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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하느님은 어머니이시다[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22] 아버지-2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큰 아들)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루카 15,20. 28-29)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나는 자주 친구들에게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 그림에 대한 처음 인상을 말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면 그들은 당연하게 아들을 용서하는 나이든 현명한 노인을 지적한다: 자비로운 가장.

그런데 이 “가장”을 오랫동안 보면 볼수록, 렘브란트가 하느님을 한 가족의 노인 가장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을 그렸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진다. 그것은 모두 손에서 시작된다. 두 손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 아버지의 왼쪽 손은 아들의 어깨를 만지고 있는데 강하고 근육이 잘 발달된 손이다. 손가락들은 펴져있고 돌아온 아들의 어깨와 넓은 등을 다 덮고 있다. 나는 특히 엄지손가락에서 어떤 누르는 힘 같은 것을 발견한다. 왼손은 다만 만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주어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의 왼손이 아들을 만지는 방식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붙잡음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오른손은 얼마나 다른가! 이 손은 붙잡거나 움켜쥐지 않는다. 오른손은 섬세하고 부드럽고 매우 온화하다. 손가락은 서로 가깝게 있고 모습은 꽤 우아하다. 오른손은 부드럽게 작은 아들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오른손은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위안과 편안함을 준다. 그것은 어머니의 손이다.

어떤 해석가들은 강한 왼손은 렘브란트의 손이고, 여성적인 오른 손은 같은 시기에 그린 <유다인 신부>의 오른손과 비슷하다고 제안 한다. 나는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고 믿고 싶다.

 

렘브란트,「유대인 신부 The Jewish Bride」, 1665-1667, Rijks Museum, Amsterdam

아버지인 만큼 또한 어머니

아버지의 두 손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깨달은 즉시, 새로운 의미의 세계가 펼쳐진다. 아버지는 단순히 위대한 가장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인 만큼 또한 어머니이다. 그는 아들을 남성의 손과 여성의 손으로 만진다. 그는 붙잡고 그녀는 쓰다듬는다. 그는 확신시키고 그녀는 위로한다.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이시다. 그분 안에서 남성됨과 여성됨, 아버지됨과 어머니됨이 온전히 출현한다. 오른손의 온유한 껴안음은 나에게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들린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보라,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이사 49,15-16).

친구인 리처드 화이트는 아버지의 쓰다듬는 여성적인 손이 벗겨지고 상처난 발과 비교되며, 강한 근육질의 남성적인 손은 샌들을 신은 발과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아버지의 한 손은 아들의 취약한 부분을 보호해 주고, 다른 손은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아들에게 힘과 갈망을 강화시켜 준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상상일까?

망토는 새끼 새들을 보호하는 날개처럼

그리고 큰 붉은 망토도 있다. 망토는 따스한 색깔과 아치 모양을 하고 있는데, 환영과 편안함을 주는 장소를 보여준다. 처음에 보면, 등이 굽은 아버지를 덮고 있는 망토는 나에게 피곤한 여행자가 휴식을 취하도록 초대하는 천막으로 보인다. 그러나 붉은 망토를 더 응시하고 있으면, 천막보다 더 강한 다른 이미지가 다가온다: 어미 새가 새끼 새들을 보호하는 날개들로. 그래서 하느님의 모성애를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38).

낮과 밤으로 하느님은 나를 안전하게 붙들어 준다,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날개 밑에 안전하게 지키는 것처럼. 밤잠을 자지 않는 어미 새의 날개는 하느님이 자녀들에게 주는 안전을 표현하는, 천막 보다 더 훌륭한 표상이다. 어미 새의 날개는 보살핌, 보호, 휴식을 취하고 안전하게 느껴지는 장소를 나타낸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천막 같고 날개와 닮은 망토를 바라볼 때마 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어머니다움을 감지하고 나의 마음은 시편 저자가 영감을 받아 쓴 말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는.
주님께 아뢰어라: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이신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신뢰하네!
… 당신 깃으로 나를 덮으시어
내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시편 91,1-4).

그러므로, 나이든 유다인 가장의 모습 아래에는, 또한 아들을 환영하며 받아들이는 어머니 하느님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다.

하느님의 태로 돌아가라 

이제 돌아오는 아들에게 몸을 구부리고 손으로 아들의 어깨를 만지는 렘브란트의 노인을 다시 바라보면서, 나는 “품안에 아들을 꼭 껴안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이를 쓰다듬고, 몸의 따스한 체온으로 아들을 감싸며 아들이 태어난 자궁 안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는 어머니를 본다. 이처럼 “탕자 아들의 귀환”은 하느님의 태로 돌아가는 것이 되며, 우리 존재의 바로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다시 한 번 니코데모에게 했던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간곡한 권고를 다시 읽게 해 준다.

지금 나는 또한 이런 하느님의 초상이 지니고 있는 위대한 평온함을 더 잘 이해한다. 여기에는 어떤 감상도, 낭만주의도,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단순한 동화도 없다. 여기에서 내가 보는 것은 어머니이신 하느님, 자신의 모상대로 만든 존재를 태 안으로 다시 받아들이는 어머니 하느님이다. 거의 보이지 않는 눈, 손, 망토, 굽어진 몸, 이 모든 모습은 애도, 갈망, 희망, 그리고 끝없는 기다림을 표현하는 거룩한 어머니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참으로 신비는, 무한한 연민의 어머니 하느님이 자녀들의 생명과 영원히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 하느님은 자유롭게 그분의 피조물들에 의존하는 관계를 맺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피조물들에게는 자유라는 선물을 준다. 이러한 선택은 피조물들이 떠날 때 어머니 하느님께 슬픔을 일으킨다. 그들이 돌아올 때에는 기쁨을 배가시킨다. 그러나 어머니 하느님의 기쁨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모든 존재가 집에 돌아오고 그들을 위하여 준비된 식탁 주위에 함께 모일 때까지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큰 아들도 포함된다. 렘브란트는 큰 아들을 거리를 두고 떨어지게 배치한다. 부풀린 망토를 입고 떨어져서, 빛의 둥근 둘레 한 구석에 그려 놓는다. 큰 아들의 딜레마는 아버지의 사랑이 비교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결정하는 데 있다.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기를 갈망하므로 사랑받기를 감히 원할 것인가 아니면 그가 생각한대로 사랑 받기를 고집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이다.

아버지는 아들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아버지가 손을 뻗치며 기다리고 있지만, 아들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큰 아들은 무릎을 꿇고 동생을 만졌던 똑같은 손이 그를 만지도록 허용할 것인가? 큰 아들은 비교하지 않고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용서받고 그분의 치유하는 현존을 기꺼이 경험하려고 할 것인가?

루카의 비유는 아버지가 두 아들 모두를 만나러 나간다고 분명히 표현한다. 아버지는 방탕하고 제 멋대로 살았던 작은 아들을 환영하기 위하여 달려 나갈 뿐만 아니라, 또한 큰 아들도 만나러 나간다. 밭일을 하고 돌아와 집안에서 나는 음악 소리와 잔치를 의아해하는 아들을 맞이하며 잔치에 들어오라고 격려하는 아버지이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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