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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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 한상봉
  • 승인 2016.12.1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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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하이저의 <거룩한 갈망> 강독-2

로날드 롤하우저는 <거룩한 갈망>에서 "영성이란 우리를 관통하는 광적인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에 대한 경배를 넘어서 그분을 본받는 삶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중심”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의미와 희망, 자기 이해, 교회생활, 신학과 영성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안내자이다. 그렇다고 복음서에 나오는 대로 예수가 한 말과 행동을 그대로 복사하듯이 따라 사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래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분을 경험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 말씀대로 “그분을 만나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손과 발

하느님은 역사적 예수로 존재하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육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살아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지금도 예수처럼 인간의 피부와 살로 덮혀서 걷고 계신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믿는 이들의 지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대신하거나 대변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1코린 12,27, 6,17)이라고 말했다. 말씀은 한 때 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던 것이 아니라 살이 되었고 계속하여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다. 믿는 이들의 지체 안에서, 그리고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은 여전히 육체적인 살과 피부를 갖고 육체적으로 보여지고 만져지고 들을 수 있고 맛볼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이 진실이라면, 오늘날 이 세상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은 결국 우리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예수가 하셨던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이 이 세상에 계속 현존하시도록 해야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너무나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손과 발, 입과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어느 성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중재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공동체가 선포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들릴 수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응답할 수 있게 하는 예수님의 권능은 공동체가 표현하지 않는 한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어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하여 했던 것을 공동체도 이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하여 한다.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때 행동하셨던 것처럼, 이제 그분은 당신 아들의 모습과 일치하고 아들의 모범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행동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유신론자와 다르다. 유신론자는 천국에 있는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은 천국에도 계시지만, 이 지상에 인간 존재 안에서 몸을 갖고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이 지상에서 구체적인 살을 갖고 계신다.”

사진=한상봉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
"내가 누군가 어루만질 때 하느님도 그를 어루만진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할 때, 이것은 예수와 성찬례, 믿는 이들을 통하여 기도한다고 여겨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이 (청원)기도에 대해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그리스도인 우리 역시 책임 있게 이 기도에 응답해야 한다. 단지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개입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유신론자들의 기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순히 하느님께 청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요청의 내용이 실제로 이루어지로록 우리도 노력해야 한다.

만일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낫도록 기도만 드리고 의사에게 가지 않는 것은 유신론자들의 기도이다. 나는 내 기도에 내 살을 덧붙여야 한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면서 마음속으로 나에게 상처 입힌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어떻게 이 지상에 평화를 가져오실 수 있을까? 롤하이저가 “우리의 기도는 그것을 지원해 줄 우리의 살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처럼 내가 누군가를 어루만질 때 하느님께서도 그를 어루만지실 것이다.

어떻게 치유할 수 있나?:
"예수와 믿는 이들은 하나이다"

예수는 지상에 사시는 동안 사람들은 단순히 그분을 만지고 또 그분께서 그들을 만짐으로써 치유되고 하느님과 화해하였다. 이처럼 신체적인 접촉이 중요하다. 복음서에서 하혈하던 여인은 아픈 사실을 말하기 전에 그분을 만졌다. 만지면서(접촉) 여인은 기본적으로 치유되었고, 그후 예수께 진실을 밝히던 순간에 완전하게 나았다. 치유에는 접촉과 대화가 요청된다.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이들을 만짐으로써 하느님의 치유와 온전함을 전파하도록 초대받았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 안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서로 함께 식탁에 앉음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다. 공동체와 접촉하면서 성실함과 통회의 마음으로 함께 하는 한 결코 지옥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힘으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계속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한, 그들을 계속 만지고 있는 한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사랑과 용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의 만짐은 그리스도의 만짐이다. 그리고 이런 계속적으로 만지는 “사랑은 지옥의 문 앞에까지 내려가고 그곳에서 죽은 이들을 구원한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한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고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바오로 사도)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 하느냐”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라는 대답을 들었다. 예수와 믿는 이들은 이처럼 하나로 존재로 동일시된다.

공동체 안에서 어울리기:
"예수의 몸은 살균된 몸이 아니다"

군중들이 예수를 결정적으로 부정하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식인주의에 대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예수를 거부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예수는 자신의 몸을 자칭할 때 ‘sarx’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몸’을 뜻하는 ‘soma’와 ‘sarx’는 용법이 다르다. soma는 매력적이고 건강하며 덕을 행하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날 때 사용한 말이다. 그러나 sarx는 병들거나 악취가 나는 몸이다.

예수는 sarx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단순히 그분이 죄없고 천국에서 영광으로 들어올려진 몸, 또한 교회에서 나누어지는 살균되고 하얀 성체로 표현되는 몸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먹도록 요청되는 몸(sarx)는 결점투성이의 지체들이다. 완벽하지 못하고, 용서도 잘 못하는 흠결 많은 이들과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맺지 못하면 완전하고 사랑이 넘치며 이해가 풍부한 하늘의 하느님과도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말이다. 보이는 가족과 어울리기를 거부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도 어울릴 수 없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언사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에게 저항감을 느꼈다.

“하늘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지상의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면 보이지 않는 그분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완전한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려면 지상의 불완전한 가족을 우회할 수 없다.” 유신론자들이 믿는 것처럼 하느님은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열심한 그리스도인이고, 성실하며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지만, 교회는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인간적 약점과 그것들이 가져오는 긴장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 체험

유신론자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살을 입으신 하느님은 묵상과 수도원에서도 발견되지만, 먼저 무엇보다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발견된다. 육화의 하느님은 일상에서 발견되기 쉬운 분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누구든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할 때, 이 사랑은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라 일상의 흐름 같은 사랑이다. 사랑이시고 가족이며 공동체이신 하느님,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하느님은 무엇보다 우리집에서, 공동체에서, 식탁에서, 일출 때에 우리의 기쁨과 논쟁 가운데에서 발견되는 분이다.

그렇게 살이 되신 하느님은 일상의 평범한 느낌들을 통하여 경험되는 하느님이다.

사진=한상봉

사명 이해하기: 하느님의 연민과 사랑을 반사하는 것

우리의 과제는 예수가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의 모습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연민과 사랑을 반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들이 불림을 받게 되면 하느님은 흥미로운 의식을 치르게 하시는데, 그들은 성서 두루마리를 실제로 먹도록 요청받는다. 이것은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소화하여 자신들의 살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은 양피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장 폴 싸르트르는 40세 이후에 우리의 얼굴은 유전자적 특질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불안하고 소심하며 이기적이고 회한에 잠겨 있으며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남아 있으면 나의 얼굴은 그것을 보여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따듯하고 자애로우며 겸손하고 타인 중심적일 때 나의 얼굴은 그대로 그것을 표현할 것이다.

말씀은 살이 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성찬례의 빵을 변화시키는 것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얼굴을 거듭 변화시킨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 같다고 했다. 그분의 가르침이 우리를 내면에서부터 변화시키도록 허용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소화시키면서 우리는 신체적인 보습에서도 달라져야 한다. 이처럼 하느님을 전하는 사명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리의 모습이 침묵 중에 하느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나서, 어떻게 그들을 만날까?

첫 번째 부활절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찾아 갔을 때,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왜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들의 영혼이 만개했던 상황 속에 우리가 참여할 때, 우리는 죽어서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이 항상 살았던 곳에 살고 있으며,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그들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 역시 죽고 나서, 이미 고향인 갈릴래아로 돌아갔다고 천사도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무한한 생명과 연민의 풍요로움을 살았던 그들처럼 우리가 몰두하여 살아갈 때, 우리는 그들을 다시 만나고 관계를 맺게 된다. 이처럼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현존을 원한다면 그가 행했던 독특한 방식의 사랑, 믿음, 덕행 속에서 그를 찾아야 한다.

당신의 어머니가 환대하는데 탁월하셨다면, 당신이 누군가에게 환대를 행할 때마다 어머니를 뵙게 될 것이다. 친구가 열정적으로 정의를 위해 살았다면, 당신 자신이 정의에 대한 갈망으로 투신할 따마다 그를 다시 만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 그들과 다시 만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황지우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내 몸으로 살아감으로써, 그분을 마중나가야 한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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