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되려면: 애도와 용서, 그리고 관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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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되려면: 애도와 용서, 그리고 관대함
  • 헨리 나웬
  • 승인 2019.07.29 00: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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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 아버지가 되어가기-3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렘브란트의 아버지 그림을 보면서, 나는 참으로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는 세 가지 길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애도, 용서, 그리고 관대함의 길이다.

애도의 길

“애도는 연민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다. 애도는 세상의 죄 - 나 자신의 죄까지 포함하여 - 가 나의 마음에 파고 들어와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라고 요구한다. 눈물 없이 연민이나 자비는 없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없다면, 적어도 마음에서 올라오는 눈물이라도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보이는 끝없는 고집불통, 우리들의 욕망, 탐욕, 폭력, 분노, 원망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것들을 하느님의 마음의 눈을 통하여 바라볼 때, 나는 울 수밖에 없고 슬픔으로 울부짖는다:

“보아라, 나의 영혼이여, 한 인간존재가 힘을 다해 서로 많은 고통을 끼치려 하는 모습을 보아라. 그들의 동료들에게 해를 가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모습을 보아라. 그들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이 부모들을 보아라.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이 지주를 보아라. 폭행당한 여성들, 악용되는 여성들, 버려진 아이들을 보아라. 나의 영혼이여, 세계를 보아라. 집단 수용소, 감옥, 양로원, 병원들을 보아라.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라.”

이 애도는 기도이다. 이 세상에는 애도하는 사람들이 거의 남지 않았다. 그러나 애도는 세상의 죄를 보는 마음의 훈련이고, 사랑 없이는 꽃피울 수 없는 자유에 대한 슬픈 대가가 바로 애도이다. 나는 모든 기도가 애도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 애도는 단지 인간의 죄가 너무 커서 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룩한 사랑이 한계가 없기 때문에 깊은 것이다. 가지고 있는 유일한 권위가 연민인 아버지처럼 되기 위하여 나는 셀 수 없는 눈물을 흘려야 하고, 어떤 여정을 가든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용서의 길

영적인 아버지다움으로 이끄는 두 번째 길은 용서이다. 끊임없는 용서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와 같이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는 매우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네 형제가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 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나는 자주, “난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하지만, 그 말을 할 때조차 나의 마음은 여전히 분노와 원망에 가득 차 있다. 나는 여전히 결국 내가 옳았다고 말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나는 여전히 사과와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난 여전히 되갚는 칭찬을 들으며 만족하고 싶다, 그것이 용서했다는 것에 대한 칭찬이라도.

그러나 하느님의 용서는 무조건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용서이고, 그 마음은 자기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완전히 비운 마음이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실천해야 하는 것은 이 거룩한 용서이다. 용서를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고, 건강하지 않으며, 비현실적이라는 모든 주장을 계속 물리치라고 이 거룩한 용서는 나에게 청한다. 거룩한 용서는 감사와 찬사를 원하는 나의 모든 요구 위에 올라서라고 도전한다. 마지막으로, 거룩한 용서는 나의 상처 입은 마음을 딛고 서라고 요구한다. 상처받고 오해받은 나의 마음은 지배하고 싶어 하고, 나와 내가 용서해야 하는 사람 사이에 몇 가지 조건들을 세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 “딛고 서는 것”은 용서의 올바른 훈련이다. 아마도 그것은 “딛고 서는 것”보다 “그 위에 올라가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낫겠다. 자주 나는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지만 나의 사랑을 너무나 자주 되돌려 주지 않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세워놓은 주장과 분노의 감정이 쌓아올린 벽으로 올라간다. 그것은 이용당하거나 다시 상처받은 것에 대한 두려움의 벽이다. 그것은 자만심의 벽이고 계속 지배하고 싶은 욕망의 벽이다. 그러나 내가 그 벽을 딛고 서거나 그 위로 올라갈 수 있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 하느님이 머무는 집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참다운 연민의 사랑으로 나의 이웃과 만난다.

애도는 내가 나의 벽 너머를 보도록 하고 인간적 상실에서 비롯되는 엄청난 고통을 깨닫게 해준다. 애도는 나의 마음을 열어 동료 인간들과 진실한 연대를 맺을 수 있도록 한다. 용서는 벽을 딛고 서서 되갚음에 대한 아무런 기대 없이 다른 이들을 진정으로 환영하는 길이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기억할 때만 아버지가 나를 환영하는 것과 똑같은 연민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사람들을 환영할 수 있다.

관대함의 길

아버지처럼 되는 세 번째 길은 관대함이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떠났던 아들이 요청하는 모든 것을 줄 뿐만 아니라, 돌아옴에 온갖 선물의 세례를 베푼다. 그리고 그의 큰 아들에게 말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하여 남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아들들에게 다 내어준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반항했던 사람이 상식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줄 뿐만 아니라, 아니다, 아무런 유보 없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준다. 두 아들 모두가 아버지에게는 “모든 것”이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생명마저 내주고 싶다. 작은 아들에게 내어준 옷, 신발 그리고 호화로운 잔치로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것, 아버지의 마음속에 있는 특별한 자리를 큰 아들에게 받으라고 재촉하는 모습, 그리고 동생의 잔칫상에 합류하라는 것 모두가 가부장적 행위의 모든 경계선들이 부서졌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려준다. 이것은 그냥 훌륭한 아버지의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선함, 사랑, 용서, 보살핌, 기쁨, 그리고 연민에 전혀 한계가 없는 하느님의 초상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관대함을 당대의 문화가 마련해주는, 그러나 끊임없이 문화적 한계를 넘어서는 모든 표상을 사용하여 제시하고 있다.

아버지처럼 되기 위하여, 나는 아버지 하느님이 관대한 것처럼 관대해져야 한다.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그분 자신마저 내어주는 것처럼, 나도 나 자신을 형제자매들에게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자기 내어줌이 참다운 제자의 표징이라고 분명히 한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이러한 자기 내어줌은 훈련이다. 그것은 그냥 자동적으로 오는 것 이 아니다. 두려움, 자기-이익, 탐욕 그리고 권력으로 다스리는 어둠의 자녀들로서 우리의 거대한 동기들은 생존과 자유-보존이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는 것을 알고 있는 빛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이웃을 위하여 내놓는 것이 가능해진다.

빛의 자녀들인 우리는 참다운 순교자가 될 준비를 한다. 순교자는 전 생애를 다하여 하느님의 무제한의 사랑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것을 주는 것은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을 얻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점을 명료하게 표현한다: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관대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나는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걸음들은 물론 처음에는 내딛기 어렵다. 자유롭게 주는 것을 가로막는 수많은 감정과 느낌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에게 에너지, 시간, 돈, 그렇다, 관심까지 왜 주어야 하는가? 나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과 왜 내가 삶을 나누어야 하는가? 나는 기꺼이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진실은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나에게 반항한 사람이 나의 “친족”이고 나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관대함은 그 같은 친밀한 결속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참된 관대함은 느낌이 아니라 진실에 근거하는 행위이다. 내가 주라는 요청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친척이고 일가이며, 나의 가족에 속한다는 진실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때마다, 그 진실은 나에게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관대함은 믿는 가족을 창조한다.

그렇다면 애도, 용서, 그리고 관대함은 아버지의 모상이 내 안에서 자라날 수 있는 세 가지 길이다. 그것들은 집에 있으라는 아버지의 초대가 지닌 세 가지 측면이다. 아버지로서 나는 더 이상 작은 아들이나 큰 아들처럼 집에 오라는 초대를 받지 않으나, 고집부리며 방황하던 아이들이 돌아올 수 있고, 기쁨으로 환영받는 이들을 그곳 집에서 기다리는 존재가 된다. 그냥 집에 있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떠나간 이들을 애도하는 기다림, 그리고 돌아올 사람들에게 용서와 새로운 생명을 주려는 희망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아버지로서, 나는 인간의 마음이 갈망하는 모든 것이 집에서 발견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아버지로서, 나는 호기심으로 돌아다니려는 욕구에서 그리고 어릴 때 놓친 기회라고 여기며 만회하려는 욕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아버지로서, 나는 참으로 나의 젊음이 끝났고, 젊은이 놀이를 하는 것은 내가 너무 늙었고 죽음에 가까이 있다는 진실을 덮으려는 우스꽝스러운 시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로서, 나는 영적으로 어른의 책임을 감히 수행하려고 하며 진정한 기쁨과 성취감은 오로지 삶의 여정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환영할 때에 올 수 있다고 감히 믿어야 한다. 아무것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사랑할 때 기쁨이 오리라 믿어야 한다.

이러한 영적 아버지 역할을 하는 데에는 두려운 공허가 따라온다. 거기에는 아무런 권력, 성공, 인기, 손쉬운 만족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두려운 공허는 또한 참다운 자유의 자리이기도 한다. 그곳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남아있지 않은” 자리이며, 사랑이 기댈만한 줄이 없지만, 영적 힘이 실제로 발견되는 자리이다.

그 두렵지만 열매를 맺는 공허와 내 안에서 만날 때마다, 나는 어떤 단죄도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환영하며 희망을 제공할 수 있음을 안다. 그곳에서 나는 평가하고 분류하거나 분석할 아무런 필요 없이 다른 이들의 짐을 자유롭게 받아들인다. 그곳에서, 전혀 판단하지 않는 존재의 상태에서, 나는 해방을 가져오는 신뢰를 낳을 수 있다.

한번은, 죽어가는 친구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에 이 거룩한 비움을 직접 경험하였다.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나는 과거에 관하여 질문을 하거나 미래에 대해 추측하고 싶은 갈망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아무런 두려움 없이, 죄책감이나 수치심 없이, 걱정 없이 함께 있었다. 그 비움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조건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우리는 늙은 시메온이 품에 그리스도를 안고 했던 말을 할 수 있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루카 2,29). 그곳에, 그 두려운 공허 한 가운데 완전한 신뢰, 완전한 평화, 그리고 완전한 기쁨이 있었다. 죽음은 더 이상 적이 아니었다. 사랑이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의 거룩한 비움과 만날 때마 다,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거기에는 “하느님의 천사들의 위대한 기쁨”(루카 2,32)이 있다. 그것은 돌아오는 아들딸들을 위한 기쁨이다. 영적 아버지다움의 기쁨이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 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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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원 2019-08-03 17: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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