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기쁨은 거룩한 슬픔을 없애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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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기쁨은 거룩한 슬픔을 없애지 않는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9.07.02 1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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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하느님의 길 안에서, 나는 나를 절망으로 끌어당기는 모든 파멸과 단죄의 소리들을 놓아버리고 “작은” 기쁨들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 관한 참다운 진리를 드러내도록 허용해야 하는 도전을 받고 있다. 예수님이 세상에 관해 말할 때에, 그분은 매우 실제적이다. 그분은 전쟁과 혁명, 지진, 전염병과 기근, 박해와 감금, 배신, 증오와 암살에 관해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의 어둠에 관한 모든 징표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제시도 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기쁨은 그 모든 것 가운데에서 우리의 기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 죽음보다 강한 하느님의 집 식솔에 속하는 기쁨이다. 그리고 이미 즐거움의 나라에 속하고 있는 세상에 존재하도록 우리를 강화시키는 하느님께 속하는 기쁨이다.

이것이 성인들이 누리는 기쁨의 비밀이다. 사막의 성 안토니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떼제공동체의 로제 슐츠 형제, 콜카타의 마더 테레사에 이르기 까지, 기쁨은 하느님의 백성들의 특징이었다. 그 똑같은 기쁨은 수많은 단순하고 가난하며 오늘날 자주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격변 속에 살고 있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아버지 하느님의 집에서 음악을 듣고 춤출 수 있다. 나 자신도 정신지체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나의 공동체에서 매일 그 기쁨을 보고 있다. 오래 전에 살았든 아니면 오늘 우리와 함께 살고 있든, 이 모든 거룩한 남성들과 여성들은 매일 일어나는 수많은 작은 돌아옴을 알아볼 수 있고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기뻐한다.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참된 기쁨의 의미를 꿰뚫어 보고 있다.

매일 냉소주의와 기쁨의 근본적인 차이를 경험하는 것은 나에게 정말 경이로운 일이다. 비꼬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나 어둠을 추구한다. 그들은 항상 닥쳐오는 위험들, 불순한 동기들, 그리고 숨겨진 계략을 지적한다. 그들은 신뢰를 유약하다고 하고, 보살핌을 낭만적이라 하며, 용서를 감상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열심함을 깔보고, 영적인 열정을 조소하며, 성령의 행위를 무시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를 참되게 보는 현실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며, “도피적인 정서”에 의해 기만당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쁨을 축소시킴으로써, 그들의 어둠은 단지 더 깊은 어둠을 불러일으킬 따름이다.

하느님의 기쁨을 알게 된 사람들은 어둠을 부인하지 않으며, 다만 그 어둠 속에 살지 않기로 선택할 따름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을 어둠 그 자체보다 더 신뢰할 수 있으며, 작은 빛 하나가 많은 어둠을 흩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빛의 섬광을 이곳저곳에서 서로에게 비추고, 그들이 하느님의 숨겨진 그러나 실제적인 현존을 드러내고 있다고 서로에게 각성시킨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낫게 해주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소유물을 나누며, 공동체의 정신을 함양하고, 받은 선물들을 기념하며, 하느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항상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매일 매 순간 나는 냉소주의와 기쁨 중에서 선택할 기회를 갖는다. 모든 생각에서 나는 냉소적이 되거나 즐거울 수 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은 냉소적이거나 즐거울 수 있다. 모든 행위는 냉소적이거나 즐겁고 기쁠 수 있다. 점점 더 나는 이 모든 가능한 선택들을 깨닫고 있으며 점점 더 기쁨의 모든 선택이 이어서 더 많은 즐거움을 보여주고, 삶을 아버지의 집에서 벌어지는 참다운 기념 잔치로 만드는 더 많은 이유들을 내놓고 있음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아버지 집의 이 기쁨을 충만하게 살았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그분 아버지의 기쁨을 볼 수 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15)라고, 예수님은 말한다. 하느님의 끝없는 기쁨도 여기에 속한다. 그 거룩한 기쁨은 거룩한 슬픔을 없애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기쁨과 슬픔이 서로를 밀어낸다. 이곳 아래 세상에서, 기쁨은 슬픔의 부재이고 슬픔은 기쁨의 부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은 하느님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아드님인 예수님은 슬픔의 사람이지만, 또한 완전한 기쁨의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가장 큰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이 결코 그분의 아버지와 갈라지지 않는 것을 깨달을 때에 발견한다. 예수님과 하느님의 일치는 그분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조차 절대로 깨지지 않았다. 하느님의 기쁨은 예수님의 아들됨에 속하고, 예수님과 그분의 아버지가 누리는 이 기쁨은 나에게도 주어진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뻐할 때에 나도 똑같이 기뻐하기를 바란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 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하느님의 돌아온 자녀로서 아버지의 집에 살아갈 때에, 하느님의 기쁨은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삶을 되돌아 볼 때 슬픔, 우울함, 냉소주의, 어두운 기분, 음침한 생각들, 병적인 억측들, 그리고 절망의 파도에 젖어들지 않는 때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자주 그런 것들이 나의 아버지 집의 기쁨을 삼켜버리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내가 이미 돌아왔고 나의 아버지가 이미 나에게 외투, 반지, 신발을 신겼다는 것을 참으로 믿을 때, 나는 마음으로부터 슬픔의 가면을 떼어낼 수 있다. 나의 진정한 자아에 대해 말하는 거짓말을 쫓아버리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내적인 자유를 갖고 진리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말고 더 있다. 아이는 아이로 남아있지 않는다. 아이는 어른이 된다. 어른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 탕자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에, 그는 아이로 남기 위하여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아들됨을 주장하고 자신이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돌아오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의 집에 나의 자리를 다시 차지하기 위하여 초대된 하느님의 돌아온 자녀로서 이제 도전은, 나 자신이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초대에 경외심을 품는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는 것이 마지막 초대라는 통찰을 갖고 살았다. 내 안에서 작은 아들 뿐만 아니라 큰 아들까지 회심하고 돌아서며 아버지의 환영하는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영적 작업이 요구되었다. 실상은, 많은 차원에서 나는 아직도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집에 더 가까이 갈수록 돌아감의 초대 너머에 또 다른 초대가 있다는 깨달음이 더 선명해진다. 그것은 집에서 환영하고 잔치를 베풀자고 하는 아버지가 되라는 초대이다. 나의 아들됨을 다시 되찾고 나서, 이제 나는 아버지됨을 주장해야 한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속죄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 환영하는 아버지가 되어 가는 길에서 다만 한 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이제 나는 용서하고, 위로하고, 치유하며, 잔칫상을 벌이는 손이 내 손이 되어야 함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되어가는 것은 나에게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에 관한 이 성찰의 놀라운 결말로 다가온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 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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