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신학, 십자가에 달린 연민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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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십자가에 달린 연민의 하느님
  • 한상봉
  • 승인 2016.12.13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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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의 강독-3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 사진=한상봉

엄청난 고통 앞에서 무너지는 신정론

하느님은 대자대비하시고, 권능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이 세상이 당신의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하던 순진한 ‘신정론’에 기초한 역사적 낙관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곤두박질쳤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며, 비록 악이 한 때 창궐할 수는 있지만 결국 결정적 패배를 맛보리라는 개선주의 신앙도 의심받았다. 종교는 인간 개개인의 잘잘못을 가리는 심판관이며, 인간의 종교적 회심을 통하여 세상에 평화가 온다는 ‘개별적 신앙’ 역시 무력해졌다. 전쟁은 인간 개개인의 심성과 상관없이 인간성과 세상 자체를 파멸로 이끄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모한 폭력이었다.

그 정점에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있다. 당시 아우슈비츠 등 죽음의 수용소를 운영한 이들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600만명의 유대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하고, 그 육신은 불타는 화장터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하느님에 의해 ‘이성적으로 잘 질서 지어진 세계’라는 이상과 하느님 신앙에 균열을 일으키는 ‘지진’이었다.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를 지은 엘리자베스 A. 존슨은 뮌헨 근처의 다하우 수용소에서 경험한 것을 잊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수용소 박물관에는 알베르트 마인스링어라는 수감자가 입었던 헤진 줄무늬 옷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놓인 문서를 보면, 1938년 입소기록에는 그가 몸무게 114킬로그램의 가톨릭인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1945년 기록에는 몸무게 41킬로그램으로 줄었으며, 종교란에는 “없음”(Das Nichts)이라고 적혀 있었다. 존슨은 “그의 육신이 그토록 말라간 만큼 영혼도 그러했고, 선하고 은혜로운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다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고 증언했다.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 던져진 질문에 이것이었다. “하느님, 당신은 이 순간에 어디에 계셨습니까?” 마치 세월호 참사 이후 유족들이 호소했을 법한 참담한 질문이다. “하느님은 그 순간에 숨어있거나 침묵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죽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얼굴을 돌리셨다.

“하느님이 전능하며 완전한 선이라면 왜 그토록 많은 도덕적 악과 고통이 세계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신학자들은 적절히 대답하지 못했다. 하느님이 마음은 있었지만 그러한 나치의 폭력을 멈출 수 없었다면 하느님은 이미 전능하신 분이 아니다. 만일 하느님이 그런 폭력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면 그분은 이미 대자대비하신 분이 아니다.

전통적인 신정론(神正論)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징벌적 고통’을 주신다고 여겼다. 인간을 교화하기 위해, 천국을 향해 가는 인간을 정화하기 위해 하느님은 고통을 허용하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죽어간, 나치에 학살당한 이들은 대부분 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어린이도 100만명이나 된다. 홀로코스트를 두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값을 치렀다고 생각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이후로도 세계적으로 몇 차례의 인종청소가 이어졌다. 크메르루즈 정부의 폴 포트는 캄보디아인의 3분의 1을 킬링필드로 보냈다. 르완다의 후투족은 총과 마체테(날이 넓고 무거운 칼)로 이웃 투치족 80만명을 쓸어버렸다.

사회적 고통에 응답하는 정치신학

이런 납득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신학적 답변을 고심했던 세 명의 독일인 신학자가 있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영국군의 전쟁포로가 되어 철조망을 통해 함부르크가 잿더미가 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버림받아 십자가에 달린 자의 시각에서 하느님을 말하지 않는 신학은 아무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해줄 말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는 전쟁동안 그녀의 가족이 한 유대인 여성을 다락방에 숨겨주었고, 그녀의 오빠는 동부전선에서 죽었다. 그는 전후 죽음의 수용소를 방문하고 “아우슈비츠의 측면에서 보자면, 하느님이 전능하다는 가정은 이단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16살에 독일군에 강제 징집되어 연합군의 탱크 포격으로 전멸당한 부대원들을 목격했다. 며칠 전까지 전쟁의 공포와 웃음을 나누었던 동료들의 ‘말없는 비명’을 통해 신앙적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는 “아우슈비츠에 등을 돌린 채로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묻는 신학 고유의 임무는 더 이상 수행될 수 없다”고 했다.

이들이 발견한 것이 ‘정치신학’이다. 정치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공공영역에서 책임감 있게 유지시키며, 희생자들과 연대를 이루는 ‘연민’을 믿음의 본질이라고 천명했다. 이들이 발견한 고통은 생로병사나 개인적 차원의 실패 등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이런 개인적이고 실존적이며 사적인 고난 너머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부당하게 서로를 향해 가하는 폭력에서 비롯된 끔직한 고통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끝없는 가난과 기아, 노예, 가정폭력, 강간, 살인, 전쟁, 인종학살 등이다. 이런 폭력적 상황은 구체적인 인간을 파괴할 뿐 아니라, 인간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까지 파괴한다.

2009년에 출간된 엄기호의 <아무도 돌보지 마라>는 책처럼, 신자유주의와 사회-정치적 구조악은 남을 돌볼 겨를을 만들지 않는다. 내 생존이 다급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소비사회의 물질적 만족을 탐닉하면서 자신의 세계 안에 갇힌 채 타인의 고통을 지워버리려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말한 ‘무관심의 세계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여전히 마음의 평화만을 강조하는 이런 부르주아신학에 저항해서, 정치신학은 “부르주아 종교의 개인화에 도전장을 내밀며 평화로운 고요에 머무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의 악에 저항하고 질문하며 고통당하는 하느님”에 주목한다고 존슨은 말한다.

파토스의 하느님, 연민의 하느님

정치신학에 영감을 준 사람은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이다. 그는 “오직 고통당하는 하느님만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하며, ‘고통당하는 하느님’이라는 강력한 상징을 제시했다. 하느님은 세상의 고통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그 아픔을 신적 존재 안에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마치 참혹한 죽음을 막기 위해 스스로 죽임을 당한 본회퍼 자신처럼, 또는 예수님처럼.

이 과정에서 정치신학자들이 발견한 사람이 유대인 종교학자 아브라함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이다. 헤셸은 <예언자들>이라는 책에서, 긍휼함(연민)으로 불타는 하느님의 마음을 보고 굳건해진 예언자들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회적 악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한 희망과 위로를 선포할 수 있었다. 그 힘의 원천은 하느님의 파토스(Pathos, 연민의 힘)였다. 파토스란 ‘고통의 느낌’이며, 가련한 인생을 돌아보는 이런 파토스를 하느님이 강렬하게 느끼신다고 고백한다. 하느님은 무색무취, 늘 평정심을 유지하고, ‘제일의 원인’처럼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느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하고 보살피고 슬퍼하고 불의에 분노하고 독려하며 재촉하는 분이다. 그분은 슬픔에 잠기고 약속하고 자비를 베풀며 기뻐하고 위로하고 눈물을 닦아주며 더 많은 사랑을 준다. 이런 하느님은 성경에 드러난 유대적 하느님이다.

그리스 철학의 이분법은 영혼과 물질을 가르고, 불멸의 영혼과 이성적인 힘에 특권을 주면서 몸과 감정의 영역은 저급한 것으로 멸시한다. 이런 관점에 서면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소동과 감정의 밖에 존재하게 된다. 신적 존재는 변화가능성이 없고 마땅히 고통당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일원론에 기초한 유대적 하느님은 초월적이지만, 한편 자유롭게 역사에 개입하시고, 인간들과 계약을 맺으며, 말과 행동으로 열정적으로 사건에 참여하는 분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하느님의 생각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은 하느님께 무관심한 것이며, 민감하게 세상의 고통을 느끼며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하느님 백성이 되는 길이다.

몰트만: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

위르겐 몰트만

정치신학자들이 이참에 발견한 것은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고 울부짖을 때, 이 지옥 속에서 하느님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고통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그 처참함을 끝까지 체험하셨다는 고백이다. 여기서 ‘말씀’이신 예수님이 받은 고통은 곧 강생한 하느님의 고통이라는 게 몰트만의 생각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과 함께 실제로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버리는 아버지와 버림받은 아들이 성령 안에서 고통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셨듯이, 이분처럼 고통받는 이들에게 생명이 온다는 희망이 주어진다. 이를 존슨은 “가스실에서 죽어간, 잔인하게 살해된 사람들이 부활함으로써 하느님은 이 슬픔을 영원한 기쁨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이런 희망 덕분에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의지는 불타오른다”고 했다.

죌레: 침묵의 외침

한편 도로테 죌레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함에 도전한다. 하느님의 중요한 자질은 ‘힘’이며, 주요임무는 ‘지배’이고, 하느님은 인간의 독립을 가장 두려워하며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한다는 관점을 버린다. 그는 오히려 하느님은 전능한 지배자가 아니라 ‘사심 없는 사랑’의 존재라고 강조한다. 강조점의 이동이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무력하게 죽게 하셨다. 예수님은 군대도 없이, 그를 구원하는 어떤 마술도 없이 비폭력적인 방식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느님의 힘이란 폭력적 힘이 아니라, “아스팔트의 틈을 뚫고 솟아오르는 풀” 같은 생명의 힘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힘은 고통 한가운데서 들리는 생명의 조용한 외침이다. 죌레는 우리가 오로지 하느님의 일부가 될 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오로지 타인에게 가해진 모든 종류의 부당한 고통에 저항할 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도로테 죌레

메츠: 하느님을 향한 연민

메츠는 ‘고통받하는 하느님’이라는 상징이 고통을 비밀스럽게 미화시킬 위험성을 경고한다. 고통스런 상황을 합리화하고 전통신학에서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식의 함정에 빠져서 희생자들의 외침에서 드러나는 긴장을 흩어버릴 수 있다고 염려한다. 메츠는 오히려 ‘기억’과 ‘애도’를 통한 저항을 강조한다.

1. 기억하기

“나를 기억하여 행하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핵심은 예수님의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은 역사에서 부당하게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기억을 일깨운다. 이것은 ‘위험한 기억’인데, 압제자들은 그 기억을 묻어버리려고 하지만, 우리는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되살려냄으로써 승리를 빼앗아 올 수 있다.

세월호 유족들이 “이 아이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세월호 참사 당일의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호소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억울한 죽음과 짓밟힌 이들에 대한 기억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맞물리면서 “선한 시간이 오면 그들 역시 다시 평가된다는 희망”의 근거이다. 지금 남을 해치고 죽이는 자들의 승리가 결코 마지막 말이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한 기억은 모든 연민을 다림질해버리는 숨 막히는 따분함에 도전한다. 이런 진부한 삶에 도전하는 위험한 기억은 불의에 저항하는 행동을 통해 신자들을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며,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경계한다.

요한 밥티스트 메츠

2. 슬퍼하기

지금은 아무도 미사 시간에 슬퍼하거나 울부짖지 않고 깔끔하게 기도하지만, 고통받는 이들이 경험한 슬픔과 탄원은 시편과 예언서, 복음서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다. 메츠는 <욥기>를 최고의 가이드로 삼는다. 욥은 사업에 망하고 병들어 있는 가운데 세 친구의 방문을 받는다. 그들은 입을 모아 그의 고통이 죄 때문이라며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하느님께 항변한다.

무고한 고통에 대하여 충분히 슬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슬픔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 일어남에 대한 고발이며, “하느님께 닿는 고통”의 울부짖음이다. 결국 이러한 슬픔이 하느님의 응답이 있으리라는 고뇌에 찬 희망을 낳는다. 이처럼 우리는 기도 가운데 부르짖고 저항하며 슬퍼하고 분노를 외치며 이런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여전히 세계는 잘 부서지고 죄에 가득 차 있으며, 납득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여기에 논리적인 해답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 베유처럼 “사랑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정치신학은 공공영역에서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롭고 친절하게 살 수 있으며, 공동선을 위해 아름다운 식탁을 차릴 수 있다고 믿는다. 고난에 찬 상황에서도 이런 행동은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 가운데도 계시며, 그 고통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행동 속에도 계신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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