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하느님은 비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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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하느님은 비교하지 않는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9.05.22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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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23] 아버지-3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돌아와 정말 기쁨으로 가득 찼지만, 큰 아들도 잊지 않는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그냥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쁨이 너무나 깊어서 잔치를 미루지는 못했지만, 큰 아들이 돌아온 것을 알자마자 아버지는 잔칫상을 떠나 큰 아들을 맞으러 나갔고 들어와 합류하라고 간청한다.

질투와 회한에 빠진 큰 아들은 다만 무책임한 동생이 자기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만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자기가 동생보다 덜 사랑을 받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의 마음은 더 많게 혹은 더 적게 갈라지지 않는다. 작은 아들의 귀환에 대한 아버지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응답은 큰 아들에 대해 태도와 전혀 비교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버지는 큰 아들이 그의 기쁨에 참여하라고 열렬히 간청한다.

너도 그러하다...비교하지 마라

이 모습은 내가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비교하고, 사람들을 똑똑함, 매력, 혹은 성공 등을 잣대로 하여 서열을 정하고 있는 세계에서, 그와 똑같이 하지 않는 사랑을 믿는 일은 실제로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칭찬하는 말을 들을 때, 나 자신을 칭찬할 만한 가치가 적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다른 사람들의 선함과 친절함에 대해 읽을 때, 나 자신은 그들만큼 선하고 친절할까 의문이 드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트로피, 보상, 그리고 상 따위가 특별한 사람들에게 전해질 때, 나는 왜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내가 자라난 세계는 등급, 점수, 그리고 통계로 가득한 세계여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나는 항상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나의 삶에 있어 많은 슬픔과 기쁨은 이런 비교로부터 직접 흘러나왔고, 대부분의 비교는 시간과 에너지의 쓸모없고 공포스러운 낭비에 불과했다.

우리들에게 아버지요 어머니인 우리 하느님은 비교하지 않는다. 절대로. 머릿속에서는 이것이 진리라고 알고 있어도, 나의 온 존재를 다하여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아직도 매우 어렵다.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아들 혹은 딸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 나의 즉각적인 응답은 다른 아이들이 덜 인정받고 덜 사랑받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나는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이 어떻게 다 그분의 좋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은 다 그렇다. 세상에 있는 나의 자리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들여다 볼 때에, 나는 재빨리 하느님을 위대한 천체 세계의 득점 게시판을 지키는 존재쯤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합격점에 도달하지 못할까봐 항상 두려워한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되면 곧, 거룩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 사랑은 전혀 비교하지 않고 모든 여성과 남성들을 그들의 고유한 모습대로 맞추어 사랑한다.

너무 어려운 과제, 비교없는 사랑

큰 아들은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고 질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므로 큰 아들이 거부당했다고 느끼지 않도록 잔치를 연기하는 일을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비교하지 않는 어머니다운 사랑의 진리가 나의 마음을 적시도록 할 수 있다면, 수많은 나의 정서적 문제들이 햇빛에 눈이 녹듯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대해 성찰할 때에 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명백하게 깨닫는다. 포도밭 주인이 단지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과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마태 20,12) 사람들에게 똑같은 임금을 지불한 비유를 읽을 때마다, 내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분노의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왜 포도밭 주인은 오랫동안 일한 사람들에게 먼저 임금을 주고 나중에 늦게 온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표현함으로써 그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는가? 대신 포도밭 주인은 왜 오후 다섯 시에 온 일꾼들에게 먼저 임금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 기대를 하게 만들고 불필요한 회한과 질투를 일으켰는가? 이제 나는 깨닫는다, 이런 모든 질문들은 하느님 나라의 고유한 질서를 납득하지 못한 채 세속적 경제의 잣대를 하느님 나라에 강요하는 데서 나는 관점임을.

일찍 온 사람들이 늦게 온 사람들에 대한 주인의 후한 처사에 기뻐하기를 포도밭 주인이 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전에는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포도밭 주인은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한 사람들이 그들의 주인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에 깊이 감사하고 주인이 관대한 사람임을 보게 되어 더욱 더 감사해할 것이라는 추측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떠오른 적은 없었다.

비교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180도 내적인 전향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사고방식이다. 하느님은 그분의 백성을 한 가족의 자녀들로 바라본다. 자녀들은 가족 안에서 오로지 작은 일을 할 뿐이지만 많은 것을 성취한 다른 구성원들과 똑같이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라

하느님은 그분의 포도밭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든 사람들이, 짧은 시간을 보내든지 긴 시간을 보내든지, 똑같은 관심을 받을 때 모두 큰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다. 참으로, 하느님은 자녀들이 그분의 현존 안에서 모두가 너무 행복하므로 서로 비교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만큼 천진난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오해하는 연인에게 당황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하느님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은 나와 하루 종일 있었고, 나는 당신이 청한 모든 것을 주었소! 그런데 왜 그렇게 투덜댑니까?” 질투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똑같은 당황스러움으로 이렇게 말한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다.”

여기에 회심에의 위대한 초대가 숨겨져 있다: 나 자신을 낮은 자기 평가의 눈으로 보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초대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적은 임금을 주고 나에게서 가장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땅주인이요 아버지로 계속 생각하는 한, 나는 동료 일꾼들이나 나의 형제자매를 향해 질투하고 회한을 품고 원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내가 하느님의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하느님을 고정관념을 가진 땅주인이나 가부장의 비전이 아니라 자녀들이 얼마나 잘 행동하는지 계산하지 않는, 그저 모든 것을 다 주고 용서하는 아버지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때에 나는 나의 유일하고도 참다운 응답이 깊은 감사가 될 수 있음을 재빨리 깨닫는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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