 내 안에서 큰 아들을 만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동체 안의 삶은 어둠을 치워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를 라르슈로 끌리게 한 빛은 또한 내 안의 어둠을 의식하게 했던 것 같다. 질투, 분노, 거부당하거나 무시되는 느낌, 참으로 소속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용서, 화해, 그리고 치유의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상황 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공동체 생활은 나에게 진짜 영적 전투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정확하게 어둠이 현실로 다가 왔을 때 빛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려는 투쟁을.

내가 혼자 살았을 때는, 큰 아들을 보이지 않게 숨기는 것이 더 쉬웠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과 생활을 나눌 때 에 나는 곧 내 안의 큰 아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공동체 생활에는 낭만이 거의 없다. 집어삼키는 것 같은 어둠에서 아버지의 포옹이 있는 단상으로 계속 나아갈 필요가 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잃을 것이 거의 없다. 그들은 음흉하지 않게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에게 보여준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그들의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랑을, 그들의 불안과 함께 부드러움을, 그들의 이기심만 아니라 관대함을 표현한다.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면서, 그들은 나의 복잡한 방어를 뚫고 들어와 그들이 나와 함께 있는 모습처럼 내게 마음을 열라고 요구한다. 그들의 장애는 나의 장애를 벗겨놓는다. 그들의 고뇌는 나의 고뇌를 반영한다. 그들의 취약함은 나의 취약함을 보여준다. 내 안에 있는 큰 아들과 나를 직면하도록 강요하면서 라르슈는 큰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길을 열어준다. 한편은 그들은 나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우쳐준다.

내 안에서 아이 떠나 보내기

이러한 발견들이 나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반면, 라르슈가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아버지가 되어가는 도전이다. 공동체의 대부분 식구들보다 나이가 더 들었고 사목자로 있다 보니, 나 자신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사제수품 때문에, 나는 이미 지위를 얻었다. 이제 나는 그것을 살아내야 한다.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협력자가 있는 공동체에서 아버지가 되어 가는 것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로서 씨름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렵다. 렘브란트의 아버지는 고통에 의해 남은 것이 없는 아버지이다. 많은 “죽음들”로 그는 고통 받았고, 이제 그는 받고 주는데 완전히 자유롭다. 아버지의 뻗친 손은 애걸하지도, 움켜잡지도, 요구하지도, 경고하지도,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축복하고 모든 것을 다 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손이다.

이제 나는 내 안의 아이를 가게 놔두는 어렵고도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와 직면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명료하게 말한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 두었습니다”(1코린 13,11). 고집 세고 방탕한 작은 아들이나 성난 큰 아들이 되는 것은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우리 공동체에는 고집 부리고 성난 아이들로 가득하고, 같은 친구들에 둘러 싸여 있으면 연대감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공동체에 더 오래 있을수록 그러한 연대는 훨씬 더 외로운 목표로 가는 길에 있는 정거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아버지의 외로움, 하느님의 외로움, 연민이라는 궁극적 외로움. 공동체는 회심했든 안했든 또 다른 작은 아들이나 큰 아들이 필요하지 않고, 손을 뻗치며 항상 돌아오는 아이들의 어깨 위에 그 손을 얹기를 갈망하는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내 안의 모든 것이 그 소명에 저항한다.

나는 내 안의 아이에게 계속 매달린다. 나는 반쯤 보이지 않는 맹인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주변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분명하게 보고 싶다. 나의 아이들이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다. 나는 그들이 외국에 있거나 하인들과 함께 농장에 있을 때 그들과 함께 있고 싶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침묵하고 싶지 않다. 나는 전체 이야기를 듣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나고 수많은 질문을 하고 싶다. 나는 기꺼이 품에 안기고 싶은 사람들이 매우 적을 때 내 손을 계속 뻗고 싶지 않다. 특히 많은 문제들의 원인이라고 간주되는 아버지들과 아버지 같은 모습의 사람들에게는 가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로서 오랜 삶을 살고 나서, 나는 참다운 초대가 오로지 끝없는 연민으로 축복하고, 질문을 하지 않으며, 항상 주고 용서하며, 결코 되갚음을 기대하지 않는 아버지가 되는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다. 공동체에서 이 모든 것은 나를 자주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구체적이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다. 나는 사람들의 삶이 매일 들쭉날쭉하는 것에 관여하고 싶다. 나는 기억되고 싶고, 초대받고 싶고, 정보를 얻고 싶다. 그러나 사실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나의 욕망을 알아차리고, 그 사람들은 그 욕망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확신이 없다.

나의 사람들은, 장애가 있든 없든, 또 다른 동료, 또 다른 놀이 친구, 또 다른 형제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축복할 수 있고, 그들이 그를 필요로 하는 방식대로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용서하는 아버지를 찾고 있다. 나는 분명하게 아버지가 되는 진정한 나의 소명을 보고 있다. 또한 동시에 그 소명은 내가 따를 수 없는 소명처럼 보인다. 나는 모든 사람이 많은 욕망이나 분노 때문에 밖으로 뛰쳐나가는데 나 혼자만 집에 머물고 싶지 않다.

나는 그들이 느끼는 똑같은 충동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가고 싶다! 그러나 그들이 집에 돌아올 때 – 지치고, 소진되고, 흥분하고, 실망하고, 죄책감을 갖거나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 누가 집에 있을 것인가? 그들이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해본 후, 결국 돌아가고 포옹을 받을 안전한 자리가 있다고 누가 그들을 확신시킬 것인가? 내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사람이 될 것인가? 아버지가 되는 즐거움은 방탕한 자녀들의 쾌락과 엄청나게 다르다. 그것은 거부와 외로움을 넘어서는 기쁨이다. 그렇다, 긍정과 공동체마저도 넘어서는 기쁨이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그 이름을 받고 그분의 거룩한 외로움에 참여하는 아버지다움의 기쁨이다(에페 3,14).

아버지다움과 어머니다움이 하나인 아버지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아버지다움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통은 너무나 분명하고, 기쁨은 너무나 숨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적인 어른으로서 나는 나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나의 소명을 배반하는 것이다. 확실히 배반이다! 그러나 나의 모든 요구와 너무나 반대로 보이는 것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가? 한 소리가 나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이가 너의 손을 잡고 너를 아버지가 되도록 이끌 것이다.”

나는 그 소리가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거부당한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은 나를 그들의 아버지로 원할 뿐만 아니라, 나에게 그들의 아버지가 되는 길을 보여준다. 참다운 아버지다움은 하느님의 요구하지 않는 사랑의 가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그 가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우나,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무력함을 통하여 이미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이 나의 스승이 될 것이다.

장애를 지닌 사람들과 그들의 협력자로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아버지다움과 어머니다움이 하나인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갈망을 발견한다. 그들은 모두 거부나 버림받음의 경험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은 모두 자라나며 상처를 입었다. 그들 모두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조건의 사랑을 받기에 그들이 합당한지 의심하고 있고, 그들 모두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고 축복하는 손을 만질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있다.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축복하는 자리로

렘브란트는 아이들의 길들을 초월한 사람으로서 아버지를 그리고 있다. 아버지의 외로움과 분노도 그곳에 있을 수 있지만, 그것들은 고통과 눈물에 의해 변화되었다. 아버지의 외로움은 끝없는 고독이 되고, 그의 분노는 한계가 없는 감사가 되었다. 이 모습이 내가 되어야 할 모습의 아버지이다. 아버지의 비움과 연민이 지닌 무한한 아름다움을 볼 때에 나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본다. 내 안의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이 자라나 자비가 넘치는 성숙한 아버지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

4년 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을 보러 갔을 때, 그때 본 것을 내가 얼마나 살아야 할 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렘브란트가 나를 데려다 놓은 곳에 그저 경외감을 갖고 서있었을 뿐이다. 렘브란트는 나를 헝클어진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작은 아들에서 늙고 구부러진 아버지로,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축복하는 자리로 이끌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나의 손을 바라보면서,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뻗으라고, 내게 오는 모든 사람들의 어깨 위에 얹으라고, 그리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떠오르는 축복을 주라고 그 손이 나에게 주어졌음을 안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 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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