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학, 강력하고 친밀한 사랑의 어머니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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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학, 강력하고 친밀한 사랑의 어머니 하느님
  • 한상봉
  • 승인 2016.12.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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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5

“살아있는 여성이여, 하느님께 영광이로다!”(Gloria Dei, vivensfemina)

역사적으로 여성은 이론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천대받았고, 사회 및 교회 구조에서 권력에서 배제 당했다. “유대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라는 말처럼 초기교회에서 여성 지도자들 역시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해왔지만 , 한번 공동체가 자리를 잡게 되자 여성들은 주변인으로 밀려났다. 이런 열등한 위치에 처한 여성을 두고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이라는 용어를 고안해 냈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증발은 자연스럽게 남성이 하느님 앞에서 특권을 가졌다는 가정으로 이어졌다. 아울러 여성의 본성에 대한 혐오주의가 발전했다.

“여자는 조용히 또 온전히 순종하는 자세로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이 먼저 빚어졌고 그 다음에 하와가 빚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넘어가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아가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1티모 2,11-15)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부분

3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여성을 ‘제2의 하와’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하와의 감언에 속아서 남자가 악마에게 강하게 맞서지 못했던 것처럼” 모든 여성은 “악의 관문”이라고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성은 그들의 머리인 남성과 함께 취해질 때만 하느님의 형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여겼다. 토머스 아퀴나스는 여성을 ‘흠있는 남성’으로 정의했다. 여성은 그 자체로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는 남편이 출타할 경우에 여성은 “벽에 박힌 못처럼” 집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 이러한 편견이 여성배제의 경험과 맞물리면서 여성은 교회와 사회에서 ‘제2의 성’으로 좌천되었다.

1960~70년대에 시민사회에서 일어난 여성운동 덕분에 여성들은 자신들이 종속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변화를 위한 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는 여성들의 종교생활에서도 영적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여성이 본성에 대한 깊은 긍정을 낳았고, 여성 역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이며, 하느님은 여성의 충만한 삶을 바라는 분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억압의 거미줄에 저항하는 다양한 페미니스트 신학

이렇게 등장한 페미니스트신학은 실천자들의 정치적 철학적 투신에 따라 다양한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들 운동의 공통적인 출발점은 하느님께서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가르침이었다. 이들은 인간 존엄성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하느님을 발견하였다. 페미니스트 신학은 지배적인 남성의 방식으로 사회와 교회를 해석하는 대신에 성, 인종, 계급을 초월해 모든 인간 사이의 평등과 상호성, 나아가 인간과 지구 사이의 평등과 상호성을 가진 공동체의 비전을 꿈꾸고 또 현실로 이루려 한다.

앨리스 워커

한편 미국 흑인여성들은 성차별뿐 아니라 피부색에 의한 차별을 감지하면서, ‘우머니스트신학’을 발전시켰다. <컬러 퍼플>의 작가 앨리스 워커가 제안한 ‘우머니스트’(womanist)는 ‘소녀다운’(girlish)이란 말에 반대하는 흑인용어 ‘여성답게’(womanish)에서 차용한 것이다. 전통과 한계를 넘어 대담하고, 용감하며, 강단 있게 행동하는 것을 뜻하며, 이처럼 여성은 자기운명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성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인종차별과 계급차별, 식민주의와 군사주의, 성차별 등이 맞물린 상태를 ‘억압의 거미줄’(web of oppression)이라고 표현한다. 덧붙여 이성애주의를 비판하는데, 남성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레즈비언을 비난하는 가부장주의를 반대한다. 이들은 반여성주의를 고착시키는 규범을 ‘가부장제 구조’와 ‘남성중심주의’라고 꼬집는다. 가부장제는 여성이 권력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하며, 남성중심주의는 남성의 존재방식을 사회적 규범으로 고착시키기 때문이다. 한편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데, “여성을 (기성) 사회와 교회에 넣고 잘 저어주는” 레시피만으로만 여성해방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호 파트너십에 의한 새로운 공동체를 희망한다.

하느님은 여성과 동행하신다

여성신학자들은 “여성의 몸과 영혼에 폭력이 가해질 때 하느님의 영광이 모욕당한다”고 말한다. 이집트에서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신 거룩한 분은 지금도 삶의 충만함을 박탈당한 여성과 동행하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성 하느님의 이미지는 전통적으로 거룩하게 여겨져 왔는데, 이는 고위 성직자 이미지로서,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한 관계에 기초해 있다. 그동안 여성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가부장적인 하느님이 “자유롭고 잉태하고 창조하며, 자비로운” 하느님을 대체해 왔다. 이에 도전하는 여성들은 하느님을 ‘연인’(lover)으로 삼았는데, 이는 아가서의 남녀가 나란히 주도권을 갖고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패턴에 따른 것이다.

여성들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주권자로서의 하느님, 즉 마치 힘없는 어린 소녀를 돌봐주고, 그 여아가 조용히 본분을 다할 때 가장 기뻐하는 아빠나 큰오빠 같은 하느님 대신에 모든 것을 넉넉하게 품는 사랑의 하느님을 강조했다. 이 사랑은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고유한 자유 안에서 해방을 맛보게 한다.

그렇게 여성들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여성스러움을 충분히 신뢰하기 시작했다. 이제 하느님은 창조적인 힘, 돌보는 자, 벗으로 나타난다. 여성들의 기쁨, 슬픔, 감사, 분노 및 세상을 바꿀 그들의 능력을 소중히 여기는 반려자가 되신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지배하는 남성'이라는 하느님 이미지는 우상이다

하느님을 권력을 지닌 남성언어로 말해온 오랜 습관은 하느님을 여성으로 보는 것을 방해했다. 하느님에 대해 말할 권리도 남성에게 독점되었고, 시각미술 역시 남성과 하느님을 연결시키는데 익숙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 ‘천지창조’이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이 그림에서 하느님은 영양상태가 좋은 백인 남성이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닮은 젊은 백인 남성을 창조하기 위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여기에는 인종, 계급, 성이 반영되어 있다. 왜 젊은 하느님, 여성 하느님은 안 되는가? 결국 당대의 권력자의 모습으로 하느님이 형상화된 것이다.

여기에는 신학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먼저 불가해한 하느님을 망각하고, 하느님 이미지를 ‘지배하는 남성’이라는 판타지로 왜곡시킨다. 그래서 모든 공적 사적 기도에는 ‘아버지’ 하느님이 각인되어 일상적으로 ‘하느님은 남성’이라고 선전한다.

둘째, ‘한 분의 하느님, 한 분의 교황, 한 분의 황제’라는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 구호처럼, 지배 남성 이미지가 사회와 교회의 가부장제를 정당화해왔다. 하늘에서 그런 것처럼 땅에서 마찬가지로 남성은 권력을 향유한다. 그래서 메리 데일리(Mary Daly)가 “만약 하느님이 남성이라면 남성이 곧 하느님이다”라고 한 말이 설득력을 가진다.

셋째, 하느님 남성 이미지는 여성이 하느님을 덜 닮았다는 점을 암시한다. 결국 여성은 영적 힘에서 소외되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남성(사제)에게 더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우상화 하려는 모든 시도에 도전하고 있다. 하느님은 문자적으로 아버지, 왕, 주인이 아니라 훨씬 더 큰 존재이다. 남성 메타포가 하느님을 나타내는 데 쓰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 역시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되고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점을 잠시 잊게 만든다.

그래서 여성 메타포로 하느님을 부르는 행위는 우상파괴적 효과가 있다. 하느님은 무한한 삶의 근원이며, 거룩한 지혜이고, 내적 초월이며, 절대적 미래다. 어머니이며 연인이며, 친구이고 무한한 사랑이다. 세계를 감사는 거룩한 신비이며 오늘의 상황에서 새롭고도 풍부한 정의를 이루는 존재이다. 오래된 미래 그 자체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여성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예언자적 힘과 함께 작동한다.

The bronze statue “Christa” at the Cathedral Church of St. John the Divine in Manhattan on Monday. In 1984, a church official ordered its removal. Credit Hiroko Masuike/The New York Times

어머니 하느님, 가장 강력하고 친밀한 사랑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은 하느님에 대한 어머니됨의 경험에 주목한다. 물론 어머니에 대한 경험이 모두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변덕스럽고 강박적이며 미숙하고 무서운 어머니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칫 모성숭배를 통해 여성은 자고로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모성애 이데올로기를 통해 여성의 삶을 엄격히 제한할 위험이 있다. 또한 모성을 강조하다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에 대한 모멸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어머니로 형상화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네 삶의 창조적 원천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아이에게 어머니는 안전과 양육, 연민과 같은 인간의 경험과 맞닿아 있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적극적으로 상기시킨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예수가 자신을 병아리를 보호하려고 날개 아래 모으는 암탉에 비유(마태 23,37)하는 것처럼, 신약에서도 하느님의 모성 이미지는 이어진다. 성서에서 자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명사가 여성의 자궁을 뜻하는 레헴(rehem)에서 나왔고, 생명을 주는 여성의 신체가 하느님 자비를 느끼게 하는 메타포로 기능한다. 이를 두고 필리스 트리블은 자비와 자궁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란 이기심 없는 생명에의 참여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궁은 보호하고 키우지만,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않는다. 자궁은 보물과 같은 생명을 낳아 온전함과 행복이 충만하게 한다. 참으로 이것이 자비의 길이다.”

결국 전쟁이 그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메타포들은 죄로 병든 이들의 행복을 도모하는 하느님의 돌봄을 잘 드러낸다. 샐리 맥페이그는 어머니됨을 다음 세 가지로 표현한다.

첫째, 어머니는 타자에게 생명의 선물을 준다. 생명이 태어나면 “네가 있어서 참 좋구나!”라며 기뻐한다. 둘째, 모성애는 태어난 생명을 양육한다. 셋째, 모성애는 자녀들이 충만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막아선다. 좋은 부성애도 그와 같다.

결국 부모의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가장 강력하고 친밀한 사랑이다. 특히 출산과 수유와 양육의 측면에서 여성의 몸이 갖는 역할은 남성의 몸으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는데 특별한 울림을 준다.

여성신학자들은 어머니-하느님(mother-God)이 가장 약한 자녀들을 각별히 대하는 강력한 모성 본능의 표현이라며, 이렇게 발설한다.

“인간이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가난한 자를 멸시하며, 불의한 나눔의 구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늘어나고, 지구의 생태적 지속을 붕괴시킬 때, 어머니가 어린 자녀를 지키기 위하여 이렇듯 하느님의 모성애가 발휘되어 약자를 지키고, 정의를 추구하며, 상처를 치유한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새끼 잃은 곰처럼 어머니 하느님은 자식들을 위해 박차고 일어서며 심지어 적들의 가슴을 찢어버린다.(호세 13,8) 이처럼 모성적 메타포 안에는 하느님의 분노가 녹아 있다.”

1984 Pablo Baen Santos – Krista

거룩한 지혜, 거룩한 영혼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이끄는

그리스어로 ‘소피아’라 부르는 지혜는 적극적으로 세상에 참여하여 구원하는 하느님의 또 다른 표상이며, 여성 이미지로 사용된다. <잠언>에서, 소피아는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있었고, 세상이 창조된 것을 기뻐하며 뛰놀았다.(잠언 8,31) 그녀는 정의의 길을 걸으며, 왕은 그녀의 도움을 받아 정의롭게 통치한다.(8,15) 또한 그녀의 말씀은 영적인 성숙으로 우리를 초대하며, 끊임없는 양육을 약속한다.

구약의 <지혜서>에서 소피아는 구원하기 위해 힘을 사용한다. 이스라엘이 노예살이를 할 때,

거룩한 백성, 흠 없는 종족을 지혜는
압박자들의 나라에서 구해 내었다.
지혜는 주님을 섬기는 종의 영혼 안으로 들어가
기적과 표징들을 일으키며 무서운 임금들과 맞섰다.
거룩한 이들에게 그 노고에 맞는 상급을 주고
그들을 놀라운 길로 이끌었다.
낮에는 그들에게 그늘이 되어 주고 밤에는 별빛이 되어 주었다.
또 그들을 홍해 너머로 데려가고 깊은 물을 가로질러 인도하였다.
그들의 원수들을 물로 뒤덮었다가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위로 내던져 버렸다.
그리하여 의인들이 악인들에게서 전리품을 거두고 나서
주님,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고
자기들을 지켜 주신 당신의 손을 한마음으로 찬양하였습니다.
(지혜 10,15-20)

거룩하고 총명하고 섬세하고 융통성 있고 사람을 사랑하는 소피아의 영은 세계에 가득 스며들어 만물을 새롭게 하고, 사람들을 하느님과 예언자의 친구가 되게 한다. 빛나며 쇠하지 않는 그녀는 태양보다 아름다우며, 모든 별자리보다 더 눈부시다. 또한 악은 지혜를 이겨낼 수 없다.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지혜 7,22-30)

요한복음은 예수가 강생하기 전에 말씀/지혜로 계셨다고 전한다. 한편 콘스틴티노폴리스에 지은 고대의 가장 큰 성당은 그리스도와 지혜가 같은 분임을 보이기 위해 ‘하기야 소피아’(Hagia Sophia) 즉, 거룩한 지혜라고 이름 지었다.

당신은 별이 총총히 박힌 치마로 하늘을 쓸고 가며

히브리어 여성명사인 ‘루아’(ruah)라고 불리는 하느님의 영은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비둘기’로 그려지는데, 비둘기는 고대사회에서 사랑의 여신을 상징한다. 그녀는 산파로서 아이를 받고, 관계를 형성하며, 때를 씻어내고, 예언자에게 영감을 주고, 진리를 옹호하고, 아름다움을 일깨우고, 공동체를 창조하고, 지구의 얼굴을 새롭게 한다. 이처럼 하느님은 빵을 반죽하고(루카 13,21), 옷을 짜고(시편 139,15), 연인을 쫓는(아가) 여성으로, 새끼를 날개 그늘 아래 숨기는 어미새(시편 17,8)로 표상된다.

특별히 하느님의 모성적 이미지는 은화 열닢 가운데 읽은 동전 하나를 찾는 여인에게서 잘 나타난다.(루카 15,8-10). 또한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마리 두고 가는 선한 목자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밴쿠버의 한 성공회 여성 사제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이런 기도문을 적었다.

“우리의 집인 지구를 지으신 이여,
당신은 별이 총총히 박힌 치마로 하늘을 쓸고 가며,
동녘 하늘을 닦아 새날에 빛을 가져옵니다.
아기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 우리에게 오셔서
전 우주에서 당신의 충만한 구원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어머니, 평화의 아이, 사랑의 영
셋이자 하나이신 분이시여, 아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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