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삶, 성인이 되기 위한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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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삶, 성인이 되기 위한 출발점
  • 한상봉
  • 승인 2016.04.27 1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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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여덟 단계-1
이 글은 로버트 엘스버그가 지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바오로딸, 2007)을 요약 정리하면서, 필자의 의견을 덧붙여 작성된 것입니다. 이 글은 인문카페 엣꿈에서 행한 강의초록을 기본으로 했으며, 8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행복의 반대, 슬픔 아닌 무감각

“슬픔이 행복의 반대는 아니다.”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에서 로버트 엘스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슬픔은 오히려 진정으로 우리가 살아있음을 깨닫게 한다고. 그래서 슬픔은 오히려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슬픔은 연민을 낳고, 연민은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고, 이 자비는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의 끝없는 슬픔은 끝없는 사랑으로 치유된다.”고 말할 때, 이 슬픔은 사랑을 부추겨 행복으로 가게 하는 첫 번째 정거장이 된다. 오히려 슬픔을 낳지 못하는 인간은 구원에서 배제되기 쉽다. 이런 점에서 윤동주 시인이 <팔복八福>이란 시를 지은 이유가 새삼스럽게 가슴을 울린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엘스버그는 사실상 문제가 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공감(compassion) 능력을 잃어버린 ‘생기 없는 무감각’이라고 꼬집는다. 상호작용이 없이 자신의 생존과 성공에 매몰된 삶은 자기 폐쇄적 외로움을 낳고, 자본주의가 요청하는 속도와 생산압력, 생존을 위한 투쟁, 소유에 대한 불안과 소비에 대한 강박증은 우리를 피곤하고 무감각한 인간으로 만든다. 급기야 “아무도 돌보지 마라!”는 슬로건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은 인간을 물화(物化)시킨다.

여기에 ‘타자를 위한 신앙’은 없다. 그런 사랑이 사라진 상태를 시몬 베유는 ‘지옥’이라 불렀다. 그런 점에서 ‘헬조선’이란 말이 실감난다. 이러한 지루한 가사(假死)상태를 깨우는 것이 슬픔이다. 이 슬픔을 통해 우리의 영적 세포가 되살아난다. 이처럼 자신과 타인의 고통 앞에서 ‘깨어 있는 삶’만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끈다. 이 구원의 상태가 ‘충만한 삶’이며, ‘참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열정적으로 응답하는 삶

엘스버그는 죽음 같은 무감각한 삶에서 “자아의 가장 깊은 곳을 살아내는” 충만한 삶을 갈망하는 자가 ‘성인’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순간순간 자신에게 다가오는 현실을 흘깃 보아 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응답하는 열정적 사람들이다.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은 어느 주일에 복음에서 부자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당장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광야로 나가 아라비아 사막 언덕에 있는 폐허로 떠났다. 그는 이곳에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텃밭을 일구면서 20년을 살았다.

복음서의 부자청년에 관한 이야기는 수많은 성인들에게 강력한 ‘회심의 영감’을 주었던 구절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내 뒤를 따르라.”는 게 예수의 요청이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역시 이 요청을 단박에 알아듣고 세상에 속한 것을 세상에 돌려주고 빈 몸으로 출가해 ‘가난’을 살았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이 요청을 마음에 새겨 듣고 응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와 상관없는 “그저 좋은 말씀” 정도로 치부한다는 데 불행(不幸)이 있다. 이때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 나타난다.

광야로, 사막으로 떠나라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오의 생애>에는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이 행한 수없이 많은 금욕행위와 시련을 들려주고 있지만, 실상 고독한 삶을 마치고 돌아온 안토니오는 운동부족으로 뚱뚱해지지도 않았고, 단식과 악마들과의 투쟁으로 수척해지지도 않았다. “그의 영혼은 혼란에서 자유로웠고, 외적 감각은 평온했으며, 그의 얼굴은 영혼에서 솟아나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몸의 움직임에서 영적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우울한 성인도 냉정한 성인도 아니었다. 사막의 수도승들은 금욕생활을 통해 감정을 잃어버린 평온함을 지닌 목석(木石)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분노와 두려움, 탐욕과 자만심 대신에 친절과 온유, 연민의 감정으로 삶의 균형을 이룬 사람들이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 사막으로 간 것은 자신을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찾아가는 수행과정에서 먼저 세상이 강박하는 권력과 재산, 쾌락과 지위 추구라는 사회 관습을 거부하기 위함이었다. 관습과 일상이 요구하는 사회적 기대치에서 벗어나 더 깊고 풍요로운 실존에 ‘깨어 있기 위해’ 그들은 사막으로 갔다. 토머스 머튼이 <칠층산>에서 켄터키 주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간 것도 같은 이유였으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로 떠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엘스버그는 “모든 사람이 외딴 사막에서 고행을 하거나 트라피스트 수도승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흐름을 따라 표류하는 것에 저항하며 도전할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도시의 광야>에서 까를로 까레또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추한 것이라도 그 속으로 빛이 들어가면 생기를 띠고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절대적으로 거부해야 할 것이란 하나도 없다. 퇴폐의 수렁이요 아스팔트의 정글인 대도시도 그 나름의 빛과 ‘투명성’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하느님은, 당신이 즐겨 머물러 계시는 특출한 ‘고장’이란 없으며, 오히려 모든 ‘곳’이 당신의 처소요, 따라서 우리는 어디서나 당신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깨우쳐 주셨다.”

뉴욕주 제네시 수도원 책방. 헨리 나웬은 이곳에서 7개월 동안 머물며 <제네시 일기>를 썼다. (사진/한상봉)

거룩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

엘스버그는 안토니오 성인 등이 부르심에 열정적으로 응답하고 일상에서 벗어나 ‘사막’으로 간 이유는 충만한 삶, 곧 행복을 얻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행복은 영어의 hap(기회, 운)이나 happen(일어나다) 등에서 파생된 ‘happiness’처럼 변덕스럽고 아침이슬처럼 사라질 “행복하다는 느낌”과는 상관이 없다. 행복이란 “건강하게 활짝 피어난 식물”에 가깝다. “행복은 각 개인의 습관적 실천에 뿌리를 두기에 진지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변하기 쉬운 행운이나 운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마태오복음 5장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행복하다’는 말을 ‘blessed’로 영역한다. 참 행복은 ‘사회적 성공’이나 행복한 느낌이나 감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영을 나누는 일’이다. 제자들은 예수처럼 슬픔이나 고통, 슬픔을 경험하면서도, 하느님의 영 안에 있기 때문에 ‘복되다.’ 그러므로 행복하다는 것은 거룩하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거룩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전한 행복을 차지한 사람이 곧 성인이다.

우울한 성인은 불쌍한 성인

우리는 보통 “성인이란 결점이 없고 기적을 행했고 교회 안에서 살았으며 기꺼이 고통을 겪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인들 가운데 어떤 이는 순교했고, 기도하며 이웃을 사랑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몇몇 성인은 살아있는 동안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인이 된 것은 순교했거나 환시를 보았거나 놀라운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성인이 된 것은 그들의 탁월한 사랑과 선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단순히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이 사자 밥이 되거나 거친 옷을 입고 고행하는 것이라면 그 길을 따를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이란 그저 ‘기인’(奇人)일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인전에서 흔히 발견하는 성인들은 ‘인간적인’ 모습이 사라진 초월적 모습만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애초에 성인이 되기를 포기하기 마련이다. 도로시 데이는 처음에 ‘감상적인 성인전’을 접하면서 성인들의 놀라운 식습관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성인들은 탄식하면서 식사하러 갔다. 알폰소 성인은 식탁에 앉아서 오로지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만 생각했다. 그는 식사하면서 내내 자신이 행하는 고행을 받아달라고 성모님께 눈물로 기도했다. 몽포르 성인은 식탁에 앉아 말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비통하게 흐느껴 울기도 했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인스턴트커피를 좋아했고 각 구워낸 빵을 즐겼다. 바닷가에 앉아 파도를 보며 좋아했고, 토요일 오후에는 라디오 방송의 오페라 음악에 심취했다. 테야르 드 샤르댕은 “지적이면서 감성적인 영혼을 통해 세상은 빛을 발하며 더욱 매력적인 곳이 된다.”고 말하며 ‘열정적 삶’을 찬양했다. 여기서 우리는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인이 수녀들에게 매일 와인 한 잔을 권하며, “와인을 마시고 발갛게 달아오른 뺨은 하느님의 생명력을 드러낸다.”며 좋아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우울한 성인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은 “슬픈 성인은 불쌍한 성인”이라고 말했다.

성인, 기쁨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자

로버트 엘스버그는 “성인이란 균형 잡힌 삶을 살았고 유머감각을 지녔으며, 연민과 관대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다.”고 말한다. “장애물과 어려움을 평온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받아들였으며 모든 것 안에서 기쁨을 찾았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복음의 기쁨’을 첫 번째 교황권고의 제목으로 삼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교종은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

“복음선포자는 장례식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보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의 열정을 되찾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할 때에도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을 되찾고, 이를 더욱 키우도록 합시다. 때로는 불안 속에서, 때로는 희망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현대세계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낙심하고 낙담하며 성급하고 불안해하는 선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을 먼저 받아들여 열성으로 빛나는 삶을 살려는 복음의 봉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10항)

엘스버그는 성인의 범주를 단지 교회가 공적으로 선포한 성인들만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도로시 데이와 토머스 머튼, 오스카 로메로와 마더 데레사처럼 특별하게 살았던 이들도 있고, “어떤 성인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거나 날마다 지나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큰 기쁨을 느끼게 되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그들의 내면에 반짝이는 깨달음의 ‘비결’을 알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비결은 ‘거룩함에 대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거룩함을 실천’해야 알 수 있는 길이다.

거룩함을 산다는 것은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실천하는 것이다. 제자로 삼았던 베타니아의 마르타에게 예수가 한 말이 이것이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토머스 머튼은 그 필요한 한 가지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실현하는 것, 곧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엘스버그는 그 모델을 도로시 데이에게서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도로시 데이는 성인들을 벗이요 동료로 삼았다. 그는 마음을 기울여 기도하면서도 옆에 있는 사람을 온전히 의식하며 함께 했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아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표징에도 민감하며 ‘기쁨의 의무’가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는 신앙의 가치에 비추어 날마다 일어나는 뉴스를 읽었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누구나 세상을 바꿀 수 있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했다. 이런 점에서 도로시 데이가 설립한 가톨릭일꾼운동은 성인됨을 배우는 학교이며 노동캠프였다.

엘스버그는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지는 삶과 조건이 곧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인내와 겸손, 용서와 자기희생, 너그러움을 실천할 기회를 찾기 위해 수도원처럼 특별한 장소로 도피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가족이 바로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이상적인 자리가 될 수 있다. 이 장소에서 굳이 ‘행복에 이르는 10가지 원칙’ 같은 책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요청은 예수님의 도전과 초대에 응할 것인지, 아니면 부자청년처럼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분을 떠나갈 것인지 결정하는 일뿐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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