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생활의 네 가지 불기둥…기도, 사회정의, 따뜻한 마음,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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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의 네 가지 불기둥…기도, 사회정의, 따뜻한 마음, 공동체
  • 한상봉
  • 승인 2016.12.03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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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하이저의 <거룩한 갈망> 강독-1

로날드 롤하우저가 지은 <거룩한 갈망>은 우리가 그리스도교 영성을 말할 때, 그 갈망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거룩함”이다. 이러한 생각을 롤하우저는 괴테의 시 ‘거룩한 갈망’에서 가져왔다.

나는 참으로 살아있는 것을 지향하노라,
그것은 죽을 때까지 타오르는 것을 동경하기에...
이제 더 이상 암흑의 그늘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더 고귀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대를 높이 치닫게 하리니.
어떤 먼 거리도 그대를 주춤거리게 하지 못하니,
이제 마술에 걸린 것처럼 날아가 이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빛에 사로잡힌 그대는 나비가 되어
영원히 사랑으로 가버릴 것이니.”

사진=한상봉

영성이란, 욕망이 흐르는 방식

갈망이라 해도 좋고, 욕망이라 불러도 좋겠다. 영성은 이러한 불같은 갈망에서 시작된다. 롤하우저는 이를 두고 ‘광기’라는 표현도 쓰고 있다. 영성이란 “교회에 나가냐 안 나가냐는 문제가 아니라 매일밤 우리가 잠을 잘 자느냐 못 자느냐의 문제”라고 말한다. 결국 영성이란 우리의 욕망(갈망, 에로스)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이다. 즉 우리 안에서 분출하는 에너지의 방향을 어디로 돌리느냐의 문제이다.

마더 데레사는 강력한 에너지의 사람인데, 그는 이 강력한 에너지를 훈련하여 하느님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는 것 한 가지만 소망했다. 키르케고르는 “성인은 단 한 가지만을 소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것은 거룩한 갈망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더 데레사처럼 가난한 사람을 원할 수 있지만, 다른 욕망도 남아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사실상 성인과 죄인, 고행과 인생의 단맛, 소박한 삶과 부자의 삶을 동시에 바라고 있다. ‘선택’이란 어느 하나를 단념해야 하는 것일 텐데, 그게 쉽지가 않다.

"다이애나 황비는 에로틱하면서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마더 데레사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지만, 지중해에서 멋진 휴가를 즐기고 싶어 했다. 가난과 영화를 동시에 누리고자 했던 다이애나 왕비는 모호한 도덕성을 살았다."

따라서 영성이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영(에너지)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에로스를 흐르게 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고, 선택한 삶의 원칙과 습관에 따라서 우리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은 통합되어 그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의 반대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더 이상 모르는 되는 사람”이다.

이런 영적 에너지를 다루는 주체는 영혼이다. 이 영혼은 “생명체의 고동치는 맥박”과 같다. 이 영혼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살아있고, 그것이 우리 몸을 떠나면 우리의 육신은 시체가 된다. 영혼이 있다는 것은 ‘통합된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혼을 잃어버리면 우리 존재는 분열되어 방황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그의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예수는 말했다. 부자가 된들 무엇하랴, 정신줄을 놓았다면.

사진=한상봉

건강한 영성을 방해하는 세 가지

1. 영적 에너지에 대한 이해 부족: 금기의 필요

모든 에너지, 특히 에로틱하고 창조적인 에너지는 우리가 쉽게 통제하기 어렵다. 때로 강압적이고 제멋대로 흐른다. 특히 예전부터 인간은 성적인 에너지와 종교적 에너지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수많은 성적-종교적 금기와 규칙을 만들어 왔다. 이것은 에너지 활동의 완충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이 에너지의 원천은 하느님이고, 그 에너지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궁극적으로 그분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고 믿어 왔다. 이를 ‘영원한 갈망’이라고 불러도 좋고, ‘거룩한 갈망’이라 불러도 좋겠다.

이러한 금기와 규칙에 묶여 사는 것을 갑갑하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인간은 때로 이러한 사회적 종교적 금기를 빌리지 않으면 에너지의 원천과 단절되어 우왕좌왕하고 우울증과 과대망상에 시달리게 된다.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불은 매우 강력하고, 우리가 조절할 수 있을 만큼 순순하지 않다. 이 에너지를 미숙하게 다루면 화상을 입고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도덕성이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불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경외감과 안전망과 금기와 중재가 필요하다.

2. 병적으로 바쁜 일상, 산만함과 불안함

자기중심주의는 마음의 고통을 낳고, 실용주의는 머리를 아프게 하며, 끊임없는 들썩거림은 불면증을 낳는다. 그래서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움직임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접촉할 시간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우리는 악하기보다 너무 바쁘고, 영적이지 않다기보다 마음이 딴데 쏠려 있다.”

3. 균형 상실로 인한 분열

통상 우리에게 하느님은 종교가 갖고, 성은 세속이 가져간다. 열정은 세속의 특징이고, 금욕은 종교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둘은 언젠가 다시 합쳐지기를 갈망한다.

현대인들은 신앙은 원하지만 교회는 원하지 않으며, 의문을 갖고 있지만 해답을 원하지 않으며, 진리를 원하지만 순종은 원하지 않는다. 슬프게도 일부 신자들은 교회는 원하나 신앙은 원하지 않고, 해답은 원하지만 의문은 원하지 않고, 전례는 원하지만 경건함은 원하지 않고, 순종은 원하지만 진리는 원하지 않는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언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더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라시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복종)

경건한 사람들은 진보적이지 않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경건하지 않다. 개인윤리와 사회정의, 행동과 명상, 정치와 신비에 모두 관심을 갖는 개인, 단체,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했다. ‘거룩한 갈망’으로서의 영성은 자신을 초월하는 이타주의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자신을 버리는 행위에 대해 현대인은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져 준 다음에, 그 대가로 그에게 청구서를 보내기 일쑤다.” 자신을 무상으로 내놓는 것과 ‘피해자’가 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덕행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하는 약하고 소심한 행동을 구분하지 못한다.

사진=한상봉

영성생활의 네 가지 불기둥

가톨릭신자로 인정받으려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기도하고 십계명을 지키며, 결혼과 낙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준수하며, 성인들의 통공과 공동체적 구원과 연옥을 믿으며, 금육과 단식, 자선, 묵주기도, 성지순례를 해야 한다. 그리고 1894년 레오 13세 교황이 <노동헌장>을 발표한 이후로는 사회정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편 개신교인으로 인정받으려면, 가톨릭의 신심행위 특히 성사를 믿지 않으며, 대신에 적극적으로 성경을 읽고, 비은둔적이며 개인적인 구원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술, 담배, 도박, 잦은 파티에 거부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게 신앙의 본질은 아니다.

세속사회는 그리스도교 영성을 계몽주의적으로 재단하며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가 요구하는 늙은 하느님”을 거부하였지만, 최근 세속사회는 종교인들이 질투할 정도로 사실상 종교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예술은 창조성을 종교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건강예찬은 유래가 없을 만큼 채식주의와 고행을 강요하고, 자연숭배 정령주의는 새로운 종교적 행태를 띠고, 신화와 동화가 성경의 오래된 이야기를 밀어낸다.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무덤 같은 새로운 성전(신전)이 생겨나고 일부 책과 인물들에 대한 ‘시성식’을 거듭한다.

하물며 한국사회에서는 화염병 대신에 촛불이 등장하면서 시민들의 집회가 ‘종교적으로’ 치러진다. 수많은 영성서적이 서점가에 쏟아져 내리고, “당신 내면의 불을 지펴라” “당신 안의 늑대와 화해하라” “이냐시오식 피정에 참가해 보라”는 권면이 기성종교와 상관없이 나온다. 사람들은 점차 개인적으로 또는 그룹으로 이런저런 명상모임에서 만나고, 종교간 차이와 상관없이 경계를 넘어서 타종교의 명상 프로그램에 참석한다.

그렇다면, 구태의연한 종교적 규칙과 넘쳐나는 영적 다원주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서 양도할 수 없는 요소는 무엇인가?

1. 개인의 기도생활과 도덕성

예수는 우리가 그분과 개인관계를 맺고, 또 그분을 통해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한편 우리가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잣대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 최고의 계명은 “이웃사랑”이라는 도덕적 요청이다.

2. 사회정의

성서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언급과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열 줄에 한 번씩 나온다. 루카복음서에는 여섯 줄에 한 번, 야고보서에는 다섯 줄에 한 번꼴로 나온다. 이사야 등 기원전 800년경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의 믿음을 “자기들 나라가 얼마나 정의로운지”로 가늠한다. 예언자들이 정의를 측정하는 기준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가장 약한 집단, 고아와 과부, 그리고 이방인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려 있다.

예수는 더 나아가, 스스로를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 또는 선택은 신앙의 빼놓을 수 없는 본질에 속한다.

3. 따뜻한 가슴과 정신

성인은 중요한 단 한 가지를 소망하는 자인데, 그 소망을 품게 된 동기가 중요하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선한 행동이지만, 나 자신의 분노와 죄책감, 떠벌리는 성향, 자기 이익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형처럼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증오심이 가득 찰 수도 있다.

옳은 일을 행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올바른 동기'다. 따뜻한 가슴(연민)에서 비롯된 일을 행하는 것이 ‘거룩한 일’이다. 우리의 사명은 분노나 죄책감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과 정의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영적 탐구의 끝에서 만나게 될 하느님은 잔뜩 긴장해 있고 증오심과 걱정, 신경질적인 모습을 지닌 분이 아니라 매우 평화롭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연민으로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4. 진정한 예배의 핵심적 요소인 공동체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경우에 우리는 개인이 만들어낸 환상에 바탕을 둔 신앙생활을 하게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진정한 회개를 위하여 실제 교회의 오물과 은총을 모두 체험해야 한다.” 영성이란 하느님의 얼굴을 공동으로 찾는 것이며,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가능하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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