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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많은 거룩한 교회 "지금 사랑한다고 말하라"롤하이저의 <거룩한 갈망> 강독-3
사진=한상봉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그러니 왜 우리에게 교회가 필요할까?”

한국교회의 경우에 이런 저런 이유로 주일미사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신자들의 비중이 작아지고 있다. 이따금 미사에 참석하는 인원들을 포함해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교인들은 심지어 전체 등록 신자의 75%라는 통계지표도 나와 있다. 물론 서울 강남지역처럼 등록신자의 35~50%가 참석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물론 이들 열심하지 않은 신자들의 경우에도 여전히 ‘종교란’에는 ‘천주교’라고 기입하며 소속감을 표시하는 경우도 많지만, 굳이 다시 성당에 나가야겠다는 작심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이를 두고 롤하이저는 “하느님에 대한 추구, 도덕적 인도,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성에 관한 표현을 그리스도교 교회의 영역 밖에서 하려고 한다”고 표현했다. 왜 그럴까?

롤하이저는 교회가 복종을 요구하고, 이런 교회에 관여하는 것은 ‘영적 미성숙’으로 이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교회가 저지른 역사적 범죄로 인해 교회를 기피하게 된다는 분석도 한다. 사람들은 교회가 타협에 젖은 기관이고,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으며, 그래서 더 이상 하느님의 은총을 중재하는 기관이 아니라고 여긴다.

한편 다른 분석도 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에 대한 분노나 난해한 교리 때문이 아니라, 개인주의와 무관심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에 관하여 그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신자들이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 같은 휴식을 취할 뿐, 이것저것 요구하는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 취향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거룩한 갈망>에서 다음 다섯 가지로 교회의 정체성을 정리했다. 

사진=한상봉

"교회는 사도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교회건물, 사제와 주교와 교황들, 조직과 기관, 혹은 도덕률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갈라진 형제들이 모이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그분 주위로 사람들을 모으셨고, 그들에게 말씀과 영과 성찬례를 남기셨다. 그분을 중심으로 모인 사도들의 공동체가 곧 교회다.

1. 차이를 넘어 일치하는 공동체 

교회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예수님 주위에 모였던 제자들은 배경과 기질이 서로 다른 개인들이었다. 서로 비전도 다르고 서로 질투하고 분노했다.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 서로 사랑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서로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유다가 예수를 배신했다면,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유일하게 유다지방 출신이었던 유다는 제자들 가운데 왕따였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돈주머니를 관리하고 있었으니 제자들 사이에서 그리 인기가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회는 자신과 매우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손을 잡으며 같은 말씀을 듣고 같은 신앙고백을 하며, 같은 빵을 나누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차이점 사이에 다리를 놓는 공동체이다.

2. 세상에 개방된 존재 

교회는 두려움과 외로움 안에 웅크리고 있는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두려움과 외로움 때문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다. 이들이 모여서 세상에 대적하는 공동체는 더더욱 아니다. 실제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 때문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그들은 “방을 뛰쳐나와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간다. 그들은 서로 다시 보지 못하지만 진정한 의미가 공동체가 된다.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하나가 된다.

3. 타인과 더불어 영원을 나누는 공동체

교회는 심리적 차원의 가족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무엇인가 채우려한다. 심리적 결핍감을 채우고 누군가와 친밀감을 느끼고 싶어한다. 그러나 “연인을 구하기 위해 교회에 가서는 안 된다.” 교회는 친밀감보다 영원을 함께 나누려는 운명공동체이다.

4. 다양성 

한 지붕, 한 인종, 한 종파, 하나의 규범, 혹은 하나의 공동기도를 하는 집단이 아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피부색으로 다양한 기도를 드린다 해도 사도적 공동체가 될 수 있다.

5. 형제애 

교회는 공통의 과제와 사명을 가졌다 해서 완결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주위에 함께 모이고 그분의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의미를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것, 즉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살고, 돈과 재산을 공동으로 나누는 수도원 전통이 발달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언제나 몇몇 사람들만을 위한 특별한 소명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굳이 한 지붕, 한 지갑을 요구하는 것은 ‘형제애’에 대한 요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한상봉

"교회는 끈이다-즉, 세례와 강제징집이다"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축성되는 것”이며 세상에서 “퇴거당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세례는 우리를 축성하는데, 그 축성은 우리가 오히려 가고 싶지 않은 곳, 다시 말하자면 고통을 통하여 우리가 성숙하게 되는 그런 자리로 우리를 데려가는 강제적인 끈이다.

축성(봉헌)이란 “일상의 용도에서 따로 떼어놓는 것”이다. 보통의 잔이 성배가 되도록 따로 떼어놓고, 보통의 식탁이 제대가 되도록 따로 떼어놓는 것이다. 보통 건물이 교회가 되도록 하고, 보통 사람이 수도사가 되도록 떼어놓는 것을 말해 왔다. 더 나아가 축성이란 예전과 다르게 축성된 의미 그대로 행동함을 뜻한다.

교회(ekklesia)는 그리스어 ‘ek’(바깥으로, ~에서 나오는) + ‘kaieo’(부른다)의 합성어이며, 그렇다면 교회는 “~에서 나오도록 요청한다”는 뜻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세례, 축성 등을 통해 일상적인 안건에서 나오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아이를 양육하는 동안 부모들은 축성과 봉헌과 세례의 의미를 살고 있다. 부모는 자식을 낳으면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생활방식, 직접, 취미, 외식, 휴가, 여행 등 수많은 희생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들의 아이들은 베드로 앞에 선 예수님처럼 매일 부모들 앞에 서서 이렇게 묻는다. “당신들은 나를 사랑해요?”

"교회는 살이다-그리스도의 결함 있는 지체이다"

죄, 소심함, 배신은 늘상 은총, 거룩함, 그리고 충실함 옆에서 발견된다. 예수님이 두 범죄자 사이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던 것처럼,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지평선 상에 함께 있다.

모든 인간 가족들과 기관, 조직들은 다 결함을 지니고 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오래된 개신교의 격언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죄인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죄가 도대체 무엇인가가 관건이다.”

이 관점은 교회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느님은 십자군 전쟁에서 수많은 무리한 사람들을 살해했던 기관 안에서, 종교재판을 하느님의 도구로 악용했던 기관, 수세기 동안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묵인했던 교회, 그리고 수많은 종교전쟁, 사악한 침묵 그리고 맹목적인 제국주의에 빠졌던 역사를 지닌 교회에서 참으로 발견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아왔는가? 과거의 치욕스러운 역사와 현재에도 계속되는 불미스러운 행위를 본다면 교회가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교회는 항상 두 도둑들 사이에 매달려 있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교회가 얼마나 나쁘게 복음을 배반했고 오늘날에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무도 놀라거나 충격을 받아서는 안 된다. 교회가 매우 잘했던 적은 절대로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도 교회가 했던 선에 대해 부정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은총을 중재했고, 성인들을 배출했으며 이 지상에 하느님이 머무는 집을 마련해 왔다.

교회와 관련을 맺는 것은 곧 건달, 전쟁광, 사기꾼, 아동 성추행자, 살인자, 간음자, 위선자 등 온갖 종류의 인간 군상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교회는 동시에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 모든 인종과 성별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성인들 그리고 영웅적 영혼을 지닌 훌륭한 사람들을 알게 해준다.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최악의 죄와 영혼의 가장 위대한 용기라는 두 옷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다.

이태리의 위대한 영성작가 까를로 카레또는 저서 <나는 구했고 찾았다>에서 교회의 이런 모습을 훌륭하게 짚어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비판해야 하는지,
나의 교회여 그럼에도 나는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당신은 그 어떤 사람보다 나를 괴롭게 하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 당신에게 더 빚지고 있다.
나는 당신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싶어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현존하기를 얼마나 바라는가.
당신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스캔들을 보여주었는가.
그럼에도 당신 홀로 나에게 거룩함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해준다.
이 세계에서 당신보다 더 타협적이고 더 거짓인 것을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보다 더 순수하고 더 관대하며 더 아름다운 것을 만나본 적이 없다.
수를 셀 수 없이 나는 당신의 면전에서 내 영혼의 문을 쾅 닫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매일 밤 나는 기도하고 당신의 확실한 품속에서 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비록 완전하게는 아니어도 내가 당신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또 다른 교회를 세워야 하나?
그러나 나는 똑같은 결함이 없는 교회를 세울 수 없다.
그 결함은 바로 나의 결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시, 내가 다른 교회를 세우게 된다 해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나의 교회가 될 것이다.
아니다. 나는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만큼 안다!

사진=한상봉

"교회는 많은 방이 있는 집이다"

교회가 되는 특징들 중의 하나는 보편성이다. 보편성이란 개신교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도들도 가톨릭(보편성으로서) 정신을 중시한다. 본래 개신교 개혁자들의 “저항”은 교황과 로마 가톨릭주의에 대한 저항보다 하느님을 위한 저항, 하느님과 그분의 거룩하심에 대한 증언을 의미하며, 하느님의 마음이 지닌 보편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가톨릭적인 것의 의미는 예수님이 “나의 아버지의 집에는 방이 많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천국의 어떤 지리적인 여건이 아니라 하느님 마음의 광대함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하느님의 품은 제한이 없고 게토가 아니다. 하느님은 가톨릭적인 마음을 지니신다. 여기에서 가톨릭은 전 우주적이고 넓으며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반대말은 근본주의, 단지 방이 하나밖에 없는 마음의 소유자이다.

따라서 교회공동체의 건강한 일원은 한편으로 경계를 긋기도 하고 또한 자유를 강조한다. 한편으로 교의를 믿고 또한 개인적인 양심을 강조하며, 합법적인 제도 권위가 선물이며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인 카리스마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서품받은 사도직 수행자들의 역할과 또한 모든 사람들의 일반 사제직분을 인정하고, 지역 공동체의 필요성과 또한 더 큰 보편 교회의 필요성을 함께 강조한다.

천부적 재능을 지닌 예술가들이 교회 공동체에 기여하고 또한 가장 가난한 이들이 기여하는 것 모두를 강조한다. 진보적인 것과 보수적인 것, 낡은 것과 새것, 현재 살아있는 교회 구성원들의 말과 이미 죽었지만 아직도 생동감 있는 일치 안에 만나는 이들의 말을 다 강조한다. 교회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이것들 중에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를 선택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처럼, 우리도 마음속에 많은 방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잔치상이다"

교회는 또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서로 기름을 부어주기 위하여 가는 장소이다. 교회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사건은 베타니아에서 마리아라고 하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날 저녁 예수님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그 식사는 꽤 화려했던 것 같다. 그러나 평판이 안 좋았던 한 여인이 비싼 향유를 들고 나타났다. 여인은 병을 깼다­. 낭비가 심한 행동이었지만 그가 예수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으며 그런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보이고 싶었는지 선명하게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나서 여인은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그 향은 온 방에 가득찼다. 마침내 여인은 울음을 터뜨렸고 예수의 발을 자신의 눈물로 씻고 머리로 닦아드렸다.

사랑을 이처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장면을 그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 솔직함이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함께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해 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노골적이고 솔직한 선물, 즉 화려하게 감사에 넘치는 모습으로 품고 있는 사랑을 표현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전적으로 두둔하면서 불편해하고 반대의사를 표현한 손님들에게 말한다: “그 여인은 좋은 일을 하였다.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 여인은 다가오는 나의 죽음에 대비하여 나에게 향유를 부어준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이 여인이 도와 주었다고 말한다.

예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될 때 나는 오늘 밤 때문에, 살아오는 동안 보낸 모든 밤들 중에서 특히 오늘 밤 때문에, 죽음에 대해 더 준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왜 우주가 생겨났는가를 경험하였다. 그것은 사랑과 애정을 순수한 선물로 주고받는 것이다.”

아마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애정과 향유를 부었다면 별 문제가 아니고 칭송을 받기까지 했을 것이다. 문제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에게 그런 애정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장례식 때까지 가장 좋은 칭찬의 말과 꽃을 미루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도전은 우리가 아직 살아있을 때에 서로에게 향유를 부어주라는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장례식에서가 아니라, 사랑과 꽃을 부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도 주는 한 가지 교훈이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교회건물에서든 집의 부엌식탁에서든 향유를 서로에게 부어주면서 사랑과 애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한데 불러모으는 것이다. 이 이유 하나 만으로도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충분한 설명이 된다.

우리가 교회에 가는 이유는 홀로 있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즐거움과 고통을 나누고, 일상을 나누고, 삶의 중요한 전환기를 나누고, 생일에 함께 있기 위하여, 주일날, 성탄절기, 부활절기, 새해와 어버이날에 함께 있기 위하여 가는 것이다. 이처럼 향유를 서로에게 부어주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

이런 이유는 전혀 추상적인 이유가 아니다. 함께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 이것이 교회에 나가는 더 암묵적인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바라건대 그들도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기를 바란다. 결국 서로가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우리는 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가톨릭일꾼 기사는 상업적 용도 아니라면 출처를 밝히고 누구나 퍼갈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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