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그대는 하느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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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그대는 하느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9.05.2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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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보면, 큰 아들은 단순히 관찰하기만 한다. 그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비유를 봐도, 그림을 봐도 알 수 없다. 나에게는 질문만 남아있다: 큰 아들은 잔치에 참여하라는 초대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비유와 그림 양쪽에서 볼 때 아버지의 마음에 관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없다. 그의 마음은 두 아들에게 나아간다. 그는 둘 모두를 사랑한다. 그는 같은 식탁에 그들이 모두 함께 형제로 앉기를 희망한다. 그는 형제들이 다르지만, 같은 가족에 속하고 같은 아버지의 아이들이라는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

이 모든 것들이 내 안에 깊이 스며들면서, 나는 아버지와 두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먼저 선택한 분은 하느님이고, 내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위대한 신비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영원으로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손 그늘에”(이사 49,2) 숨겨졌고 “그분의 손바닥에 새겨졌다”(이사 49,16). 어떤 인간 존재가 우리를 만지기 전에 하느님은 “우리를 남몰래 만드셨고, 우리는 땅 깊은 곳에서 짜여졌다.”(시편139,15). 그리고 어떤 존재가 우리에 대해 결정하기 전에, 하느님은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 우리를 엮으셨다”(시편 139,13).

하느님은 어떤 인간 존재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줄 수 있기 전에 우리를 사랑한다. 그분은 우리를 “첫 번째” 사랑으로, 무제한의 그리고 무조건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며, 그 분처럼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라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살아오는 동안 내내 나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을 알며,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애썼다. 나는 영적인 삶의 지침들을 따르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다 – 항상 기도하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일하고, 성서를 읽는 등 – 그리고 나 자신을 탕진하려는 많은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애썼다. 나는 수없이 실패했으나 항상 다시 노력했고, 절망 속에 떨어질 때에도 노력했다.

이제 이런 시간동안 하느님이 나를 찾으려고, 나를 알려고, 나를 사랑하려고 애써왔다는 것을 내가 충분히 깨달았는지 의심하고 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하느님을 찾을 것인가?”가 아니라 “하느님께 발견되도록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허용할 것인가?”이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하느님을 알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느님께서 나를 알도록 나 자신을 놔둘 것인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도록 나 자신을 놔둘 것인가?”이다.

하느님은 멀리까지 나를 바라보고 있으며, 나를 찾으려고 애쓰고 나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열망한다. ‘왜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는 질문에 답변하면서, 예수님이 말한 세 가지 비유 모두 하느님의 주도성을 강조한다.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서는 목자이다. 하느님은 램프에 불을 밝히고 집을 청소하며, 잃어버린 동전을 찾을 때까지 온갖 곳을 찾아다니는 여인이다. 하느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지켜보고 기다리며, 뛰어나가 그들을 맞이하고 포옹하며, 그들에게 간청하고 집에 돌아오라고 빌고 격려하는 아버지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하느님은 내가 하느님을 찾고 싶은 만큼이나 나를 찾고 싶어 한다. 그렇다, 하느님은 내가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만큼 나를 필요로 한다. 하느님은 집에 머물고, 움직이지 않으며, 자녀들이 그를 만나러 와서, 잘못된 행동을 사과하고 용서를 빌며 더 잘하겠다고 약속하기를 기대하는 가부장이 아니다. 그 반대로,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 집을 떠나 자녀들에게 달려감으로써 권위를 무시해버리고, 사과와 변화의 약속에 주의를 두지 않으며, 마침내 그들을 위하여 준비한 풍성한 식탁에 자녀들을 데려간다.

나는 이제 나의 영적 여정의 특징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인지 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은 내게서 꼭꼭 숨어계시고, 그래서 그분을 내가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한 분이라고 여기지 않고, 내가 숨을 때에도 나를 찾아 헤매는 존재로 볼 때에 그런 변화가 가능하다. 하느님의 눈으로 나의 잃어버린 자아를 꿰뚫어보고 내가 집에 돌아갈 때에 하느님의 기쁨을 발견하면, 나의 삶은 고뇌가 줄어들고 신뢰가 더 커질 것이다.

하느님이 나를 발견하고 나를 집으로 데려가고 천사들과 함께 나의 귀환을 기념하도록 함으로써, 하느님이 더 크게 기뻐하시도록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하느님께 나를 발견하는 기회를 드리고 나를 아낌없이 사랑하도록 함으로써 하느님을 웃게 한다면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질문들은 실제적인 주제를 일으킨다. 그것은 나의 자아상을 다시 보게 만든다. 나는 내가 그분이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느님 안에 단순히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그분의 갈망이 실제로 있다고 믿는가?

여기에 나의 영적 투쟁의 핵심이 놓여있다: 자기 거부, 자기 비하, 그리고 자기 혐오와 치르는 투쟁이다. 그것은 매우 격렬한 전투이다. 왜냐하면 세상과 그 악마들은 내가 나 자신을 가치가 없고, 쓸모가 없고,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도록 공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소비주의 경제는 소비자들의 자존심을 낮게 조작함으로써 그리고 물질수단을 통하여 영적 기대치를 창출함으로써 확산되고 있다.

내가 “보잘 것 없는” 존재로 계속 갇혀 있을 때, 나는 쉽사리 물건을 사고, 사람을 만나거나 자기 이미지의 급진적 변화를 약속하는 자리에 가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전혀 그러한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를 조작당하거나 유혹당하도록 허용할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낮추어 보고 원하지 않는 아이로 보는 많은 이유들을 여전히 갖게 될 것이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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