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 사랑, 행동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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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 사랑, 행동하는 사랑
  • 한상봉
  • 승인 2016.05.25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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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여덟 단계-5
ⓒ한상봉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7-8)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그 사랑의 모상을 반영할 때까지 하느님을 알지 못할 뿐더러 참다운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보다 우리 존재 깊숙이 새겨진 것은 없다. 그리고 14세기 신비가인 리챠드 롤이 말한 대로 “우리의 사랑이 순수하고 완전하다면, 우리의 마음이 사랑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심수봉의 노래 가운데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곡이 있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 할거야.”라고 노래한다. 우리가 대중가요에서 만나는 사랑은 특정한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하지만, 이런 사랑은 <아가>의 사랑만큼 하느님의 사랑을 상기시킨다.

이를 두고 로버트 엘스버그는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에서, “사랑이 우리를 더 생기 있게 해주고, 다른 이의 선에 몰두하여 모든 분리감을 잃어버리게 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게’ 해준다.” 이게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지루하고 회색빛으로 보이던 것들이 색깔을 입는다. 삶은 목적과 약속으로 가득 차고, 닫혀 있던 것이 갑자기 열린다. 좀 더 관대해지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 준 선물에 알맞은 사람이 되려고,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 분발하게 만든다.

도로시 데이의 젊은 시절

도로시 데이도 그런 사랑을 경험했다. 도로시는 아나키스트이며 자연주의자인 생물학자 배터햄 포스터와 사랑을 나누었다. 법적 혼인관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행복한 동거인이자 ‘연인’이었다. 그러나 포스터는 종교적 태도를 반기지 않았다. 종교는 기득권층의 옹호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로시는 포스터처럼 자연을 맹렬히 사랑하고, 이런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께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아이의 출산뿐 아니라 아이의 세례를 두고 의견이 맞서서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도로시 데이는 “나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딸 타말의 세례 문제로 결국 포스터를 떠나보내야 했다.

아기의 출산이라는 자연적 행복을 넘어서, 도로시 데이의 사랑은 ‘확장적 사랑’이었다. 포스터에 대한 사랑, 달에 대한 사랑, 지구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가난한 이들과 낙오된 이들에 대한 사랑이 더 큰 사랑, 곧 하느님 자비의 바다에 닿게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랑이 나중에 가톨릭일꾼운동에 통합되었다.

어떤 이들은 안락과 소유, 명성 따위의 자신에 대한 사랑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있다. 아니면 몇 사람만을 선택하여 벽을 쌓기도 한다. 어떤 사람, 가족, 그들의 나라, 혹은 그들의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사랑하기로 작심한다. 이것들도 물론 가치는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더 깊은 초대’를 받았을 때 수락할 용기를 내는 것이다. 우리 사랑의 숨겨진 깊이를 헤아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확장되는 사랑 안에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초라하고 일상적인 것들까지 무한한 하느님 사랑의 연장임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자기 안팎에 머물지 않고 확장되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을 우리는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사랑하기 위해 성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성인이 될 수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그리스도교 신앙은 “온 마음과 온 정신, 그리고 힘과 영혼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 못지않게 중요한 게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정양모 신부는 이를 두고 “하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敬天愛人)고 읽는다. 결국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일 텐데, 물론 쉽지 않은 요청이다.

이런 사례를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부모에게서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와 몰로카이의 다미안 성인, 그리고 오스카 쉰들러 같은 사람이 모범을 보여주었다. 쉽지 않지만 가능한 사랑이다.

이 기준이 너무 높다면, 복음에서 예수가 제시한 사랑은 좀 더 간단하다.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 너희는 받아 주었고, 내가 병 들었을 때 너희는 나를 찾아주었다.”는 기준이다. 예수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했다면 바로 나에게 한 것”(마태 25,31-46)이라고 말한다.

시몬 베유

성인이란 이런 신비한 대칭에 내포된 의미에 따라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가 이웃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믿었다. 길가의 벌거벗고 피 흘리는 사람들, 우리가 빵을 나누는 굶주린 사람들, 우리가 짐을 가볍게 해줘야 하는 외로운 사람들 속에 예수가 있다고 믿었다.

어찌 보면 우리 자신 역시 한편으론 걸인이고, 한편으론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행하였으니 하느님의 아들이고, 부족한 사랑을 채우려고 사랑을 갈망하기에 (영적으로) 걸인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 때로 우리는 영적으로 헐벗고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사랑은 ‘이타적 사랑’이다. 토머스 머튼은 “자기만족에서 오는 행복은 가짜이며, 일시적이고 항상 슬픔으로 끝난다. 그런 가짜 행복은 우리의 정신을 편협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참다운 행복은 이타적인 사랑에서 발견된다. 이타적 사랑은 나눌수록 증가되는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사랑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사랑이기 쉽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완전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부서지기 쉽다. 그래서 성인들은 ‘우리가 버릴 때 참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랑’을 말한다.

‘Give and Take’라는 갚음에 대한 기대를 걸고 하는 사랑은 시장법칙에 불과하다. 이것은 시몬 베유가 말한 ‘중력의 법칙’에 매여 있는 사랑이다. 참다운 사랑은 중력의 법칙을 거부한다. 참다운 사랑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가능한 까닭은 요한복음에서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사랑합니다.”(1요한 4,19)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이미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영에 머무는 자는 그분처럼 사랑한다.

이 사랑의 반대 극점에 있는 것이 사실상 지옥이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어떤 시골사제의 일기>에서 “지옥은 더 이상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베르나노스는 “가장 밑바닥에 내려간 인간도 비록 그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하는 힘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능력은 영혼의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고, 구원이란 다만 이 보이지 않는 능력을 재발견하고 배양하는 데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어떻게 사랑할까?...행동하는 사랑

아빌라의 데레사는 이미 경험한 우리의 사랑법에서 출발한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란 “지상의 두 사람이 깊게 사랑해서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눈길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하는 것 같은 관계”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추상적으로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행동을 낳으며, 행동으로 발전하는 사랑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사랑하는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한다. 이웃을 적극적으로 끈질기게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그러면 그런 사랑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와 우리 영혼의 불멸을 더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웃을 완전히 이타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어떤 회의도 우리 영혼 속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엘스버그는 결국 “우리는 사랑에 대해 꿈꾸는 것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 우리는 실제로 사랑함으로써 사랑하기를 배운다.”고 말한다. 사막교부인 은수자 테오판은 “겸손은 겸손한 행위로 얻고, 사랑은 사랑의 행위로 얻는다.”고 말했다. 매일 반복되는 사랑의 행위는 사랑의 습관을 만들어 준다.

여기서 장애가 하나 있다. 내가 사랑을 했는데, 그 사랑으로 되갚지 않는 사람을 나는 과연 계속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그런 사랑은 ‘헛짓’이라는 생각이 들 때 어찌해야 할까? 그 해답을 엘스버그는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를 통해 들려준다.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데레사 성인은 자신을 “작은 꽃” 또는 “아기 예수의 장난감”이라고 불렀는데,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을 토대로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 만남들, 작은 모욕 등에 사랑으로 응답하려고 노력했다. 이 사랑의 방법을 “작은 길”이라 불렀다. 데레사는 이 길을 실천함으로써 삶의 자잘한 일상을 사랑의 용광로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데레사는 하느님의 전사, 사제, 교회박사, 순교자 등에 대한 성소를 느꼈지만, 자신의 고유한 성소는 “사랑 그 자체”라고 여겼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이다.” 그는 이승을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사명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영혼들이 좋으신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나의 작은 길을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나의 이러한 갈망이 채워진다면, 세상 종말까지 이 지상에서 나의 천국을 지낼 것입니다. 그래요, 나는 나의 천국을 지상에서 선한 일을 하면서 보낼 것입니다.”

데레사는 수도생활 중에 동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려는 충동을 절제하는 가운데, 이 모든 순간을 인내와 용서의 기회로 삼았다. 결국 엘스버그의 말대로 “일상 안에서 사랑의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영웅이 되는 순간이며, 행복과 거룩함으로 가는 길에서 한 걸음씩 더 내딛는 행동이다.”

“수녀원 안에 적은 없다. 그러나 자연히 어떤 수녀는 좋아하게 되고, 또 다른 수녀는 마주칠 기회를 피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피하고 싶은 수녀를 사랑해야 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성서에서도 ‘너희들이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죄인들도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한다.”(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사랑을 선택하기

소화 데레사 성인이 죽던 해, 1897년에 태어난 도로시 데이는 처음에 소화 데레사의 삶이 너무 평범하다고 느꼈다. 도로시는 오히려 교회개혁자였던 아빌라의 데레사나 쟌다크 같은 성녀에게 더 이끌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로시 데이는 소화 데레사의 가르침에 공감하고, 여기서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작은 것들의 중요성을 무시한다. 작은 것들을 위해 항의하거나 입장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성인이 되도록 불리었고, 거룩함이란 사랑의 실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데레사의 작은 길은 도로시 데이에게 “무시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실천적 지혜로 작용했다. 환대의 집은 특별난 운영규칙이 없다. 이곳은 온갖 사람들의 집합체였다. 순례자와 학자들, 노동자와 부랑자들, 거룩한 바보와 미친 사람들, 젊은이와 노인들, 하층민, 쓸모없는 사람들이 모인다. 이곳에선 데레사 성인이 말한 ‘사랑만이’ 이 집구석을 유지시킨다.

사랑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도로시 데이는 환대의 집에 살면서 “내 짐이 너무 무겁고, 너무 많은 사람이 있고, 내 사랑이 너무 작다.”고 하면서도 “이 미치광이 노인을 사랑하길 원한다면 언젠가 당신은 그렇게 사랑하게 된다. 당신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에 달린 문제다.”라고 말했다.

데레사가 살았던 체계적인 수도원과 무정부적인 환대의 집은 너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어디서나 비슷하다. 식탁에 앉아 소리내어 먹으면서 신경을 거슬리는 사람을 참는 것보다 추상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이처럼 일상의 작은 일을 하며 치러야 히는 단련이 오히려 우리의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우리는 용서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비로소 용서를 배우고, 우리의 인내가 불가피하게 시험될 때 인내를 배우게 된다.

토머스 머튼은 수도공동체를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길을 배우는 학교”라고 말했다. 수도원에 성인들만 모여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맘에 안 맞는 바보들이 있겠지만 그들을 쫓아버리는 것으로는 행복을 배울 수 없다. 그들과 더불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하기 때문에 공동체는 사랑의 학교다. 그런 점에서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때때로 자연적 사랑과 지지의 장소이지만, 때로는 숨 막히게 만드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가족도 ‘애덕의 학교’다.

우리가 가장 친밀하게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도 매순간은 아니더라도 매일 같이 참고, 용서하고, 인내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라는 도전을 받는다. 그리고 이따금 가족과 공동체 동료로부터 위로와 형제애로 아주 짧은 천국을 맛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간은 고독하며, 그래서 더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을 연습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빵을 쪼개면서 그분을 알고, 빵을 쪼개면서 서로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 우리 모두는 긴 외로움을 알고 있고, 유일한 해결책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공동체와 함께 온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토머스 머튼)

ⓒ한상봉

사랑으로 얻는 ‘다른 시선’

사랑하면 사물이 달리 보인다. 초라하고 낡아빠진 어린 시절의 책상도, 아버지의 헤진 스웨터와 어머니의 오래된 찻잔도 겉모습 아래 숨겨진 진실을 느끼게 한다. 사랑하던 사람의 만년필과 안경도 귀중한 물건이 된다. 낡아서 오히려 애잔함을 자아낸다. 사랑은 이런 모든 것을 통합해 은총의 도구가 되게 한다.

성인들은 모든 인간과 자연 속에서 하느님 은총의 흔적을 감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 안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절실하게 하느님을 느낀다. 이런 상황을 로버트 엘스버그는 “이처럼 모든 것은 제각기 우리를 우리의 진정한 집으로 초대한다.”고 표현했다. 성인들은 보이지 않는 실재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을 조율하는 사람들이므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그물망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온 우주가 하느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깨달음이다. 이런 ‘사랑의 빛’에 깨어 있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랑을 갈망한다. 이게 앞서 말한 확장된 사랑이겠다.

나치하에서 유대인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다카오 수용소에 갇힌 잉겔마르 운자이티그 신부의 사례를 보자. 1944년 12월 수용소에 장티푸스가 발병해 일부 수용인들이 지저분한 막사에 격리 된 채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이 병자들을 위한 잡역부가 소집되었는데, 잉겔마르 신부는 죽음을 무릅쓰고 다른 사제 20명과 함께 자원했다. ‘다카오 수용소의 지옥’이라는 이 격리된 공간을 사랑과 위로와 돌봄과 고해성사를 통해 지성소로 만들었다. 나치들은 병동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곳은 인간애가 표현되는 특별한 자리가 되었다. 수주 후에 잉겔마르 신부는 고열에 시달리다 1945년 3월 2일, 서른 네 살 생일 다음날 죽었다. 얼마 후 수용소는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죽기 바로 전에 쓴 그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은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승리는 하느님 편에 있어야 합니다. 비록 때때로 세상에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에게 쓸모없는 일로 여겨진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사랑에 깨어있음을, 그리고 그 사랑이 피조물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께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오래 지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랑과 평화가 곧 다시 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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