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늙어서 아름답다...하느님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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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늙어서 아름답다...하느님의 손길
  • 헨리 나웬
  • 승인 2019.05.0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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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22] 아버지-1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루카 15,20. 22. 28. 31)

렘브란트의 '아버지'..영적인 것이 육에서 나온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 앉아 깊이 몰입하고 있을 때, 많은 관광객들이 곁을 지나갔다. 그들은 그림 앞에서 1분도 채 머물지 않았지만, 거의 모든 안내자들은 그 그림을 자비로운 아버지에 관한 그림이라고 묘사했으며, 렘브란트의 마지막 작품들 중의 하나라고, 고통의 삶을 살고 난 후에만 그릴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이것이 그림에 관한 설명 전부이다. 그림은 거룩한 연민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돌아온 아들>이라고 부르는 대신, “자비로운 아버지의 환영”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돌아온 아들보다 아버지에게 더 무게가 실린다. 비유는 참으로 “아버지의 사랑의 비유”이다. 렘브란트가 아버지를 그린 방식을 보면서, 나는 부드러움, 자비, 그리고 용서에 관한 새롭고도 내적인 이해를 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무한하고 자비로운 사랑이 이와 같이 통렬하게 표현된 적이 있었는가 싶다. 아버지 모습의 모든 섬세한 부분 – 얼굴 표정, 자세, 옷 색깔, 그리고 무엇보다 손의 평온한 자태 – 들은 처음부터 존재했고 영원히 존속할 인간에 대한 거룩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함께 오고 있다: 렘브란트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 인간의 이야기, 그리고 하느님의 이야기가. 시간과 영원이 교차 한다. 다가오는 죽음과 영원한 생명이 서로 만난다. 죄와 용서가 포옹한다. 인간과 거룩한 존재가 하나가 된다.

렘브란트의 아버지의 초상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주는 것은 가장 거룩한 존재가 가장 인간적인 모습 안에 붙잡혀 있다는 점이다. 나는 콧수염과 갈라진 턱수염에 눈을 반쯤 뜨고 있는 노인이, 금실로 수놓은 겉옷과 짙은 홍색 망토를 입고 뻣뻣한 큰 손을 돌아오는 아들의 어깨 위에 놓고 있는 장면을 본다. 이것은 매우 특별하고 구체적이며 묘사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렇지만 또한 나는 무한한 연민, 무조건의 사랑, 영원한 용서 – 거룩한 실재들 – 가 우주의 창조주인 아버지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본다. 여기에서 인간적인 것과 거룩한 것, 연약한 것과 강력한 것, 늙음과 영원한 젊음이 충만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 렘브란트의 천재성이다. 영적인 진리가 완전하게 육화되었다. 폴 보디케가 썼듯이: “렘브란트에게 영적인 것은 … 가장 강력하고 가장 찬란한 영적인 것의 강조는 육으로부터 나온다.”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렘브란트의 평생 소원 "늙고 싶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하기 위하여 렘브란트가 거의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을 선택한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확실히 예수님이 말했던 비유와 수세기 동안 그 비유가 해석되어 왔던 방식은 하느님의 자비가 충만한 사랑을 그리는 데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나는 렘브란트가 그 고유한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이야기 덕분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폴 보디케는 말한다: “젊었을 때부터, 렘브란트는 다만 한 가지 소명 밖에 없었다. 그것은 늙는 것이었다.” 그리고 렘브란트가 항상 나이든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렘브란트는 젊었을 때부터 노인을 판화로 만들고, 유화로 그렸다. 그리고 점점 더 노인들의 내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렘브란트의 가장 탁월한 초상화는 노인들의 초상화이고, 가장 흥미로운 자화상도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그린 것들이다.

집과 작업세계에서 많은 시련을 겪은 후, 렘브란트는 앞 못 보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끌렸다. 작품 속의 빛이 내면화되어가면서, 그는 앞 못 보는 사람들을 ‘실재를 보는 사람들’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토비트와 거의 맹인이 된 시메온에게 매력을 느꼈고, 그들을 여러 번 그렸다.

렘브란트 자신의 삶이 노년기의 그늘을 향해 움직이고, 성공은 쇠퇴하고, 삶의 외적인 광채가 사그라지자, 그는 내적인 삶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더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결코 죽지 않는 내적인 불길로부터 나오는 빛을 발견한다. 그것은 사랑의 불길이었다. 그의 예술은 더 이상 볼 수 있는 것을 “움켜쥐고, 정복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예술가의 고유한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불길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렘브란트의 고유한 마음은 아버지의 고유한 마음이 된다. 수 년 동안 예술가의 고통 받는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자라난 내적이고 빛을 주는 사랑의 불길이 돌아오는 아들을 환영하는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타오른다.

아버지의 손은 아버지의 내적인 눈

나는 이제 왜 렘브란트가 비유 이야기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는지 이해한다. 성경에서 루카 사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작은 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삶의 초기에 렘브란트는 이 사건을 온갖 극적인 움직임이 가득 찬 모습으로 그리고 동판에 새겼다. 그러나 죽음에 가까이 가면서, 렘브란트는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내적인 눈으로 아들을 알아보는 매우 평온한 아버지를 그리기로 선택한다.

돌아온 아들의 등을 만지는 아버지의 손은 아버지의 내적인 눈의 도구 같이 보인다. 거의 앞을 볼 수 없는 아버지는 멀리 그리고 넓게 본다. 아버지의 바라봄은 영원한 바라봄이고, 모든 인간에게 뻗치는 바라봄이다. 그것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남녀들의 잃어버림을 이해하는 바라봄이요, 집을 떠나기로 선택한 사람들의 고통을 무한한 연민으로 알고 있는 바라봄이요, 그들이 불안과 고뇌에 사로잡힐 때 온통 눈물로 울부짖는 바라봄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들을 집으로 데려오려는 무한한 염원으로 타오르고 있다.

아, 아버지는 얼마나 그들에게 말하고 싶어 하고,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싶고, 그들이 다른 곳에서 찾고 있는 모든 것을 집에서 찾을 수 있다고 확신시켜 주고 싶어 했는가! 아버지는 아버지의 권위로 그들을 얼마나 말리고 싶어 했으며, 그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그의 곁에 가까이 두고 싶어 했을까.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위대하기에 그 모든 것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사랑은 강요할 수도, 구속할 수도, 떠밀 수도, 잡아당길 수도 없다. 아버지의 사랑은 그 사랑을 우리가 거부하거나 되갚을 자유를 준다. 거룩한 사랑의 무한함이 바로 거룩한 고통의 원천이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 하느님은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되기로 선택한다.

자유를 주며 고통받는 아버지

아버지로서, 그분은 자녀들이 자유롭기를, 자유롭게 사랑하기를 원한다. 그 자유에는 자녀들이 집을 떠날 가능성, “먼 나라”로 가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가능성까지 포함된다. 아버지의 마음은 그러한 선택으로부터 올 모든 고통을 알고 있으나, 그분의 사랑은 그것을 막기에는 그분을 너무나 무기력하게 만든다. 아버지로서, 그분은 집에 머무는 자녀들이 그분의 현존을 즐기고 그분의 애정을 경험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분은 오로지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을 주고자 할 뿐이다. 그분은 자녀들이 입으로만 섬길 때에도 말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이 그분에게서 멀어질 때에도(마태 15,8; 이사29,13) 말없이 고통 받을 뿐이다. 그분은 그들의 “기만적인 혀”와 “불충실한 마음”(시편 78,36-37)을 알고 있으나, 그분의 참다운 아버지됨을 잃으면서까지 그들이 그분을 사랑하게 할 수 없다.

아버지로서, 그분이 자신에게 주장하는 유일한 권위는 연민의 권위이다. 이 권위는 자녀들의 죄가 그분의 마음을 찌르도록 놔두는 것에서 온다. 그분의 마음에 엄청난 슬픔을 일으키지 않는 잃어버린 자녀들의 욕망, 탐욕, 분노, 원망, 질투, 복수는 없다. 슬픔은 너무나 깊다. 아버지의 마음은 너무나 순수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모든 인간의 슬픔을 포옹하는 깊은 내적 자리로부터,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내닫는다. 그분의 손길은 내적 빛을 방사하면서 오직 치유만을 추구할 뿐이다.

여기에 내가 믿고 싶은 하느님이 있다: 창조의 시작부터 자비로운 축복 속에 팔을 뻗치는 아버지,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항상 기다리기만 하는 아버지, 실망 때문에 팔을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으며 다만 자녀들이 항상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아버지, 그리하여 그들에게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고 피곤한 팔을 그들의 어깨 위에 얹을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 그분의 유일한 갈망은 축복하는 것이다.

축복한다는 것은 “좋은 것을 말한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소리보다 만짐으로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그들을 벌주고 싶은 의도가 없다. 자녀들은 이미 자신들의 내적 혹은 외적 이탈로 과도하게 벌을 받아왔다. 아버지는 다만 그들에게 온갖 왜곡된 방법으로 그들이 찾고 있는 사랑이 지금도 그리고 항상 그들을 위하여 집에 있다고 알려주고 싶을 따름이다. 아버지는 입으로 보다 손으로 말하고 싶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 아버지는 목자이시다, “당신의 가족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신다”(이사 40,11).

하느님의 손길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진정한 중심은 아버지의 손이다. 손에 모든 빛이 집중되고 있다. 손에 방관자들의 눈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손에서 자비가 육화되고 있다. 손에서 용서, 화해, 치유가 함께 한다. 그리고 손을 통하여 피곤한 작은 아들뿐만 아니라 지친 아버지도 휴식을 얻는다. 시몬느의 사무실 문에서 처음으로 포스터를 본 순간부터 나는 이 손에 이끌렸다. 왜 그랬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차차 나는 이 손들을 알게 되었다.

손들은 내가 잉태된 순간부터 나를 붙잡고 있었고, 내가 태어날 때 나를 환영했으며, 나의 어머니의 가슴에 가까이 안아 주었고, 나를 먹이고 나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손들은 위험한 때에 나를 보호해 주었고 슬플 때에 나를 위로해 주었다. 손들은 나에게 이별을 알려주었고 돌아올 때 항상 환영해 주었다. 이 손들은 하느님의 손이다. 또한 손들은 나의 부모, 선생, 친구, 치유자, 그리고 내가 얼마나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지 알려 주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나에게 준 모든 사람들의 손이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그 축복하는 손을 그린 후 얼마 안 되어 죽었다.

렘브란트의 손은 수많은 인간의 얼굴과 인간의 손을 그렸다. 마지막 작품 중 한 그림에서 그는 하느님의 얼굴과 손을 그렸다. 이 실제 크기만 한 하느님의 그림에 누가 포즈를 취했을까? 렘브란트 자신일까?

<돌아온 아들> 그림의 아버지는 자화상이지만, 전통적 의미의 자화상은 아니다. 렘브란트 자신의 얼굴은 몇 가지 그의 그림에 나타난다. 사창가의 탕자 모습으로, 호숫가의 겁먹은 제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 위에서 내리는 사람의 모습으로. 그렇지만 그림에 반영되어 있는 것은 렘브란트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다. 수많은 죽음으로 고통을 겪은 아버지의 영혼이다.

63년의 생애 동안, 렘브란트는 사랑하는 부인 사스키아, 세 아들들, 두 딸들, 그리고 함께 살았던 두 여인의 죽음을 보았다. 사랑하는 아들 티투스는 26세에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고, 그 슬픔은 결코 묘사된 적이 없으나,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에게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렘브란트는 그의 길고도 고통스러운 삶의 투쟁 속에서 그 모상의 참다운 본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온유하게 울면서 그의 깊게 상처 입은 아들을 축복하고 있는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 노인의 모습이다. 렘브란트는 아들이었고, 아버지가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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