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원히 아이로 남아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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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원히 아이로 남아있을 수 없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9.07.2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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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 아버지가 되어가기-2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아버지의 초상은 내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더 이상 나의 아들 신분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고 깨우쳐 주었다. 아들로서 충분히 살았고, 이제는 모든 장벽을 넘어 앞으로 내가 노인이 되어간다는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진정으로 내 자신에게 원하는 모든 것이다.

나는 영원히 아이로 남아있을 수 없고, 나의 삶에 대해 아버지가 있음을 핑계로 삼을 수 없다. 나는 감히 나 자신의 손을 뻗쳐 축복을 해야 하고, 나의 아이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든지, 그들을 최고의 연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연민이 충만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영적 삶의 마지막 목표이다. 비유와 렘브란트의 그림에서도 그렇게 표현되었으므로, 나는 이 목표의 온전한 의미를 파헤쳐야 할 것이다.

먼저, 나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고 이야기를 말하는 배경을 마음에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루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5,1-2).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가까이 한다고 비난함으로써 예수님이 스승으로 자격이 없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예수님은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와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말해준다.

예수님은 그분이 말하고 있는 하느님이 연민의 하느님이며 참회하는 죄인들을 당신의 집에 즐겁게 환영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나쁜 비난을 받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먹는 일은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느님에 관한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이 가르침을 매일의 생활 속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하느님이 죄인들을 용서한다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말할 나위 없이 그분과 똑같이 해야 한다. 하느님이 죄인들을 집에 받아들이면,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하느님이 자비가 가득한 존재라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물론 자비가 가득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분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선언한 하느님은 연민의 하느님이고, 모든 인간다운 행위의 모범이요 예로서 그분 자신을 제시하는 하느님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되어가는 것은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 한 가지 중요한 측면만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이다. 예수님 말씀의 철저한 속성과 실천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요구들은 하느님이 되어가고 그분의 참된 자녀들이 되라는 일반적 초대의 한 부분으로 듣게 될 때에 너무나 명백하다.

이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우리들은 경쟁적인 그 세계의 주인공으로 남아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에 보상받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속할 때,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그분께 속할 때, 우리는 하느님처럼 살 수 있다. 예수님이 초대한 위대한 회심은 세상에 속하는 것에서 하느님께 속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죽음 바로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할 때, 그분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16-21).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식솔로서 하느님의 집에 있으면, 우리는 그분과 같아지고, 그분처럼 사랑하고, 그분처럼 선하고, 그분처럼 보살필 수 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때 이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주는 이들에게만 잘해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2-36).

이것이 복음서의 핵심 메시지이다. 인간존재가 서로 사랑하도록 초대된 방식은 하느님의 방식이다. 우리는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모습처럼 이타적으로 변화하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초대를 받고 있다. 연민을 지니고 사랑하는 것은 경쟁적인 생활방식에 토대를 둘 수 없는 사랑이다. 아무런 경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절대적 연민의 사랑이어야 한다. 그것은 적에 대한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가 단지 하느님에게서 사랑을 받기만 하지 않고 하느님처럼 사랑을 하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되어야 하고 그분의 눈을 통하여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비유의 배경과 예수님의 명백한 가르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이 되어가는 데에 모형이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온전함이 머물고 있다. 하느님에 관한 모든 지식이 그분 안에 존재한다. 하느님의 모든 영광이 그분 안에 남아 있다. 하느님의 모든 권능이 그분에게 속한다. 아버지와 그분의 일치는 너무나 친밀하고 너무나 완전하여 예수님을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필립보는 예수님에게 말한다. 그분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은 참다운 아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분은 반항하지 않는 작은 아들이다. 그분은 원망하지 않는 큰 아들이다. 모든 것에서 그분은 아버지께 복종하지만, 절대로 아버지의 노예는 아니다. 그분은 아버지가 말씀하는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하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분은 아버지가 파견하면서 하라고 하는 모든 것을 하지만, 여전히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 그분은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받는다. 그분은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 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5,19-23).

이것이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아름다움에 초대받고 있다. 구원의 신비는 하느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했고 그래서 하느님의 모든 잃어버린 자녀들이 예수님이 아들인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받는 존재인 예수님은 아버지의 방탕한 자녀들의 죄를 짊어지고 그들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그러나 떠나 있는 동안, 예수님은 아버지와 가까이 있으면서 전적인 복종으로 원망에 가득 찬 그분의 형제자매들에게 치유를 가져온다. 이처럼,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작은 아들도 되고 큰 아들도 되며 내가 어떻게 아버지가 되는지 보여준다. 그분을 통하여 나는 다시 참된 아들이 되고, 참된 아들로서 나는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그런 것처럼 마침내 연민이 가득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

삶의 시간들이 지나가면서, 나는 이러한 영적 아버지로 성장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도전을 받지만 또한 얼마나 충만한 일인지 발견하고 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권력, 영향력, 혹은 지배와 관련된 모든 생각을 쫓아버린다. 나는 한 때 어느 날 많은 상관들이 사라지고 내가 마침내 대장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망상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권력이 주된 관심인 세상의 방식이다. 그리고 일생 대부분을 상관들을 쫓아내기 위하여 애쓴 사람들이 마침내 그 자리에 자신들이 섰을 때 전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영적인 아버지다움은 권력이나 지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연민이 가득 찬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아차리기 위하여 나는 돌아온 아들을 껴안고 있는 아버지를 계속 바라보아야 한다.

나의 가장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권력을 쟁취하려고 애쓰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충고를 줄 때에, 그 의견대로 따르고 있는지 알고 싶다. 도움을 줄 적에, 감사를 받고 싶어 한다. 돈을 줄 때에 내 방식으로 쓰여지기를 원한다. 좋은 일을 할 때에는 기억되고 싶다. 동상이나 기념판은 아니더라도, 잊혀지지 않는지 늘상 걱정하고 어떻든지 다른 이들의 생활과 행동 안에 끼어들기를 바란다.

그러나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는 자기 자신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오랜 고통의 삶은 지배하고 싶은 욕망을 그에게서 비워버린다. 아이들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이고,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완전히 주고 싶다. 그들을 위하여 자기 전부를 내놓고 싶다.

나는 되갚는 것을 바라지 않고 줄 수 있는가, 나의 사랑에 아무런 조건도 붙이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적 인정과 애정을 끊임 없이 바라는 나 자신을 볼 때에, 그것은 일생에 걸친 투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매번 내가 이런 필요 위에 올라서고 되갚음에 대한 관심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때마다, 나의 삶이 하느님 성령의 열매를 참으로 맺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이 영적인 아버지다움으로 가는 길이 있는가? 아니면 나의 세계에서 자리를 찾으려는 요구에 너무나 사로잡혀서 연민의 권위 대신 권력의 권위를 또다시 사용하면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인가? 경쟁이 나의 온 존재를 지배하여 나의 아이들을 계속하여 경쟁자로 볼 것인가?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나를 자비로 참으로 초대하고 있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그분 자신을 자비가 가득 찬 삶으로 가는 길이라고 내놓는다면, 나는 실제로 경쟁이 마지막 말인 것처럼 계속 행동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초대받은 아버지로 변해갈 수 있다고 신뢰해야 한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 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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