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하느님의 노동, 노동은 기도처럼
상태바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 노동은 기도처럼
  • 한상봉
  • 승인 2016.05.11 16: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여덟단계-3

“노동은 단지 우리가 날마다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일을 함으로써 끊임없이 창조사업에 동참하며, 물질과 맞서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을 형성시킨다.”(로버트 엘스버그)

우리가 매체를 통해 날마다 마주치는 ‘광고’는 행복에 대해 쉽게 말하지만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노동할 때보다 여가나 휴가를 보낼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일이란 휴가나 여가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사막이나 동굴에서 홀로 살던 수도승들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이것은 일 자체를 강조한다기보다, 노동이 영적인 삶을 방해하기는커녕, 우리는 일을 통해 치유되고, 지루함과 슬픔을 몰아낸다고 믿었다. 여기에 굳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이대지 않아도 좋다. 일은 복음적 명령 이전에 인간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막교구 폴 아빠스는 종려나무로 바구니를 짜면서, 바구니가 광에 가득 차면 태워버리고 다시 짜곤 했다. 그는 수도승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고, 거룩함의 길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일이나 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 삶을 계속할 수 없다.

by Ade Bethune

이상대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 레오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었으나, 귀족사회에서 이룬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거룩함을 추구했고, 그러한 거룩함을 가난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오히려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리 고달파도 아침 일찍 일어나 온종일 일하고 기본적으로 인생은 선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밤이면 잠자리에 든다. 오늘 하루의 에너지를 온통 바치고 나서 잠을 청하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를 다룬 창세기의 내용처럼, 농민들은 그들의 노동을 징벌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동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거룩한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한가한 사람들에게 주는 말>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시골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며, 내가 받은 교육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눌 것입니다. 어떤 단체를 세우거나 책을 써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형제처럼 살아가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라냐에서 농민들과 소박하게 살았으나, 집에 와선 비단옷을 입고 자야하는 삶에서 갈등을 느끼며 과로워하다 아스타포보 마을 철도역장 집에서 82세로 숨졌다.

여기서 로버트 엘스버그는 이상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이상처럼 살기는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올바른 삶이란 “보편적 도덕률이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을 때 가능하다.”고. 세상이 주는 세속적 지혜, 곧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원을 타면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원하는 대로 늦잠을 자도 될 텐데!’하는 환상을 거부하고 “이기심과 경쟁보다 사랑과 연대를 나누며 사는” 비전으로 매일매일의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 노동은 기도처럼

레프 톨스토이

톨스토이가 발견했지만 살지 못한 이상은 기도와 일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의 삶이 기도와 공부, 노동으로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베네딕토는 기도라는 거룩한 영역과 노동이라는 세속적 행위를 갈라놓지 않았다.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이므로, 마찬가지로 노동 자체도 기도가 될 수 있다. 기도란 단순히 얌전하게 눈을 감고 손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노동이 기도할 때처럼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물 때 노동은 곧 기도가 된다. 설거지를 하거나 정원에 물을 주거나 하는 단순한 노동뿐 아니라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들길 때처럼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계를 다룰 때에도 “일이 담고 있는 선을 존중”한다면 기도행위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현존 연습>을 쓴 부활의 로랑 수사는 80살에 죽기까지 수도원에서 40년 동안 부엌일을 하며 냄비와 프라이팬을 뒤집었다. 그의 영적 삶은 단순했다. 그는 아주 단순한 일을 하면서 “하느님이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일 가운데 계시다.”고 확신했다. 그는 말한다. “나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 없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으면서, 이것저것 청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마치 성체조배를 할 때처럼 깊은 고요 가운데 하느님을 모신다.” 이처럼 로랑 수사는 성무일도와 미사 같은 전통적인 영적 수련행위와 얼룩을 없애고 야채를 다지는 등 날마다 하는 일을 구분하지 않았다.

결국 거룩함은 그 일의 성격에 달려 있지 않고 그 일을 하는 내적 태도에 달려 있다. 로랑 수사는 이를 두고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일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평범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 하는 데 있다. 하느님은 일의 위대함을 보지 않고 그 일을 깊은 사랑으로 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룩한 일은 따로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서로 섬기며 자선을 베푸는 기회요 기도가 될 수 있으며 아름답고 진실하며 생명을 주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를 엘스버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접수를 하고 요금을 받거나 식품점에서 계산하면서도 은총과 사랑으로 일터를 거룩한 곳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성인들이다. 당신은 학교나 골목길이나 바다에서, 교회나 기차, 가게와 찻집에서 성인을 만날 수 있다.”

고유한 나의 길을 따라서

“나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함과 구원의 문제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며 참된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토머스 머튼)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 가야하는 정해진 길은 없다. 바람직한 직업도 없다. 다만 자기 고유의 길이 있을 뿐이다. 성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성 베네딕토는 수도원에서, 성 프란치스코와 성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을 통해 그들만의 고유한 길을 찾았다. 물론 예수님처럼 모두 십자가에 못박힐 필요도 없다. 목수였던 유용주 시인은 예수는 못박힘으로써 가장 위대한 목수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목수이면서 시인의 고유한 길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못박힘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수가 되었다
그도 처음 목수 일을 배울 때에는
무수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내리쳤으리라
으깨어진 손가락을 장갑으로 감추우고
20년 가까이 세상 공사판을 떠돌아다닌
우리 主 容珠 그리스도
지금 그의 일당은 사만 오천원이다
하루 한 편,
온몸으로 시를 쓰는

(가장 큰 목수, 유용주)

샤를 드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거룩하고 완전해지라고 초대하시며, 당신을 더 가까이 따르며 당신 뜻에 복종하라고 부르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영혼이 똑같은 일로 각자의 사랑을 당신께 보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똑같은 사다리로 천국에 오르고 똑같은 방식으로 선을 행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천국에 이르는 나의 길은 어떤 길인가? 나는 어떤 삶으로 나 자신을 성화시켜야 하는가?”

만약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내 고유한 자리에서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은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 길을 발견한다면 모든 길이 꽃길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발견하더라도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성인이 성인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라고 느끼고 전적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로버트 엘스버그는 말한다.

도로시 데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회심: 도로시 데이의 응답

도로시 데이의 ‘회심’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응답 가운데 나타났다. 특별한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공감하던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성인들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하면서도 한편에선 이렇게 물었다. “내 마음 속에는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왜 애초에 악을 방지하지 않고 그 치료에만 그토록 매달리는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는 것도 좋지만 노예제도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성인들은 없는가?” 교회 안에서 답을 찾지 못한 도로시 데이는 종교에 등을 돌리고 진보정치에 희망을 두었다. 그러나 역사의 한복판에 참여하며 분투했던 젊은 날의 도로시 데이에게 다가온 것은 외로움과 도덕적, 영적 혼란이었다.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되기에는 너무 ‘종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로시 데이는 딸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적 행복’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길을 찾다가 결국 가톨릭에 귀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의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이민자들의 교회로 여겨졌다. 그러나 진보적인 그의 동료들에게 가톨릭은 부자들의 교회요 기득권자들의 옹호자로 여겨졌다. 이들에게 가톨릭교회에 입교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배신으로 보였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의 신앙과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는지 고심했다.

1927년에 세례를 받고 5년 동안 방황하던 도로시 데이는 워싱턴의 성모무염시태 성당에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직후에 ‘가톨릭일꾼운동’의 공동창립자가 된 피터 모린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하느님의 응답은 하늘에서 들려오지 않고 강한 53살의 프랑스 억양을 지닌 덥수룩한 사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피터 모린은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서에 담긴 사회적 복음을 행동으로 옮길 운동을 제안했다. 더 이상 교회와 정부의 프로그램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에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더욱 선해지는 사회’를 살아가는 가톨릭일꾼운동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바다 한가운데 섬처럼 복음을 사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자발적 가난을 살고, 가난한 이들의 당장에 필요에 응답하면서,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고,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운동이었다. 이른바 ‘세상 속에 더 깊이 내려가고, 세속적 가치와 전혀 다른 삶을 실천하는 운동’이다. 그들은 1933년 5월 1일 노동자 성요셉 축일이자 메이데이에 유니온광장에서 <가톨릭일꾼> 신문을 배포하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는 성인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 도로시 데이는 “네가 바로 그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남은 생애 50년 동안 이 길에서 행복했다.

부르심 속의 부르심

도로시 데이가 아나키스트로서 살다가, 다시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듯이,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어쩌면 거듭 새삼 새로운 부르심에 직면할 수 있다. 어떤 책을 접함으로써, 또는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아님 뜻밖의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는 이런 체험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보통 ‘부르심’이라고 하면 수도자가 된다거나 사제가 되라는 부르심으로 좁게 해석하기 쉽지만, 수도성소나 사제성소 안에서도 더 근본적인 부르심에 노출될 수 있다.

평신도의 경우에도 자신이 그동안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자기실현을 해 왔다고 장담하더라도 뜻밖의 전혀 다른 ‘부르심’에 직면할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면서 그 일에서 새로운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과업에 헌신하라는 요청을 받을 수도 있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회심’이란 단순히 죄에서 돌아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거룩함을 찾는 이에게 ‘회심’은 ‘참된 부르심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회심이 일어나면 무질서한 마음을 벗어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예전에는 평범한 삶에 짓눌려 버거웠지만 회심한 뒤로는 타오르는 불길로 밝게 빛난다.” 이러한 회심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생명력을 준다. 마더 데레사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걸 보고 어느 기자가 “저라면 백만 달러를 준다 해도 이 일을 할 수 없을 겁니다.”하고 말하자, 그녀 역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답했다.

‘의미’ 있는 노동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일 속에서 충만한 의미를 찾는 일이다. 의미가 생기면 그 일은 무엇이든 어디서라도 기쁨으로 용약한다. 예수회 사제요 신비가요 과학자였던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되어 살아있는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으며 맛보는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가 일하거나 활동할 때 우리를 기다리신다. 펜이나 삽, 빗이나 바늘 안에도 계신다. 우리가 자신이 하는 일에 환 획, 한 줄을 긋고 한 땀 한 땀 뜨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정성을 기울이고 의지를 다해 완성해 나가면 최종 목표에 다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거룩함이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마음을 다해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가 “그때에 비로소 성인들이 말하는 노동의 진정한 행복을 맛본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고유한 길(노동)을 통해 기쁨으로 충만한 하느님께 이르는 거룩함이다. 그게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삶의 목표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