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사만 사천 송이의 꽃다운 젊은이,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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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사만 사천 송이의 꽃다운 젊은이, 화랑
  • 한상봉
  • 승인 2019.01.21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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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종교심성으로 읽는 요한 묵시록-11]

별에 못을 박다
-류시화

어렸을 때 나는
별들이 누군가 못을 박았던
흔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별들이 못구멍이라면
그건 누군가
아픔을 걸었던
자리겠지

[오늘의 성서] 요한 묵시록 7,1 - 17

새로운 하느님 백성, 십사만 사천 명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온 천사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뽑힌 자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을 것이었다. 이들은 구원을 보증받은 자들, 곧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다. 그 수효가 다 찰 때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은 온전할 것이다."(묵시 7,3 참조) 땅이며 바다와 나무가 제 모습을 일그러뜨릴 때는 곧 세상의 종말 심판의 때일 것이며, 그때까지 하느님은 밭에서 가라지를 뽑아내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알곡으로 익을때 를 고대하며 기다려 줄 것이다. 그분은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숫자를 요한 묵시록은 14만4천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곧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각각 1만2천 명씩 뽑힌 자들이다. 도장[인호]을 받은 이들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드러내는 표정이다. 따라서 단순히 문자 그대로 14만 4천 명만이 말세에 구원받으리라는 표징으로 알아듣는 것은 곤란하다. 이들은 새로운 이스라엘,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 뽑힌 무리들은 만인에게 열려 있다. 이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7,9)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천사들과 원로들과 뭇 피조물과 더불어 하느님께 영원무궁 만만세 찬양을 드린다(7,11 –12). 이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셨지만 자신의 업[공덕]으로도 스스로 하느님 백성임을 입증한다. 이들은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흰옷은 세상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예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이들도 따라 걸었다는 상징이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7,14)

이들은 이제 다시는 굶주리지 아니하고,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7,15-17). 결국 새로운 이스라엘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이들은 예수께서 희망했던 것을 희망했으며, 예수께서 사랑했던 가난한 이들을 저들도 사랑했으며, 예수께서 받으셨던 모욕과 미움을 그들도 함께 받았으며, 예수께서 당한 고통을 믿음 안에서 이겨내어 마침내 그분의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구원을 보증받는 하느님 백성의 반열에 드는 것은 단순히 전례에 참여하고, 봉헌금 액수를 높게 올리고, 기도와 찬양 노래를 그치지 않는 것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제 생활 속에서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가진 바를 나누며, 생각과 마음과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정이 중요하다. 우리 옷을 세탁소에 맡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영혼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화랑도(花郞徒) 또는 낭가(郎家), 풍류도(風流徒),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는 신라의 청소년 심신 수련 조직이다.

가려 뽑은 사람들, 신라의 화랑

우리 역사에서 신라의 화랑들 역시 나라에서 뽑은 젊은이들이었다. 삼국으로 나누어 다투던 시절, 자기 백성들을 환난에서 구원할 믿음직한 젊은이들이 그 가운데서 나왔다지만, 이들 모두가 처음부터 나중까지 뽑힌자다운 믿음을 그대로 지킨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는 본래 우리 종교 심성의 바탕이라는 풍류도에서 나왔다. 풍류도는 천신 숭배 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이라고 함석헌은 말한다.

"한(韓) 혹은 칸(Khan)이라는 말은 수의 하나를 표하는 동시에 또 크다는 뜻이다. 한자로는 한(韓), 한(汗), 환(桓)으로 썼으나 소리를 표했을 뿐이다. 이 '한'이 우리 생활의 등뼈다…. 그리고 그것을 인격화하여 대표하는 것이 한님 곧 하느님 또는 환인이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이 그리스도교를 쉽게 이하하고 받아들인 것은 몇천년 동안 내려오며 민중의 가슴속에 뿌리박아 온 이 '하느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1983, 105쪽)

사람을 이롭게 하는 밝고 광명한 세상을 만들자는 신앙이며, 그 원천이 '하느님' 이다. 이를 계승한 신라의 화랑은 진흥왕이 원화를 뽑으면서 시작되었다(576년). 임금과 신하들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떼지어 놀게 하면서 그 행실을 보고서 마침내 미녀 두 명을 골라냈다. 남모와 준정이다. 그네들을 따르는 무리가 300여 명이나 모였다. 그런데 두 여자가 서로 어여쁨을 다투고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제 집으로 꾀어 억지로 술에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도 이 때문에 사형당하니 이들을 따르던 무리가 모두 흩어졌다. 선택받은 자라도 방심하면 언제든지 '구원의 길' 에서 비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뒤 신라에서는 다시 외모가 고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고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는데, 따르는 무리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더불어 도의를 닦고, 가악을 즐기며, 명산대천을 찾아 다니니 멀리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른바 서로가 서로에게 복된 무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들 가운데 착한 자를 가려 나랏일에 썼다고 하는데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현명한 재상과 충신이 여기서 솟아나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군졸 또한 여기서 나왔다." 라고 하였다.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이른다, 그 가르침의 기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는 실로 3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그리하여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아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주지 그대로이며, 또 무위로써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 그대로이며, 악한 일을 삼가고 착한 일만 행함은 석가의 교화 그대로이다."라고 하였다.(<삼국사기>권 4. 신라본기 4)

더구나 화랑들은 "젊어서 죽어야 사후의 혼도 젊다."는 내생관 마저 지녔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터에 나가 죽기를 영광으로 알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화랑은 사다함, 김춘추, 김유신, 관창 등이 활약하던 백여 년 동안 크게 제 몫을 다하였다.

모죽지랑가에 담긴 사연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태평 성대를 누리게 되면서 화랑의 기풍은 무너지고 관료들은 저마다 권력과 부를 탐하기에 정신이 바빠졌으며 날마다 호화로운 주색 잔치를 일삼았다. 뜻있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불태웠던 이상은 사라져 옛말이 되고, 과거의 순수한 열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탄식은 높아만 갔다. 득오가 부른 <모죽지랑가>는 이런 사정에서 지어진 노래 였다.

득오는 화랑 죽지가 이끄는 화랑단의 간부였는데, 화주 였던 죽지와 득오는 상사와 부하의 관계를 뛰어넘어 돈독한 우정을 맺고 있었다. 훗날 득오가 부산성 창직으로 임명되어 가자, 죽지랑이 술과 떡을 가지고 득오를 찾아갔는데, 탐관오리가 많았던 모량부의 우두머리였던 익선의 명령으로 득오는 그의 밭에서 부역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죽지랑이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나중에 익선은 관리였던 간진의 쌀 30석과 진절사지 벼슬아치의 말안장을 뇌물로 받고서야 득오를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조정의 화주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한 짓을 씻으려고 하자, 익선은 도망하여 숨어버렸으므로 그의 맏아들을 대신 잡아갔다. 그때는 한겨울의 몹시 추운 날이었으므로 성안의 못에 아들을 목욕시켰더니 얼어붙어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화랑의 기운이 온데간데 없고, 나라는 멸망의 늪에 빠져들어갔으니 세월에 지친 득오가 죽지랑을 기리워하며 <북망만가>를 부른다.

"가는 봄 보내며
그분이 안 계시어 울음과 시름
사랑해 주시던
이 몸을 그르칠세라 조심해 나가자
눈을 돌칠 사이에
그분을 또다시 만나게 되리라
님이여, 그릴 마음의
나가는 그 길은
아야
다북쑥 우거진 골목 안
어느 밤 잠 올 줄 있으랴"

우리 시대의 화랑,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의 향기를 머금은 화랑은 인류에게 남아 있는 희망의 근거이다. 그 마음 변치 않고 오로지 이 세상의 평등 평화와 만인의 복락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이들이 남아 있다면 미래를 장담해도 좋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종말은 수시로 우리 마음에 오고, 말세는 수시로 우리 세상을 덮친다.

우리 시대의 14만 4천 명을 기다리는 시대의 징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부른다. 지하도에 누워있는 노숙자들에게 빛이 되어 슬픔의 강을 건너갈 사람들, 모두가 돈더미 위에서 이문을 챙기고 있을 때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울음 삼키는 사람들이다. 붐비는 자동차 사이에서 갈 곳을 잃어버린 아이의 손을 잡고 걸아가는 사람들, 권력 주변엔 아예 얼씬거리는 것조차 부끄럼 타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더욱 가난한 이들에게로만 달려가며 손 건네는 사람들, 그 사람들 가운데로 화랑의 이상이 떠오른다. 고난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흔적을 더듬어 사는 14만 4천명, 하느님 백성의 뒷그림자가 가슴 흐뭇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마무리 묵상]

백설보다 더 하얗게 빛나며
부서지는
저 순수의 옷을 입은 자,
당신의 화랑은 누구입니까?
복음의 빛으로 창칼을 여미고
허리띠를 바투 매고
늠름하게 기운차게
그래서 더욱 고웁게
산정에 오르는 저 낭도들은
아, 당신의 백성들입니까?
출애굽하던 그날처럼
권력의 군마들을 바다에 처넣고
새 하늘 새 땅을
신천지 한반도에 여시고자
불러모으신 당신의 화랑,
우리의 마음을 모아
당신께 흠향하오리니
받으소서, 우리 주님 우리 하느님,
당신께서 고개 끄덕이시면
그 얼마나 좋을까요,
야훼 우리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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