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 낯선 종교에서 내 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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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 낯선 종교에서 내 집처럼
  • 한상봉
  • 승인 2016.12.27 01:0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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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6

타종교와 관계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종교가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특정종교가 소유한 진리에 대한 우위성을 입증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자기 종교에 대한 독실한 신심을 위해 타종교에 대한 비교우위를 확인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러한 논리는 그동안 전통신앙 안에서 항상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자칫 하느님을 특정종교에 제한된 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결국 불가해한 하느님의 신비를 위축시킬 위험이 있다. 이와 관련해 가톨릭교회는 특별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전환점으로 진전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 쟁점은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 “타종교 안에도 구원이 있는가?”하는 질문을 낳았다.

사진=한상봉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은총의 낙관주의를 지지했다.

“비록 자기 의지에 반하여 예수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신실하게 하느님을 구하고 은총에 영향을 받으며 양심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계시를 알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의 섭리는 또한 아직 하느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지만, 은총 덕분에 선한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6항)

“이 모든 것은 크리스천뿐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성령 가운데 선한 의지를 갖는 모든 사람에게 진리로 통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 죽었고, 인류의 궁극적 소명은 사실상 단 하나인 하느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아는 성령이 부활의 신비와 관련된 가능성을 모든 이에게 열어주었음을 믿어야 한다.”(현대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22항)

“종교는 개인의 구원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인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에서는 힌두교, 불교, 무슬림, 유대교도들의 ‘심오한 종교적 감수성’에 주목하고, 그들 가르침의 역할, 삶의 규칙, 신성한 예식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선포했다.

“가톨릭교회는 이 종교들이 지닌 진리와 신성 중 그 어느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방식, 규율과 가르침이 많은 측면에서 교회와 다를지라도 교회는 그런 측면을 신실한 존경심으로 바라본다. 그들 종교는 종종 모든 사람들을 밝히는 진리의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2항)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다른 종교의 영적 가치를 인정하고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려깊게 사랑을 담아 다른 종교의 구도자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며 크리스천의 믿음과 삶을 되돌아보며 구도자들 가운데 발견되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선뿐 아니라 그들의 사회 문화적 가치까지도 인정하고 지키며 증진시켜야 한다.”(2항)

그러나 다른 종교들이 이런 영적 가치를 지녔다 하더라도 부분적이고 일시적이므로, 결국 종교의 진실한 성취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이런 진리에 대한 부분적 성취, 이들 종교에 안에 깃든 하느님의 임재와 성령의 활동에 따른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선교사명> 회칙에서 “성령의 임재와 활동은 개인뿐 아니라 사회와 역사, 민중, 종교에 영향을 준다”(22항)고 하였으며, 하느님은 “여러 방식으로 개인들뿐 아니라 그 영적인 부요함으로 전체 민중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여기서 그들의 종교는 주요하고 근본적인 표현”(55항)이라고 전했다. 이처럼 하느님은 모든 종교에 임재하기 때문에, 이들 종교적 실천을 통해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사진=한상봉

아시아 종교 상황에서의 가톨릭교회

서구에서 진행되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갑론을박 가운데, 실천적인 발전은 세계적인 고등종교가 산재해 있는 아시아에서 이뤄졌다. 아시아 35억 인구 가운데 크리스천의 비율은 3% 정도인데, 그중 절반이 필리핀에 거주하기 때문에 현재 아시아 인구의 1.5%만이 아시아 대륙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불가피하게 소수자로서 주변의 종교들과 어깨를 부비며 믿음을 유지해 왔다. 그들은 이웃 종교의 선함을 목격하였고, 일상에서 이들 종교와 대화를 나누고, 친교를 유지하며 상호이해를 깊게 해 왔다.

특히 1972년에 설립된 아시아주교회의(FABC)는 아시아대륙에서 가톨릭교회가 발견한 것은 민중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가난과 풍부한 영적 자산을 지니고 있는 아시아종교였다. 여기서 아시아 주교들은 제도적인 교회의 건설과 개종을 통한 교회의 가시적 확장에 얽매이지 않았다.

아시아 주교들은 유럽교회를 아시아에 이식하는 대신에, 교회로 하여금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해방, 교회를 아시아인의 문화에 걸맞게 뿌리 내리는 문화적 토착화, 모든 차원에서 종교 상호간의 대화를 꾀하는데 주력했다. 특히 인도교회는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전통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발견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하면서 아시아 교회는 “교회 담장을 넘어서 하느님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교황청, “타종교는 중대한 결함 있다” 경고

그러나 2000년에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발표한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는 종교다원주의를 경고하면서 신앙이 종교적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인은 “단일하고 유일하며 오직 그분에게만 합당하며 독점적이고 보편적이며 절대적인”(15항)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타종교와 관련해, <주님이신 예수님>은, 다른 종교들이 가톨릭신앙의 보완물이 아니며, 그들의 신성한 경전은 성령으로 씌어졌다고 말할 수 없고, 성령은 예수를 떠나서는 그들 가운데 구원의 권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타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폄훼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온전한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이 선언에서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종교전통들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종교적 요소를 제공한다”고 인정하지만, “객관적으로 말해서, 그들 종교는 중대한 결함 속에 있다”(22항) 단정지었다. 이런 태도에 대해 엘리자베스 존슨은 “그 종교들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요소들을 지난다고 하면서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물었다. 결국 이 선언은 타종교에 심각한 상처를 주었다.

사진=한상봉

네 가지 선교론

이와 관련해 아시아해방신학자인 알로이스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해방신학>에서 역사적으로 지난 500년 동안 진행되어 온 네 가지 선교 유형을 소개한다.

1. 반(反)그리스도교 종교에 대한 정복론

1455년 교황 니콜라스 5세는 그리스도교도 국왕에게 “사라센, 이교도 및 그리스도의 다른 적들을 사로잡아 멍에를 지우도록 완전하고 자유로운 허가”를 내렸다. 당시 제국주의와 교회의 정책은 뒤섞여 있었다. 볼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인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니, 유럽 밖 세계의 식민화는 곧 복음화였다. 물론 선교사들의 종교적 불관용은 사탄의 지배에서 ‘불쌍한 이교도’들을 구원하려는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정치경제적 제국주의와 맞물리면서 무고한 학살을 동반했다.

2. 비(非)그리스도교 종교에 대한 적응론

예수회원 마테오 리치의 중국선교에서 잘 나타나는 태도로, 다른 문화에서 종교적 내용을 박탈하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슬쩍 삽입하는 방식의 선교론이다. 아시아종교의 사회문화적 형태와 종교적 동기가 선하고 복음화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겨졌다. 여전히 그리스도교는 구원행업의 유일한 독점자이지만, 낯선 땅에서 선교하기 위해 외피, 곧 이런 다른 문화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그러나 가현설(假現說)처럼, 예수는 사람처럼 나타나신 분이 아니다. 한편 티벳이나 중국불교, 유럽의 그리스도교는 민중의 종교신심과 잘 결합되어 있다.

3. 전(前)그리스도교 종교들의 완성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며, 구원은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방법으로” 신비스럽게 이뤄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는 “준비적 단계의 복음”이며, 복음에 의해 비추어지고 고쳐져야 할 존재이다. 결국 이 종교들은 “감추어진 하느님이 현존”과 같다. 타종교의 창설자나 예언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선구자라고 부른다.

4.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성사론

모든 종교들이 “감추어진 하느님의 현존”이라면, 칼 라너가 말한대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종교인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다. 회심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반드시 교회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힌두교도가 더 충실한 힌두교도가 되도록 하는 일이 곧 그 사람을 참된 그리스도교도로 만드는 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느님은 부족신이 아니므로 교회의 전유물도 아니다. 만인이 하느님 백성이다. 모든 종교는 하느님 사랑과 백성(이웃)에 대한 사랑을 지향한다. 또한 교회 역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에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이제 ‘산위의 마을’이 아니라 ‘반죽 속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세계가 당당히 하느님의 성사가 되는 날, 교회는 다른 모든 종교와 더불어 그 존재와 역할을 그치게 될 것이다. 세계가 바로 교회가 될 것이며, 그때에 하느님의 나라는 완성되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종교 역시 하느님의 작품이다

레오나르도 보프가 지은 <하느님은 선교사보다 먼저 오신다>(분도출판사, 1993)란 책이 있다. 가톨릭교회만이 구원을 위한 진리를 독점한다는 논리는 곧 심각한 구원론적 문제를 낳는다. 만일 그러하다면, 예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않았던 대륙에 살았던 이들은 죽기까지 온전한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채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느님 자비의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두는 것으로, 이런 하느님이 과연 하느님인가, 다시 묻게 한다.

예수는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했는데, 예수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고 구원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합당한가? 어떤 신학자들은 타종교를 그리스도교적 구원의 완전성에 이르기 전에 취해진 ‘예비적 단계’라고 규정하는데, 이런 태도야 말로 종교적 제국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존슨은 하느님은 ‘불가해’한 신비이며, 이것은 “하느님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 깊숙이 채우고 넘쳐나는 하느님의 풍족함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끊임없이 현존하면서 모든 세대와 문화를 걸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완전함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은 크리스천만의 하느님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감히 사랑이라고 부르는(1요한 4,8.16) 알 수 없는 신비는 사랑에 강제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모든 이들에게 애정을 쏟아붓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종교와의 대화에 나설 때 필요한 신학적 방법은 ‘성령신학’이다. 전체 세계에 걸쳐 다가오고 스쳐 지나가는 하느님의 임재인 성령은 모든 인류를 향한 가장 깊고 신성에 가득 찬 은총의 선물이다. 이 성령은 통제가 불가능하고 ‘교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체를 받아 모시지 않는 이들에게도 거룩함의 열매를 선사한다.

아시아의 주교들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거룩함에 대한 감각, 완전함을 향한 갈망, 금욕에의 개방, 고통에 대한 연민, 선함의 요구, 헌신의 명령, 자아의 완전한 포기, 상징과 예식 속에 존재하는 초월에 대한 믿음이 다른 종교 안에도 있다. 하느님의 구원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강렬하게 표출되었지만,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은 교회가 주장하는 것에 한정될 수 없다.

“수세기 동안 신학은 다른 종교를 이교도의 발명품 정도로 치부해 왔지만, 이런 종교들 역시 하느님의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엘리자베스 존슨은 말한다. 이 종교 안에서도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비를 엿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아무도 포기하지 않으며 그의 사랑은 모든 문화에 부어주신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주교회의는 다음 네 가지 대화의 유형을 제시한다.

1. 생명의 대화 : 일상생활을 나누다

생명력 있는 대화는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우호적인 관계에서 협력하며 살아가는 곳마다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서로 다른 종교를 지닌 이들이 가족이나 이웃, 직장과 시장에서 자유롭게 만나면서 이뤄지는 대화는 종교에 대한 편견을 교종하고 마음을 열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신성의 다양함을 접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샤를 드 푸코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군대의 장교였던 샤를 드 푸코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모로코에서 지질학 연구를 하다가 이슬람교도를 만나 그들의 신앙적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고 회심한 사람이다. 그때까지도 푸코는 가톨릭교회를 부녀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에 다섯 번 엎드려 기도하는 무슬림들의 깊은 신앙은 다른 종교적 지평을 열어주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역시 십자군 전쟁의 와중에 술탄을 찾아가 평화를 이루었는데, 그가 무슬림에게 발견한 것 역시 열렬한 신앙이었다. 그는 술탄에게 선물로 받은 육성으로 기도시간을 알리는 뿔나팔을 자신의 공동체에서 기도시간을 알릴 때 사용했다고 한다.

사진=한상봉

2. 행동의 대화 : 연대하다

아시아교회의 주교들은 혹독한 가난의 현실 한가운데서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 가운데 ‘행동의 대화’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종교는 세계에 대한 봉사이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는 단순히 종교영역에 머물 수 없고 경제, 사회, 정치, 문화 같은 삶의 전 영역을 아울러야 한다. 그들이 전 영역에 걸쳐 재화의 상호보완성, 긴급성, 타당성을 발견하는 것은 각 종교가 인간 공동체의 좀더 충만한 삶을 향한 공통된 헌신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황을 분석하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실제적인 노력을 계획한다. 이런 행동에 돌입하면서 종교인들은 ‘함께 한다’는 느낌이 커진다. 특별히 특권층과 정치권력의 반대에 부딪힐 때, 이들은 각자의 종교 안에 있는 예언자적 태도 때문에 고난을 함께 감수하면서 연대감과 일치감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화가 상호이해의 길을 열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불교인들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의 진리를 통해 어떻게 고난을 이겨나가는지 보게 되며, 불교인들은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신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힘을 주는지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실용적이면서 영적 교감이다. 이처럼 종교인들은 사회정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연대할 때 투쟁을 위한 더 큰 힘을 얻으며, 상호간의 깊은 우정과 그들 모두를 뒷받침하는 하느님의 폭넓은 신비를 향한 새로운 통찰을 얻는다.

3. 신학적 교환의 대화:

사목자와 신학자 등 전문 종교인들이 서로 혜안과 가치를 나누며 종교적 탐험에 나설 때 신학적 대화가 발생한다. 이런 대화는 희망에 가득 찬 존경의 분위기에서 진행되는데, 서로 다른 종교전통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서로의 믿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불교에서는 긍극적인 진리를 ‘공’(空)이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주하여 ‘당신’이라고 부르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다르다. 이러한 진리 안에 사는 것은 덧없고 순간적인 모든 일시성을 일깨우는 영을 요구한다. 인간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어떤 애착이라도 끊어내며 자신을 비우면서 살아가야 한다. 불교도인 일본 학자 아베 마사오(阿部正雄)는 자기를 비운 케노시스(Kenosis)의 하느님에게서 공(空)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피 2.6-8)

아베는 메시아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버렸으며, 이는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느님을 ‘셋’에서도 ‘하나’에서도 자유로운 위대한 ‘제로’라고 주장한다.

가톨릭신학인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는 아베의 생각에 동의하며, 불교의 시각은 인간 영혼을 하느님께 굴복시키는 딱딱한 이미지를 느슨하게 풀어준다고 했다. 이러한 발상은 중세 신비주의의 대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Eckhart)의 “나는 하느님에게서 자유롭기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급진적인 부정신학의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트레이시는 하느님은 그저 비우시는 분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오히려 충만케 하시는 분이라고 전한다. 이는 그리스도인 신앙이 하느님께서 역사적 예수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체험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공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부정의 부정, 즉 비어 계시지만 충만하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비교신학적 차원에서, 프랜시스 클루니는 남부 인도의 여성 성자인 안탈(Antal)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9세기 살았던 이 여성 시인은 나라야나신을 각별히 사랑했는데, 나라야나신은 그녀를 신부로 삼았다. 그때 안탈이 부른 노래는 이렇다.

“그의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것이며,
그의 백성을 기쁘게 하는 이름은 무엇이든 그의 이름이다.
끊임없이 묵상하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 길은
무엇이든 그의 길이며,
그가 바로 원반을 든 자이다.”

클루니는 “상상의 명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하느님을 향한 길을 걷는다”면서, 안탈의 결혼 이야기처럼 성 이냐시오 로욜라 역시 영신수련 과정에서 자신을 복음서 안의 한 장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곳에서 제 삶 속에서 갈급한 문제들을 예수와 나눈다. 이런 상상적 대화 속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여기서 상상과 사랑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더 큰 사랑과 헌신에 열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느님은 우리에게 와서 함께 한다. 누군가 신부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은 신랑이 되어 준다.”

제임스 프레데릭스는 크리슈나와 고피(목장 처녀들) 이야기로 하느님에 대해 전한다. 신적 사랑을 대변하는 크리슈나가 밤늦게 마을에 도착해 피리로 매혹적인 음악을 연주한다. 목장 처녀들은 깨어나 그와 함께 춤을 춘다. 그런데 처녀들이 크리슈나를 차지하려고 서로 질투하기 시작하자 크리슈나는 사라진다. 처녀들이 큰 슬픔에 잠기자, 다시 크리슈나가 나타나는데, 이번엔 모든 처녀들과 눈빛을 맞출 수 있도록 크리슈나는 여러 명의 분신으로 나타난다.

프레데릭스는 “그리스도인 역시 유대인과 이교도 같은 ‘타자’들을 배제한 채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는 잘못을 저지른다”면서, 이럴 때 하느님은 우리 삶에서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소유할 수 없다. 오직 하느님과 춤출 수 있을 뿐이다.”

복음서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도 아버지 곁을 지켰다고 해서 큰 아들이 홀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탕자라 해도 아버지는 그 아들 역시 사랑한다. “예수는 세리와 춤추며 죄인들을 위해 피리를 분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종교의 이야기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을 팔아넘기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의 신앙을 통해 제 신앙을 풍요롭게 한다.

4. 종교적 체험의 대화

1986년 10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 기도의 날에 각 종교 지도자들을 이탈리아 아시시에 초대해 함께 기도를 하였다. 그중에는 담뱃대를 든 인디언부터 유대교 랍비와 힌두 사제들도 있었다. 자기 고유의 종교전통에 따라 이들은 폭력의 중단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했다. 종교는 때로 분쟁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요한 바오로 2세는 “진실로 모든 순전한 기도자는 성령에 의해 부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 성령은 신비한 방식으로 모든 이의 마음 속에 있다”고 말했다. 각 종교전통 속에 깃든 기도와 단식, 공동예배와 순례 등은 “신을 향한 창(窓)”이다.

사진=한상봉

다양한 종교, 세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디자인

우리는 신앙인들의 삶과 연대활동, 신학적 대화와 종교체험을 서로 나누면서, 이 믿음의 창이 하느님을 엿보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이 과정에서 우정이 생기고, 상호이해가 깊어지면서 각 종교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이뤄진다. 우리가 성령의 현존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하느님이 다른 키로 연주되더라도 들을 수 있다.

인도 신학자 자크 뒤피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기독교 신학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자신의 믿음에 헌신하는 것과 다른 신앙에 문을 열어두는 것은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 둘은 정비례하여 자라난다”고 말했다.

뒤피는 세계 각 지역과 문화에 따라 발생한 종교들을 통해 “세계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디자인이 다면적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하느님의 영원한 언어는 하나의 특정한 역사/종교 속에 제한되거나 소진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혜로운 계획은 우리를 신적 생명으로 초대하는 서로 다른 문화와 시간, 공간으로 향하는 여러 길들을 마련해 왔다. 그러므로 구원의 형상과 경전, 교리, 도덕적 규정, 예배를 가진 종교들은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은총의 통로라고 봐야 한다. 그 종교의 다양함은 다함이 없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너그러운 깊이를 보여준다. 역사를 통해 참여하는 하느님의 다양한 패턴을 눈부시게 발견하는 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불가해한 신비를 엿보게 해준다.

“종교들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 가운데 일부다. 종교적 다양성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고유하고 풍부하며 복잡한 디자인이며, 단 하나인 하느님의 사랑은 다면적인 계획 가운데 일한다.”

부서진 세상 속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종교들은 선과 악, 은총과 죄가 뒤섞인 모호한 형상 아래 존재한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촉발된 그들의 긍정적인 지혜와 은총을 담고 있는 종교의 다양성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 모든 종교들이 사랑이신 하느님의 웅대하고 넘치는 자비에서 나온다. 엘리자베스 존슨은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은 멋진 문장으로 마무리 했다.

“우리가 우리의 진실과 다른 진실을 가진 종교 속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될까? 그것은 낯선 장소의 아름다움에 감동되면서도 내 집에 있는 듯한 안정감을 가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곳은 내 집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집이지만 세계의 영광을 지닌 한 부분으로서는 여전히 우리의 집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어가 모국어이지만 이탈리아의 소네트의 리듬에 전율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당신의 삶이 당신 자신의 믿음의 스토리로 쒸어진 문장임을 알지만, 다른 믿음의 스토리로 씌어진 삶도 있으며,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류의 응답으로 된 거대한 서사의 한 부분임을 알고 기뻐하는 것과 비슷하다.”
 

<동영상 강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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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2016-12-30 01:21:24
신학은 결국 이웃과의 만남과 대화에 의해서 발전합니다.
다른 신을 믿던 종교가 무엇이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착하며 고통받는 사람들과의 연대에 의해서 발전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