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버리는 법-영적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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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버리는 법-영적 가난
  • 한상봉
  • 승인 2016.05.03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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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여덟 단계-2
Lady Godiva by John Collier, c. 1897, Herbert Art Gallery and Museum

고디바 백작부인의 몸보다 아름다운 영혼

지난 2월 14일부터 26일까지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본산이라는 뉴욕에 다녀왔다. 뉴욕의 월가 인근의 거리에 놓여있는 황소의 동상도 보았다. 관광객들은 이 황소의 불알을 만지면서 ‘횡재’를 기대했다.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렵게 이집트에서 탈출한 뒤에도 광야에서 황금 숫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함으로써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는데, 현대판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다. 성경에서는 모세가 레위인들을 소집해 이 송아지상을 갈아서 여기에 절한 이들에게 물에 타서 먹이고 나서 칼로 베어 죽였다고 기록하였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이들이 세운 송아지상은 이집트에서 달아날 때 훔쳐 온 금붙이였는데, 그들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이집트의 유산’이라고 봐야한다. 하느님이 경멸한 것은 ‘무신론’이 아니라, ‘우상숭배’였다. 고대사회에서 무신론이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고, 다만 ‘참된 하느님’과 ‘우상’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교종도 <복음의 기쁨>에서 ‘통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를 우리시대의 ‘우상’이라고 지목한 바 있다.

때마침 내가 뉴욕에 도착한 날은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情人節)였다. 밸런타인데이의 유래는 이렇다. 3세기경 로마 황제는 강한 군대를 보유하기 위해 입대하는 병사의 결혼을 금지하였는데, 집에 두고 온 처자식으로 군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해심이 깊었던 밸런타인 주교가 황제의 칙령을 어기고 몰래 병사들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얼마 후 밸런타인 주교는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순교하게 되는데 그날이 2월 14일이다.

많은 젊은 남녀들이 밸런타인 주교를 추모하면서 이날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카드나 꽃을 선물로 교환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이날 주로 선물하는 것이 초콜릿인데,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고디바 초코릿’이다. 이 초코릿은 1926년 벨기에의 왕실전용 초콜릿 제조업자가 실존 인물인 영국의 고디바 백작부인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자신이 만든 초콜릿에 ‘고디바’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지금은 터키의 글로벌 식품회사에 인수되었다.

영국 코벤트리 지방을 다스리던 메르시아 백작 레오프릭 3세라는 영주가 있었다. 그는 소작인들에게 너무 많은 세금(소작료)을 부과해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딱하게 여긴 영주의 아내, 젊고 아름다운 부인 레이디 고디바(Godiva, 990-1067)는 남편에게 세금을 경감해 주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영주는 부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뜻으로 발가벗은 상태에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올 수 있다면 소원대로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레이디 고디바는 고민 끝에 백성들을 위해 발가벗고 말위에 올랐다. 가느다란 여인의 몸을 가리는 것은 길게 자란 금발뿐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코벤트리 사람들은 레이디 고디바의 고마운 용기에 보답하고자 모두 외출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도 일체 밖을 내다보지 않도록 결의를 하였다. 고디바 부인이 발가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성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영주는 약속대로 세금을 감면해 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덧붙여진 이야기는 ‘피핑 톰(Peeping Tom 몰래 훔쳐보는 톰)’이란 사람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닫혀 있는 창문의 커튼 사이로 지나가는 고디바 부인의 누드를 엿보았고, 이 때문에 저주를 받아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한다.

고디바 백작부인의 이야기는 ‘영적 가난’에 대하여 깊은 의미를 던져준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에서 ‘영적 가난’을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전한다. 고디바 부인은 가난한 백성들의 대한 연민 때문에 남편의 모욕과 수치를 감당했다. 그리고 당대 여성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용기만큼 그녀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벌거벗은 몸은 ‘아버지’(세상) 앞에서 벌거벗었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떠오르게 만든다.

ⓒ한상봉

영적 가난은 사랑의 결과

복음서의 산상설교에는 행복선언에 대한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5,3)이라 하고, 루카복음에서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6,20)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리라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적 가난과 영적 가난은 동전의 양면이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이 탐욕을 경계하며 반복해서 말하고 있듯이 “부는 탐욕의 결과”이며, “가난은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는 자는 탐욕 때문에 자신의 잉여소유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아서 죄인이다. 그러나 사랑이 충만한 이들은 ‘연민’ 때문에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가난한 이들과 나누기 때문에, 결국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탐욕으로 부자 된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통해 존재감을 얻으며, 그래서 이 소유를 빼앗길까 늘 불안하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자발적 가난’을 사는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기뻐한다. 그러니, 천국(참행복)은 후자에게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민은 여기에 있다. “영적 가난이 주는 행복을 얻기 위해 실제로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하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재산을 허락하는가?” 하는 문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다. 행복을 가름하는 잣대의 핵심은 “얼마나 가난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있다. 나머지는 그 사랑의 크기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잘못된 질문처럼 여전히 ‘소유’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소유는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이를 두고 로버트 엘스버그는 ‘쇼핑몰 추세’라고 표현했다. 이 세상 자체가 지금은 엄청난 쇼핑몰이다. “어디를 가든 우리는 행복이 바로 코앞에 있다고,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좋은 것이나 새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록펠러는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느냐는 질문에 “1달러 더 가지는 것”이라고 답했다. 미국의 9.11 테러가 많은 이들을 슬픔에 빠뜨렸던 것처럼, 우리도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경악했다. 한편에선 그 슬픔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으나, 이내 대부분 사람들은 다시 쇼핑사냥에 나섰다. 광고는 이를 더 부추기고, 희생자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은닉된 채 세월호처럼 무의식 아래로 침몰했다.

집착이라는 갈고리

이런 ‘사랑 없음’은 단지 소유와 소비에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재물과 자신의 안전, 자기 이미지, 지배하려는 욕구, 자신만이 옳다는 지나친 확신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런 집착이 타인을 향한 배려와 겸손한 사랑을 질식시킨다. 때로는 자신의 비참함과 상처, 수치스러운 기억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시선을 바깥으로 향하지 못한다. 이런 태도는 결국 하느님마저 ‘자기 소유’로 붙잡아두고 싶어 한다. 하느님을 자기 문제의 해결사쯤으로 치부하거나,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느님을 봉헌금으로 매수해 보디가드로 삼으려는 얕은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참행복은 내 인생에서 갚아야 할 것과 돌려주어야 할 것을 기록하는 ‘장부’를 없애버리는 순간에 찾아온다. 하느님의 내 인생의 수지 계산서를 작성하지 않는다. 그저 ‘내 사랑의 크기’만을 가늠할 뿐이다. 그래서 참행복은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상황을 평온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완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접는데서 시작된다. 거기서 “만사에 감사할 마음”이 일어나고,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 곧 ‘영적 가난’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바라며 만족하는데 있다. 그러니 아직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생각 자체가 문제다.

사막의 교부들과 성인들은 “재산을 처분하는 것이 탐욕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보지 않았다.”는 게 엘스버그의 생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회심이 없다면 외적으로 가난해지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엘스버그는 모세 아빠스로 알려진 수도승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금은보화나 토지를 내놓은 사람들이 오히려 칼과 연필, 핀이나 펜과 같이 작은 것에 흔들리는 것을 본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재산을 포기했으면서도 여전히 작은 것에 뿌리 깊은 욕심을 갖고 있어서 순식간에 평온함을 잃어버린다.”

모세 아빠스는 베드로가 “주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받게 될까요?”하고 묻는 것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자들이 버린 것은 낡은 그물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사제나 주교들 가운데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느님을 위하여 가난한 독신생활을 선택한 그들이 자존심을 건드릴만한 말을 한 마디라도 들으면 어린애처럼 벌컥 화를 내고, 평생 그 사람과 상종하지 않을 듯이 처신한다. “한번 사제에게 찍히면 평생 간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이 슬픈 우리 교회의 초상이다. 성직자들은 ‘포기’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는 태도조차 포기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값없는 사랑”이다.

수도승들은 소유물을 없애면서 집착의 갈고리를 떼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러한 가난은 ‘순결한 마음’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들은 단식과 기도와 가난을 통해 분노와 탐욕, 욕망과 질투 같은 ‘가시덤불과 잡초’를 뿌리째 뽑으려 한 것이다. 이것들이 마음을 질식시켜 사랑하는 능력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은수자들은 “나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라고 가르치는 바로 그 책마저 팔았다.”면서 성경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돕기도 했다. 사랑은 모든 ‘이유’를 넘어선다.

복음의 실천은 가능하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전형으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먼저 꼽았다. 페루자 전쟁 이후에 나병환자의 참혹한 손에 입을 맞추고 나서 프란치스코는 죽음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렸고, 지위와 안전, 세속적 성공에 뿌리를 둔 자신의 정체성을 놓아버렸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포목상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벌거벗었다. 그는 아시시에서 합류한 젊은이들과 더불어 초라한 움막에 살았고, 농부들과 함께 일하고, 일거리가 없으면 구걸을 하거나 굶었다. 그리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교했다. 그는 사람뿐 아니라 새나 동물한테도 설교했다.

엘스버그는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론으로는 훌륭하나 실천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교황권이 극성기에 이르렀던 세속적인 교황 이노첸치오 3세 조차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회’를 인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측근이었던 한 추기경은 이렇게 교황에게 조언했다. “이 사람이 바라는 것은 다만 우리가 복음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삶이 인간의 능력 밖이라고 말한다면, 그래서 복음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포한다면 복음서의 저자인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우리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부자들을 ‘염려’한 탓인지, 아니면 고위 성직자들 자신이 이미 ‘부자’의 반열에 들어와 있기 때문인지 ‘복음’을 액면 그대로 선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매력은 ‘가난함에도 넘치는 기쁨’에 있다. 전기 작가인 첼라노의 토마스는 이렇게 프란치스코 성인을 묘사했다.

“순결한 삶, 단순한 대화, 깨끗한 마음, 하느님께 대한 사랑, 형제적 애덕, 철저한 순면, 평온한 내맡김, 천사 같은 그의 표정은 참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잘 정돈된 수도원의 가난이나 방랑자의 낭만적 가난과 달랐다. 그의 가난은 여전히 다른 가난한 사람들처럼 불확실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었다. 그래서 아시시의 주교가 프란치스코에게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물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서로 다투며 소송을 걸게 되지요. 소유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매우 위험한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많이 버렸는데도, 프란치스코는 “조금도 초라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온유한 기쁨으로 눈부셨다. 우리도 프란치스코처럼 살고 싶은 때가 있다. 그분처럼 나환자들에게 입을 맞추는 영웅적 일을 해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 싶어 한다. 이럴 때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한다.

“때로는 그저 한 걸음만 내디디면 된다. 사실 우리는 한 걸음만 내디디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삶이 이런 수많은 걸음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거대한 한 걸음이 아니라 아주 작은 걸음으로 말이다. 나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나환자에게 의식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살다보면 온갖 올가미와 장애물이 내가 세상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다. 문제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토마스 아 켐피스가 <그리스도를 본받음>에서 가르친 대로 살게 된다고 엘스버그는 말한다.

“창조된 모든 것은 생명을 비추는 거울이요 거룩한 가르침을 담은 책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욕망에서 사랑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와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였지만 그 모든 명망성을 버리고, 여러 종교를 편력한 끝에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안식을 얻었다. 그는 인간이 지닌 모든 갈망의 목표는 ‘행복’을 얻는 데 있는데, 잘못된 방법으로 행복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슬픔과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고 말한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 당신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 쉬기까지 편치 않나이다.”

‘원죄교리’를 설파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끈질기고 강력한 욕망이 ‘죄’라면서, “많이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절제한 사랑이 죄”라고 말한다. 무절제한 사랑이란 ‘이기심’에서 비롯된 사랑으로, “굶주림을 폭식으로, 사랑을 정욕으로, 애정을 소유욕으로 변질시킨다.”고 했다. 그 역시 이것을 놓아버림으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지배하거나 소유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영적 가난: ‘보물을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다

사랑을 통해 행복으로 가기 위한 ‘놓아버림’은 자신의 영혼을 구한다고 징벌처럼 빈곤의 늪에 자신을 빠뜨리거나 극도의 단식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과거의 슬픔과 상처에서 벗어나거나 담배를 끊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사실상 놓아버림은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조건을 또 다른 정체성과 삶의 조건으로 바꾸며, 그 정신에 따른 목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영적 가난이란 보물을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한상봉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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