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처럼 낡은 하느님은 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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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처럼 낡은 하느님은 우상이다
  • 한상봉
  • 승인 2016.12.06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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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1
사진=한상봉

어느날 사도 바오로와 나르나바는 루스두라에서 설교하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남자를 치료해 주었다. 한 번도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그 사람이 치유되자, 마을 사람들과 사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라고 생각해, 소와 꽃을 가져와 두 사람 앞에서 제사를 올리려고 하였다. 이 광경에 넋이 나간 사도들은 그들을 헤치고 나가 소리쳤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 14,15)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믿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작심한 사람들이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을 입에 올리지만, 이명박과 박근혜와 김기춘의 하느님과 안중근 의사나 함석헌 선생이 고백한 하느님이 다르고,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종이 고백하는 하느님이 같은 분일 수 없다. 그래서 “각인각색의 하느님”이라고 말하면 불경할까? 이처럼 ‘하느님’이란 호칭은 갈등적이고 진부하며 낡은 말처럼 들린다. 우상과 하느님이 혼동되기 쉬운 현대교회에서, 특출난 신학자들은 현대세계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여전히 분투하고 있으며, 새로운 고백 안에서 ‘신학의 혁명’을 경험하고 있다.

하느님에 대한 진부하고 순진하며 낡아빠진 생각을 접고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엘리자베스 A. 존슨, 북인더갭

‘연민하며 저항하는 사랑의 주를 찾아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라는 책을 지은 엘리자베스 A. 존슨은 칼 라너가 “역사는 하느님의 자기계시 과정”이라는 말한 것처럼, 우리가 최근 100년 동안 경험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름’에 주목하면서, 우상과 구별되는 하느님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리고 그가 경험한 세계는 “인간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현실에 대한 통절한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더 있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처한 낯선 상황 한가운데 생생하게 임재하시는 하느님의 영을 구한다. 오래 잊혀진 측면들이 최근의 사건들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관계를 이끌어내고 그 결과 하느님의 깊은 연민은 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새롭게 인식되기도 한다. 5세기 북아프리카의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는 ‘오 아름다운 이여, 언제나 아주 오래된, 언제나 새로운 분이여, 저는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라고 외쳤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사실상 여러 상황 속에 놓였던 신자들은 이 오래된 아름다움을 항상 새로운 용어로 구하고, 발견하고, 표현해 왔다.”(존슨)

이러한 노력들은 학술적이거나 지적인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 행동에서 나온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진부하고 순진하며 낡아빠진 생각은 더 이상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숙한 믿음을 향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악한 시대에 맞선 그들의 투쟁에 걸맞은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 맺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통찰은 한마디로 “심장에서 시작해서 머리와 손으로 발전해 간다”고 존슨은 말한다.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의 원제는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탐구”(Quest for the living God)이다. 이처럼 이 책은 오늘날 살아있는 전통이 체험하는 살아있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더듬고 있다. 이스라엘 전통 속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역동적이고 자비로우며 경이에 가득 차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시내산의 불길에서 터져나오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고”(신명기 5,26), 약속된 땅으로 가로질러 갈 때 “살아계신 하느님이 너희 곁에 있음”(여호수아 3,10)을 알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녀들이”(마태 16,16) 변방의 유대인이었던 예수 그리스도 덕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마 9,26)이 되었다고 여겼다.

신성한 힘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

인류 역사의 여명기부터 사람들은 ‘신성한 힘에 휩싸여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왔다. 통제할 수 없으나 함께 살아가는, 어떤 목적으로 가득 찬, 세상에 두루 퍼져 있지만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삶의 향방이 정해진다고 생각했다. 이 힘을 상징과 제의를 통해 드러냈는데, 이게 종교이며 하느님에 대한 경험이다. 이 힘은 파악할 수 없지만 실재하는, 마치 구름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이 존재를 ‘신성’(the Holy)이라고 불렀는데, 신비(mysterium)하고, 경탄(Tremendum)할만하고 황홀(Fascinans)한 ‘어떤 것’이었다. 신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신비이며, 길들여지지 않고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며 세계가 흔들리는 것 같은 경외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달아날 수 없도록 우리를 매혹시키며 도취시키는 힘이다.

이런 체험들을 글이나 의식, 행위에 담아 표현했는데, 이런 경험은 공동체의 삶 안에서 전수되어 신성에 대한 감각이 계승되었다. 이게 종교성이다.

여전히 하느님 '찾는' 경전의 사람들

계시종교에 속하는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는 신성에 대한 감각과 믿음이 구약과 신약, 쿠란이라는 경전에 확정적으로 전달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신성에 대한 절대적 지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교에서도 ‘하느님 찾기’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왜? 경전의 진리 역시 역사적 경험 속에서 다시 해석되고, 새로운 이해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살아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하느님, 주님은 나의 하느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시편 63,1)

바빌로니아 유배의 재앙을 목격한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희망을 선포한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주겠다.”(예레 29,12-14)

하느님은 지루하게 고정된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는 탐색은 일종의 흥미진진한 모험이 된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평생 수행을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평생 하느님을 찾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예수님 역시 먹을 것과 입는 것을 걱정하는 대신에 하느님을 찾으라고 권한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으라.”(마태 6,33) 여기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은 동의어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주실 것이다. ”(마태 7,7-8)

이 길에서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행위는 잃은 자를 찾는 하느님의 행위와 마주친다. 하느님은 숨어 있는 당신을 인간이 찾아낼 때까지 그냥 구석에 앉아서 기다리고만 계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동전을 잃은 여인처럼,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처럼 인간을 찾아다니신다. 그리고 탕자와 죄인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환대하신다. 예수님 역시 “사람의 아들은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고 사명을 밝힌다.

심지어 쿠란에서도 “네가 돌아서는 곳마다, 거기 신의 얼굴이 있다”(코란 2,115)고 말한다. “신을 얼굴을 찾아 밤낮으로 구하는 자들을 친절히 대하라”(쿠란 18,28-29)고 말하며, 진실한 무슬림은 평생을 신의 얼굴을 찾기 위해 간구한다. 이렇게 신의 얼굴을 찾는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당신이 이해했다면, 그건 하느님이 아니다”(설교 117,5)라고 말한 것처럼, 하느님은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타자이기 때문이다.

사진출처/북인더갭

현대적 유신론 : 하느님에 대한 고정관념

그런데 우리도 지금도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통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는 어떠한가? 하느님은 존재의 피라미드 최상부에 위치한 ‘군주’의 모습이다. 하늘에 머물면서 우주를 지배하고 인간행위를 심판하는 강력한 존재다. 그는 우리에게서 아주 먼 곳에 위치하며 지배하는 남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의 불결함에 물들지 않는 위풍당당한 입법자이다. 이런 권력의 정점에 있는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가 그 사회와 교회와 가족의 권위적 구조를 강화시킨다.

이런 하느님 이미지가 무신론의 토양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 비판하는 하느님은,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아무리 큰 존재라 하더라도, 흰 수염을 기른 그렇고 그런 부류”로 상상된다. 즉, 하느님을 하늘에 있는 매우 강력하고 거대한 ‘노인’으로 보고 있다. 이런 하느님이 비판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을 참칭한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은 사실상 ‘우상파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계몽주의 이후 신학자들이 철학을 빌려 설명한 하느님도 문제다. 이들은 추론을 이용해, 하느님을 유한한 피조물과 달리 불변의(변하는 피조물에 비해), 무형의(형태가 있는 육신에 반하여), 고통이 없는(고통을 느끼는 피조물에 반해), 전지전능하며, 어디에나 있는 존재로, 힘과 지식과 실재에서 한계가 없는 분이라고 설명한다. 이게 ‘현대유신론’이다. 결국 하느님은 웅장한 노인, 경찰, 부모의 콤플렉스를 감싸주는 붕대, 완벽한 성직자, 관리감독, 지배자, 실망스런 보호자, 흥을 깨는 사람 같은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신학자들은 그분을 일정한 장소에 갇히지 않고 우리와 함께 가까이 계신 분으로 고백한다. 하느님은 추악한 역사와 더러운 세상에 다가서서 인류와 함께 고통 받으며 연민과 해방의 사랑을 드러내는 분이며, 사실상 지배권력의 주변부에 위치한 분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현대에 와서야 되찾은 하느님 이미지는 역설적이게도 전통적인 믿음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하느님 탐색 여행의 근본규칙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가까울 것이라고 믿지만, 그때조차도 살아계신 하느님은 형언할 수 없는 신비에 머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우리는 어둠 속에서 금 간 거울을 보듯, 오직 희미하게 하느님을 볼 뿐이다.(1코린 13,12)

실상 하느님은 우리가 계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논문을 준비하다가 지중해 해변가에서 만난 아이의 이야기가 그것을 잘 드러내 준다. 아이가 통에 물을 가득 담아 모래구멍에 넣느라 분주하다. 주교가 호기심으로 뭐하냐고 묻는다. 아이는 “바다를 구멍에 넣는 거예요.” 그게 가능하냐고 타이르자 아이가 다시 말한다. “삼위일체의 비밀 역시 당신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소. 그건 마음보다 훨씬 크다오.” 다 마셔버릴 수 없는 바다처럼 하느님은 인간의 의식과 경험을 넘어선다.

칼 라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거대한 대양 한가운데의 작은 섬과 같다. 섬은 바닷속으로 뻗어 나가지만, 대양의 깊이는 항상 섬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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