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궁극적인 승리는 황홀한 결혼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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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궁극적인 승리는 황홀한 결혼 잔치
  • 헨리 나웬
  • 승인 2019.06.24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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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하느님이 큰 잔치를 벌이는 모습에 내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항상 하느님과 밀착하여 생각하고 있는 장중함과 심각함, 진지함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묘사할 때에 썼던 방식을 생각해보면 그 중심에 자주 즐거운 잔치가 있다. 예수님은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베풀어 주는 결혼잔치와 비교한다. 왕의 하인들은 밖으로 나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잔치에 오시오”(마태 22,4).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로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처럼, 예수님은 이 잔치의 비유에서도 자녀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기를 거절할 때에도 잔치를 계속하는 아버지 하느님의 열성과 위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식사로 부르는 이 초대는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라는 초대이다. 이 점은 특히 예수님이 죽기 직전에 행한 최후의 만찬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태 26,29). 그리고 신약성경의 끝 무렵에서 하느님의 궁극적인 승리는 황홀한 결혼 잔치로 묘사되고 있다: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기 시작하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 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다 …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묵시 19,6-9).

잔치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다. 하느님은 단지 용서, 화해, 그리고 치유를 해 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손길을 목격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선물들이 기쁨의 원천이 되도록 들어올린다. 왜 죄인들과 식사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말하는 세 가지 비유에서, 하느님은 기뻐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분과 함께 기뻐하도록 초대한다. “나와 함께 기뻐하자.” 목자는 말한다. “잃었던 양을 찾았다.” 여인은 말한다. “나와 함께 기뻐하자, 잃었던 동전을 찾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말한다.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나의 이 아들은 잃었다가 찾았다.”

이 모든 소리들은 하느님의 소리이다. 하느님은 그분의 기쁨을 혼자서만 누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그 기쁨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하느님의 기쁨은 그분의 천사들과 성인들의 기쁨이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다.

렘브란트는 작은 아들이 돌아오는 순간을 그린다. 큰 아들과 아버지 가족의 세 구성원들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아버지의 기쁨을 이해할 것인가? 그들은 아버지가 그들을 안도록 허용할 것인가? 나는 허용할까? 그들은 비난으로부터 걸어 나와 잔치에 참여할 것인가? 나는 어떨 것인가?

나는 오직 한 순간만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추측만 할 뿐이다. 나는 반복한다: 그들은 허용할까? 나는 허용할까?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새 옷에 감탄하고, 모든 사람들이 식탁 주위에 모여 그분과 함께 먹고 춤추기를 바란다. 이것은 사적인 일이 아니다. 이것은 가족 모두가 감사하며 축하해야 할 일이다.

나는 다시 되풀이 한다: 그들은 축하할 것인가? 나는 축하할 것인가? 중요한 질문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것은 즐겁고 기쁜 삶을 살아가는 것에 저항하는 나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기뻐한다. 세상의 문제들이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고민과 고통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수천의 사람들이 회심하고 이제 하느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니다, 하느님은 그분 자녀들 중 하나를 잃었다가 찾았기 때문에 기뻐한다. 내가 초대받은 것은 그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쁨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파괴, 황폐 그리고 고통 한가운데서 자녀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며 나오는 기쁨이다. 그것은 렘브란트가 그림에서 앉아있는 관찰자 머리 위의 벽에 그려놓은, 확연하게 보이지 않는 피리 연주가처럼 숨어있는 기쁨이다.

나는 작고, 숨겨졌으며, 내 주위 사람들이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기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나는 보통 나쁜 소식들을 받아들이고, 전쟁, 폭력 그리고 범죄에 관하여 읽고, 갈등과 혼란을 목격하는데 익숙하다. 나는 항상 나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와 고통, 그들의 좌절과 실망, 그들의 우울함과 고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기대한다. 어떻든지 나는 슬픔과 더불어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기쁨을 보는 눈과 하느님에게 속하고 세상의 숨겨진 구석에서 발견되는 즐거움을 듣는 눈을 잃어버렸다.

친구 하나는 하느님과 매우 깊숙이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오로지 슬픔만 예측하는 곳에서 기쁨을 볼 수 있다. 그는 많이 여행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가 집에 돌아오면, 나는 항상 그가 방문한 나라들의 어려운 경제상황과, 그가 들은 거대한 불의, 그가 본 고통에 대해 말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친구는 세상의 큰 소용돌이를 매우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경험을 나눌 때에도, 친구는 그가 발견한 숨겨진 기쁨들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그에게 희망과 평화를 가져다 준 남자, 여자 혹은 아이에 관해 말한다. 그는 모든 혼란 속에서도 서로에게 충실한 작은 사람들의 그룹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하느님의 작은 경이에 대해 말한다. 때때로 나는 “신문에 난 새로운 소식들”, 나를 흥분시키고 기분을 북돋아주는 이야기들, 친구들 사이에서 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감각을 건드리고 인기를 얻고 싶은 나의 욕구에 결코 응답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 말한다: “난 많은 기쁨을 나에게 안겨 준 매우 작고 매우 아름다운 어떤 것을 보았어.”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는 아들이 가져다 준 즐거움에 전적으로 몰입한다. 난 그 모습에서 배워야 한다. 나는 그곳에 쟁취할 기쁨이 있다면 모든 실제적인 기쁨을 “손에 넣는 것”을 배워야 하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이 보도록 들어 올려야 한다. 그렇다, 나는 모든 사람이 아직껏 회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든 곳에 평화가 오지 않은 것을, 모든 고통이 다 사라진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람들이 돌아서고 집에 돌아오고 있음을 본다. 나는 기도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용서의 순간을 알아차리고, 많은 희망의 징표들을 목격한다. 나는 모든 것이 다 잘 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지만, 이미 와있는 하느님 나라의 작은 힌트 모두를 기념할 수 있다.

이것이 실제적인 훈련이다. 그것은 나를 두렵게 하는 어둠이 훨씬 많을 때에도 빛을 선택하기를, 죽음의 세력이 너무나 강력하게 보일 때조차 생명을 선택하기를, 거짓말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도 진리를 선택하기를 요구한다. 나는 인간 조건의 매우 명백한 슬픔에 너무나 짓눌려서 많고 작지만 매우 실제적으로 그 모습을 표현하는 즐거움을 더 이상 주장하고 싶지 않은 유혹에 흔들린다. 기쁨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보상은 그 자체이다.

정신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나는 그것을 확신한다. 우리들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거부, 고통, 그리고 상처가 있지만, 일단 모든 고통 속에 숨어 있는 기쁨을 주장하기로 선택하면, 삶은 잔치가 되어간다. 기쁨은 결코 슬픔을 부인하지 않으며, 다만 슬픔을 더 많은 기쁨을 위한 비옥한 토양으로 변화시킨다.

물론 이렇게 주장하는 나를 유약하고, 비현실적이며, 감상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고, “실제의” 문제들을, 엄청난 인간 비극의 근저에 있는 구조적 악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은 참회하는 죄인이 돌아올 때에 기뻐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은 별다른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 숫자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온 인류가 희망을 잃고 스스로를 소진시켜 버릴 때 한 사람,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기도를 계속하여 세계를 파멸로부터 구할지 누가 알겠는가?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가지 숨은 속죄 행위, 한 가지 작은 이타적 사랑, 진정한 용서의 한 순간이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권좌에서 뛰어나와 돌아오는 아들에게 달려가게 하고 천국을 거룩한 기쁨의 소리로 가득 채우게 하는데 충분할지도 모른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 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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