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없는 힘은 폭력, 정의 없는 사랑은 헛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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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없는 힘은 폭력, 정의 없는 사랑은 헛소리
  • 한상봉
  • 승인 2016.12.27 16: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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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하이저의 <거룩한 갈망> 강독-4

연민 없는 힘은 폭력이며
정의 없는 연민은 단순한 감상일 뿐이고
사랑 없는 정의는 맑스주의이다.
그리고... 정의 없는 사랑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쉰 추기경

정의롭게 행동하기 - 위대한 의무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이다. 즉, “정의롭게 행동하고 부드럽게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거니는 것”(미가서 6,8)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사회정의를 위하여 일하라는 초대는 기본적이고 양보할 수 없는 기둥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개인차원의 자선을 넘어선다. 체제의 변화를 요구한다”

개인차원의 자선은 집 없는 이들, 상처받은 이들, 죽은 이들을 도우려고 하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정의는 이렇게 고통받는 이들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발견하고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정의는 개인차원의 자선과 다르다. 자선은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나 정의는 모든 이가 빵을 가질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자선은 이웃을 존중하며 대하는 것이고 정의는 인종차별의 더 깊은 뿌리에 닿으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자선은 전쟁의 구체적인 희생자들을 돕는 것이고 정의는 궁극적으로 전쟁을 도발시키는 세상 문제들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자선은 몇몇 부자가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기부하며 달래는 것이고, 정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한데 왜 한 사람이 그렇게 부자일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뿌리는 어떤 개인의 사적인 죄나 사사로운 부적절함보다 거대하고 맹목적인 체제, 본래 불공평한 어떤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불의들은 개인들이 나쁜 신앙에서 행동하거나 자선의 마음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거대하고 비인격적인 체제(개인들이 그 안에 살고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가 어떤 이들은 학대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부당한 특권을 주기 때문에 생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정의 분야에서 정의한 체제적 불의와 체제적 폭력이다.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이상 속에서는 공평한 체제이지만, 현실에서는 민주주의 역시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이 체제에서도 역사적 특권, 강력한 목소리, 값진 재능을 더 가진 이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 약한 소리들, 별로 값이 안 되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은 결국 사회적 고리의 밑바닥에서 전전한다. 그러므로 자유방임적 만주주의가 가난한 이들에게 거의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페드로 아루페 전 예수회 총장은 과거 수많은 성인들과 영성작가들이 사회정의문제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분명한 표현이 없었으나, 오늘날 사회정의에 대한 강조가 많이 증가된 이유는 사람들이 상황을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개인적인 삶 속에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사생활을 산다고 해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덕, 관대함, 도덕과는 거리가 먼 사회체제에 참여하고 그것을 유지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아무리 성실하게 이웃을 돌본다 해도 현재의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교회체제가 많은 이들에게 불공평하고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통찰해보면, 우리의 사회적 무관심을 무죄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사회정의의 실천은 “부당하게 대우하거나 부당한 특권을 제공하는 체제들(경제, 사회, 정치, 문화, 신화 그리고 종교분야의)을 검토하고, 도전하며, 깜냥껏 그 체제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회정의의 성서적 기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담스럽더라도 산상수훈에서 도망 갈 수 없는 것처럼, 굶주리는 이들, 벌거벗은 이들 그리고 우리보다 혜택 받지 못한 이들을 주님처럼 대하라는 복음적 도전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정의를 향한 우리의 갈망에 불을 지피는 동력은 정의의 진리와 똑같은 원천인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인성 및 그분의 가르침에서 나와야 한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부터,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존엄성과 평등한 권리를 확인해 주신다. 또한 지구와 그 안의 모든 것이 공평하게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고 확인한다. 이것은 히브리 백성들의 출애굽 원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신명기와 시편, 예언서에서 계승된 핵심적 가치가 ‘사회정의’이다.

성경에서는 우리 신앙의 건강성은 이 땅에서 지켜지는 정의의 모습에 따라 결정되며, 사회정의는 우리가 고아들, 과부들, 이방인들(사회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어떻게 취급하는가에 따라 판단을 받을 것이라는 원칙 위에 서 있다. 이처럼, 유대 예언자들은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는가 안 서는가는 가난한 이들 편에 서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며, 아무리 순수하고 성실해도 사적인 신앙과 신심은 결코 그런 판결을 완화시킬 수 없다고 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그분은 마지막 심판에서 우리는 이 지상의 삶을 살 때에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라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정의의 실천이 구원의 결정적인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개인적 자선’의 유무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내 소유가 일부 덜어주는 것이라면 ‘자선’이지만 ‘그들이 받아야 할 것을 정당하게 돌려받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정의’이다.

한걸음 더 나가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현존과 자신의 현존과 가난한 이들의 현존을 동일하게 본다. 예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자 한다면, 가난한 이들 가운데로 가서 찾아야 한다. 그 반대로 부유해지고 특권을 받을 때에 우리에게는 엄청난 영성적 심리적 위험들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이러한 사회적 원칙들을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발전시켜왔다.

1.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평등한 존엄성을 가지므로 존중, 자원사용, 기회사용에 있어 똑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2.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이 지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3. 사유재산권과 재화의 축적은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다.
4.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반드시 도와야 할 도덕적인 의무가 있다.
5. 수요와 공급의 법칙, 자유기업, 무한 경쟁, 이윤의 동기, 생산 수단의 사유화는 도덕적으로도 정당하게 간주되지 않으므로 공동선, 정의가 요구할 때에는 다른 원칙들에 의해 조절되어야 한다.
6. 자연 또한 고유의 권리를 갖고 있는데, 그 권리는 인간과의 관계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자연에 속한 권리이다. “지구는 인간존재가 뛰어 노는 무대가 아니다. 지구 역시 인간존재가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권한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고 창조된 피조물이다.”
7. 불의에 대한 단죄는 교회의 기본 선교사명이며, 예언자적 역할의 중대한 측면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비폭력으로 평화 만들기

1. 고통스러운 진실

세상이 우리들의 정의를 위한 도전에 점점 더 응답하지 않는 이유들 중 하나는 우리들 자신의 정의를 위한 행동이 자주 바로 폭력, 불의, 경직, 이기주의 자체를 꼭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도덕적 분노는 바로 분노를 일으켰던 그 행동을 자주 모방하게 만든다. 분노, 형편없는 이기주의, 회한, 잔인함 그리고 호전성을 보이는 수많은 정의평화운동 그룹들의 현실은 새로운 세계질서의 기반이 결코 될 수 없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효과를 거둘 때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거의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너무나 자주 정의평화 그룹들 속에 이런 생각들이 깊이 침투해 있다.

a. “내가 추구하는 목적은 너무나 긴급하기 때문에 이번의 경우 공적인 의사소통에서 통용되는 일상의 규범들을 무시해도 괜찮다. 또한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나는 존경을 받지 못할 수 있고, 호전적이며 보기 싫은 인물로 내 반대자들에게 낙인찍힐 수도 있다.”

b. “내가 추구하는 명분의 진실함이 중요할 따름이며, 나의 개인적 삶은 중요치 않다. 내가 분노, 욕망, 시기심에 차 있다 해도 지금 투쟁하고 있는 정의의 명분과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사실, 개인적인 도덕성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정의 활동에 방해가 될 뿐이다.”

c. “적절한 이념만이 정의를 위한 추구에 바탕이 될 수 있다. 하느님과 예수에 대하여 말할 필요가 없다. 평화를 위한 기도도 필요 없고, 단지 평화를 위해 일하기만 하면 된다.”

d. “나는 정치적 성취가 얼마나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판단한다. 나는 장기적인 하느님나라보다 눈앞에 보이는 정치 사회분야의 실제적인 성취에 관심이 더 많다.”

e. “나는 정의의 필요성을 더 부각시키기 위하여 사실을 과장, 왜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의 왜곡에 대해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

f. “나는 희생자이기 때문에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2. 비폭력을 위한 규칙

다니엘 베리건은 “예언자들은 적대감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서약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정의에 관여한 현대의 위대한 예언자들(간디, 도로시 데이, 토마스 머튼,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오스카 로메로, 짐 윌리스 등)은 모두 이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 비폭력의 기반이고, 비폭력은 정의와 평화의 새로운 세계질서 확립을 위한 가능하고 유일한 기반이다.

짐 윌리스는 이런 비폭력 정의평화운동의 몇 가지 규칙을 제안한다.

★ 평화를 위한 모든 행동은 사랑의 힘과 진리의 힘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평화활동의 목표는 사랑과 진리의 힘을 알리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알리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정의평화 행동은 우리자신이 이 문제에 있어 공범임을 인정하고 참회와 겸손의 순수한 정신을 갖는 것이다.

★ “나는 구원받았고 너는 그렇지 않다”는 ‘의인 의식’은 늘 무례함의 위험을 수반한다.

★ 우리들의 분노, 내분, 서로에 대한 존중 결핍은 아직도 권력을 향한 욕구가 극복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 평화운동과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폭력이 기존체제의 폭력보다 작다고 하여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긴박한 상황은 우리에게 행동을 더 신중하게 하도록 요구한다.

★ 비폭력의 중심은 반대자를 패배시켜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를 설득해서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 비폭력은 성서가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고 말하는 인내에 기초하고 있다.

★ 토마스 머튼은 전쟁의 뿌리가 두려움이라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더 이해해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평화조성가들은 다른 이들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 분노가 아니라 희망이 우리의 항의를 이끌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희망, 부활의 힘에 대한 믿음은 어떤 감정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3. 비폭력 평화조성가의 모델, 예수

예수님은 비폭력적 평화조성가의 마지막 모범이시다. 그분은 변화시키려고 하는 폭력과 불의를 모방하신 적이 결코 없다. 우리는 예수님이 폭력에 기울어져 있는 군중을 진정시키고 회개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온 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는 성난 군중들에게 양심 깊숙이 스며드는 말로 항의한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날 그 여인만 구원된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겸손과 진리에 대하여 더 신중하게 깨어있게 되었을 것이다.

정의와 평화를 위한 비폭력행동은 그런 방식으로 “아직도 온화하고 더렵혀지지 않은 양심의 한 부분을 부드럽게 건드리는 것”이며, 그 양심 속에서 여전히 진리로 울리고, 평화는 여전히 따스한 갈망으로 자리잡게 만든다.

4. 정의와 평화를 보증해 주시는 비폭력의 하느님

평화조성가(신앙인)들의 태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하느님이 어떻든 폭력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면, 그 폭력이 아무리 구원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해도, 우리가 평화에 이르는 길 또한 폭력 안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영화, 책, 노래 등에서 폭력이 구원의 역할을 한다고 표현된 것을 보아 왔다. 악당들이 좋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테러를 가한다. 그 중 한 좋은 사람이 악당들보다 더 힘이 세다. 그는 점차 영웅이 되고 상황을 변화시킨다. 악당들의 테러가 계속되는 동안에 결국 영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옷을 벗어던지고 악당을 죽도록 때려준다. 이제 우리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드디어 정의가 ‘통쾌하게’ 실현된 것이다. 악은 무너졌고 선은 증명되었다.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쯤에서 선이 악보다 더 폭력적이 되었음을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의 영웅은 마더 데레사처럼 시작했지만 결국 람보와 배트맨 모습으로 끝났다. 이 구원이야기의 끝은 예수 이야기의 끝과 근본적으로 반대이다. 예수님은 막다른 골목에서 싸우느냐 죽느냐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으며, 그분은 우리의 신화적 영웅들과 달리 죽는 길을 택하셨다.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불렀던 하느님은 아무도 때리지 않았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하느님은 나쁜 이들을 소멸시키고 초월적인 근육의 힘, 속도 혹은 성능이 좋은 권총으로 선한 이들을 들어 올리지 않는다.

예수님의 권능을 표현해주는 단어는 그리스말로 exousia(행할 수 있으나 행하지 않는 능력)인데, 근육의 힘, 속도 혹은 비정상적인 은총이나 뛰어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Exousia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진짜 능력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도로시 데이의 친구 다니엘 베리간 신부는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그는 한 대학에서 강연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주제가 “현대세계에서 하느님 현존”의 의미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매주 몸과 마음이 완전히 무능력한 상태에 빠진 한 어린 소년의 침대 맡에 앉아서 호스피스 활동을 했던 경험을 들려 주었다. 이 소년은 말할 수도 없고 몸이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의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무능력하게 누워있기만 하였다. 베리간 신부는 소년이 침묵과 무력함 속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듣기 위하여 침대 머리맡에 바싹 앉아 있으려고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갔다.

이 어린 소년이 침묵과 무기력 속에 누워있는 모습은 바로 하느님이 우리 세상에 누워 계시는 방식이다. 하느님이 말씀하는 것을 듣기 위하여 우리는 이 소년이 말하는 것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하느님의 힘은 이 소년처럼 어떤 사람도, 어떤 것도 제압하지 않는다. 그 힘은 조용히 말없이, 사물의 깊은 도덕적 영적 근저에 누워 있다. 근육, 재빠름, 아름다움, 뛰어난 재능, 은총 같은 것들로 제압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느님처럼 느낀다는 것은 어떻게 느끼는 것일까? 만일 당신이 신체적으로 제압당하여 무력함을 느꼈다면, 어떤 사람이 당신을 때렸고 당신은 당신 자신을 보호할 수도 응징할 수도 없었다면, 당신은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느끼시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 당신이 깡패들의 약탈을 직접 당한 경험이 있다면, 그 때 당신은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느끼시는  것을... 그리고 예수님이 성금요일에 느끼셨던 바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절대로 우리를 위압하지 않는 분이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힘은 결코 근육질, 속도, 육체적 매력, 똑똑함, 혹은 당신을 사로잡아서 “그래! 그래! 저기 하느님이 계신다!”라고 떠들게 하는 그런 은총의 힘이 아니다. 세상의 힘은 그런 방식으로 돌아간다. 하느님의 힘은 그러나 더 말없고, 더 무력하며, 더 치욕스럽고, 더 소외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 힘은 더 깊은 차원에, 사물의 최종적인 근저에 자리 잡으며, 마지막에 가서 부드럽게 마지막 말을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정의 평화활동을 한다는 것은 마더 데레사로 있다가 람보나 배트맨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평화와 정의를 지탱하시는 하느님은 아무도 때려눕히지 않으며 그분의 뜻은 절대로 그런 방식으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긴 여정에서 우리 자신을 유지하기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은 궁극적으로 지거나 이기는 것이 아니라 충실함의 문제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요구를 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 투쟁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단기적으로 정치적 성과를 거두는 것보다 개인의 양심, 신앙 그리고 애덕에 대해 장기적으로 충실함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결과가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알고 있다. 즉, 우리자신이 사랑스럽고, 애덕에 충만하며, 이해심 있고 연민이 많으며, 용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며 우리의 사적인 삶이 도덕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복음은 일러준다.

어떤 정치적 전략이 최상인지 늘 알 수 없겠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희생자들을 돌보시고, 예수님이 부서짐 가운데에 계시며 우리도 그런 상황에 있을 때 복음의 가르침에 충실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진정한 무기는 이념이나 무기가 아니며, 불이 켜진 촛불, 희망, 개인적인 충실성, 애덕 그리고 기도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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