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 하느님은 중립적인 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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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하느님은 중립적인 분이 아니다
  • 한상봉
  • 승인 2016.12.15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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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4

끔찍한 가난

정치신학의 세례를 받은 라틴아메리카의 신학자들이 지배자들의 신학을 버리고 대륙의 가난한 이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데인주교회의 이후에 주교들은 가난과 그 원인,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강론의 핵심에 두기 시작했다. 주교들의 예언적 선언은 “집단적으로 발생한 이 참상은 그 자체로 하늘에 울부짖는 불의를 증언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회에 부여된 사명은 고통당하는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으로 이 심각한 가난을 바로잡는데 전념하는 것이었다.

1979년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개최된 주교회의는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했다. “우리는 수백만 라틴아메리카인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가난이 가장 파괴적이고 수치스러운 재앙임을 선포한다.” 그들은 가난은 자비의 하느님 앞에서 스캔들이며, 그리스도교 신앙과 모순된다고 선포했다. 가난은 죽음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음식과 먹을 물의 부족, 집과 교육, 의료시설의 부족, 임금착취, 고용기회의 부족 등은 결국 수명을 단축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거짓으로 만든다. 또한 사회적 무력감,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가난을 유지시키는데 공모한다. 죽음을 초래하는 정치경제적 구조에 깊이 침윤된 가난은 인간의 가치에 가해지는 일종의 ‘제도화된 폭력’이다.

엘리자베스 A. 존슨은 경제적 양극화와 다수에게 집중된 가난이라는 배는 “소수의 부를 위해 다수를 약탈하고 근본적인 인권을 부인하면서 항해를 지속하며 끊임없는 비극과 잔인한 죽음이라는 짐을 가득 싣고 있다”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역사의 ‘밑창’에 있다”고 비판했다.

하느님은 고통 속에...
고통을 넘어서는 해방하는 행동 가운데 존재하신다

전통신학은 전능한 왕이 권위로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모든 것을 만들고 세계를 지배하는 우월한 존재라고 강변해 왔다. 이 안에서 발생하는 가난과 고통의 상황은 하느님의 뜻으로 허락된 것으로 가정한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도록 고무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희생당한 예수님처럼 고통을 감내하며 기다리면 사후에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고 배웠다. 죽은 예수와 슬픔에 빠진 성모상을 들고 열 지어 운반하는 축제 행렬은 이런 신학을 형상화한 것이다. 삶은 어차피 눈물의 골짜기이며, 고통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 믿었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변혁을 위한 저항을 기대하기 어렵다.

<말씀이 우리와 함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분도출판사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 일부 사제들이 교회기초공동체(BCC)를 건설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그들은 농부들과 모여서 성경을 읽고 의미를 숙고하면서 변화를 위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난의 고통이 하느님의 뜻과 상충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특별히 가난한 이들 속에서 복음이 의미를 지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니카라과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가 솔렌티나메 공동체에서 농부들과 나눈 복음대화가 <말씀이 우리와 함께>(분도출판사)에 상세히 실려 있다. 복음서에서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보잘 것 없는 시골처녀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전갈은 복음이 가난한 이들을 통해 전해졌다는 상상력을 발동시켰다.

그들은 비참한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중립적인 분이 아님을 알았다. 그분은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 서 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이 더 거룩하거나 죄를 덜 지어서가 아니라 ‘상황 때문에’ 그들 편에 서신다. 이런 하느님의 당파적 사랑은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며 해방시켜서 비인간적인 고통을 멈추게 하실 것이다. 이들이 발견한 ‘해방’이라는 말은 귀하고 놀라운 통찰을 가능케 하는 언어이다. 성경은 이를 강력히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해방하시는 하느님 : 구약

해방신학의 결정적인 성서적 단서는 ‘출애굽’ 사건이다. 하느님은 이집트 노예들의 하느님이고, 그들의 고통에 응답하시고, 그들의 해방을 이끄시는 분이다. 고대세계에서 신은 전형적으로 지배자의 지위를 정당화하며, 심지어 왕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히브리의 하느님은 이집트 파라오의 편을 드는 대신에 자신의 권력을 비참한 노예들을 위해 행사했으며, 그들의 해방을 주장했다. 거룩한 하느님은 사막의 불타는 덤불에서 그 해방투쟁을 이끌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신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데려가려고 한다.”(탈출 3,7-8)

여기서 하느님이 고백한 ‘안다’라는 말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남녀가 육체적인 관계를 맺을 쓰이던 경험적인 언어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덤불에서 불타는 노예들의 고통을 보고 듣고 느꼈다고 전한다. 예언서와 시편과 잠언에서도 사회적 불의를 준엄하게 비판하고,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따뜻한 확신을 심어준다. 또한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들 편에 선 하느님께 합류하라고 신자들을 호출한다. 성전에서 바치는 번제물에 싫증이 났으며,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24) 하고 명령한다. 가난과 압제는 하느님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것이기에, 예언자들은 공적 숭배뿐 아니라 단식 같은 개인적 희생마저 거부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이사야, 58,6-8)

그림=JOSE IGNACIO FLETES CRUZ

해방자 예수 안의 하느님: 신약

구약의 불타는 덤불 속 하느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하느님은 ‘예수’라는 가난한 인격 안에 당신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말구유 위에 누워계셨으며, 곧 이어 지배자의 살인적 폭력을 피하기 위해 도망쳐 난민이 되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기념비적 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 출현은 “마구간 냄새의 출현”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8-19)

그런 예수님 자신의 생애와 쓰디쓴 고통과 격렬한 죽음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버림받은 자들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하느님은 십자가에 달린 희생자들, 국가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처형된 사람들 편에 선다. 거룩함이 머물지 않으리라고 명백히 예상되는 고문과 질병, 가난과 고통, 죽음의 자리에서 복음은 연민에 찬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주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이자, 부당함을 이긴 사랑의 승리이다. 가난하고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 속에 수척해져서 눈물로 얼룩지고 겁먹은, 상한 예수님의 얼굴을 보라. 하느님은 십자가에 달린 바로 이 예수님을 살렸기 때문에 역사에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부활은 모든 상처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축복된 미래가 있음을 최종적으로 약속한 사건이다.

맘몬에 대적하는 생명의 하느님

A Theology of Liberation by Dominican priest Gustavo Gutierrez

수십년 동안 유럽교회의 장상들과 신학자들은 세속사회와 무신론에 대항해 왔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무신론자나 비신자가 아니라 생명을 얻으려고 투쟁하는 비참한 인간에게 주목하였다. 여기서는 하느님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비인간적 상황과 투쟁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고백하느냐가 문제였다. 결국 해방신학의 투쟁 대상은 ‘우상숭배’였다.

우상숭배는 성경의 진실한 하느님 앞에 낯선 신들을 데려오고 전혀 신적이지 않은 것을 경배하는 행위이다. ‘맘몬’이라 부리는 이 신들은 ‘돈’이며, 돈이 가져다주는 만족이며, 그 돈을 벌고 유지하기 위한 권력이다. 스페인 정복자에게서 시작된 이 우상은 지난 5세기 동안 주류적인 사회시스템이었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에 이르기까지 탐욕은 돈을 신격화하여 절대적인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 맘몬은 희생자를 요구하며, 그 희생제물이 된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이다. 해방신학에 와서야, 불의에 직면하여 중립적인,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며, 계급차별적인 하느님의 이미지는 철폐되었다. 그동안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는 사회-교회 지배층이 왜곡시켜 온 우상과 충돌하며 성경이 지시하는 하느님을 복원시켰다.

가난한 이들과 지배자들을 동시에 해방하는 하느님

그러나 하느님을 꼭 가난한 자들을 당파적으로 선택하는 하느님이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하느님 사랑은 배타적이지 않으며 보편적이다. 이 보편적 사랑은 사회적 불의로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억압하는 자들의 회개를 사랑으로 요청한다. 하느님의 구원은 양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루카 1,50-53)

마리아의 노래에서 보듯이, 비천한 이들은 끌어올려지고, 배고픈 자들은 좋은 것으로 채워지면서, 한편 통치자들은 왕좌에서 물러나고 부유한 자들은 빈손이 되면서 ‘하느님의 자비’가 성취된다. 구원의 잣대는 “자유케 하는 사랑”이다. 그 목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위치만 바꿔 새로운 억압의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하느님 자비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은 그들이 받은 고통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성서적 정의의 실현-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엘리자베스 A. 존슨은 해방신학이 이론보다 ‘바른 행동’(正行)을 강조한다고 말하면서 “황혼을 날아오르는 부엉이처럼, 신학은 낮의 열기 가운데 습득한 것을 되돌아보며 행동으로 일어서게 된다”고 전했다. 정의로운 행동은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대로 고삐 풀린 마차가 달릴 때, “다친 사람을 붕대로 치료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며 고귀한 행동이지만,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누군가 고삐를 쥐거나 바퀴를 부수어 말을 멈춰야 한다.” 정의 목표는 하느님 통치 가운데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사회적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엘살바도르의 혼 소브리노(Jon Sobrino, S.J)는 “가난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상처로 남아 있다”면서 “이것은 오늘의 근본적인 상처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용어로 말하자면, 바로 하느님의 창조가 상처를 입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연민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 행동 속에서 그분의 신비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하게 된다. 초기교회의 사도들이 음식을 나누며 그리스도를 깨달았듯이,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면서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된다. 사랑은 다만 사랑하면서만 사랑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민과 연대성은 교회의 핵심 사명이다.

가톨릭신자 가운데 아직도 해방신학이 로마로부터 이단시 되었다는 인상 때문에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다. 1984년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발효한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대한 훈령>에서는 교회가 마땅히 가난과 억압으로 인한 충격적인 파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이 시대의 징표로 보고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맑스주의를 지나치게 남용하는 일이나 신앙을 정치적 현실적 차원으로 축소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2년 뒤에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라틴아메리카 주교들과 많은 토론을 거친 뒤에 브라질 주교에게 해방신학이 신학적 숙고과정에서 ‘새로운 무대’를 열었으며, 시의적절하고 유용한 신학이라고 전했다. 이어 1986년 교리성에서 발표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등 해방신학의 주장에 대해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현재 통용되는 <간추린 사회교리>라는 교황청 문헌에 편입되었다.

“가난한 이들, 소외받는 이들, 어느 모로든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다시 한 번 강력히 확언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사랑의 실천에서 우선하는 특별한 형태의 선택을 말하는 것으로, 교회의 전통 전체가 이를 증언한다.”(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간추린 사회교리, 182항)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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