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없어야 삼시충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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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없어야 삼시충을 막는다
  • 한상봉
  • 승인 2018.12.3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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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종교심성으로 읽는 요한 묵시록-8]

[오늘의 성경] 요한 묵시록 4,1-11

후한 갈홍의 「포박자」에 보면 사람의 몸 속에 깃들여 사는 귀신, 삼시(三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삼시’는 사람을 일찍 죽게 하려고 애쓰는데, 그 까닭은 사람이 죽어야 그 몸에 깃들여 사는 삼시가 귀신이 되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며, 제사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삼시는 매번 경신일이 되면 사람이 잠든 틈에 문득 하늘에 올라가 그 사람의 허물을 사명 또는 옥황상제에게 고자질해서 그 사람의 목숨을 단축시키고 질병과 우환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삼시뿐만 아니라 조왕신도 마찬가지다. 흔히 섣달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속설이 있는데, 조왕신 때문이다.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것은 곧 조왕신이 죄과를 옥황상제에게 보고하여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뜻이다. 그래서 민간신앙에서는 그믐날 부뚜막에 그려 붙인 조왕신의 입에 엿을 물리거나 사탕을 묻히는 풍습이 있다. 엿을 물리는 것은 옥황상제 앞에 가서 입이 달라붙어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있다 오라는 뜻이고, 사탕을 묻히는 것은 달콤한 이야기만 하라는 뜻이다.

중국의 「태청옥책」이라는 책에서는 삼시는 몸의 세 부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물욕과 식욕 그리고 색욕을 부추겨서 죄를 짓게 만드는 마물이라고 전한다. “상시인 팽거는 이름이 '청고'인데 사람의 눈을 가로막아 사람의 머리에 살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욕심을 많게 하여 수레와 말을 좋아하게 만든다. 중시인 팽질은 이름이 '백고'로 사람의 오장을 해쳐 사람의 뱃속에 살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먹는 것을 좋아하게 만들고 가벼이 성내고 분노하게 만든다. 하시인 팽교는 이름이 '혈고'인데 사람의 위장과 수명을 가로막아 사람의 발 속에 살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색을 좋아하고 살생을 기뻐하게 만든다.”

 

삼시충

담백함이 삼시를 쫓는다

따라서 이 삼시를 격퇴하기 위해서는 도교의 술사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내놓았다. 삼시가 사람의 몸 속에서 곡기를 먹고 살고 있으므로 불에 익힌 다섯 가지 곡식을 먹지 않으면 장생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담백함을 즐기고 욕심을 없이하고, 정신은 고요하고 마음은 밝게 하여 많은 선행을 쌓으면’ 없어진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당나라 도사였던 정자소는 경신일에 잠을 자지 않고 날밤을 새우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으며, “이것은 내 스승께서 나쁜 짓 하는 자를 두렵게 하려고 만든 것일 뿐이다.” 하며 침상에 걸터앉아 시를 쓰고는, 붓을 던지고 우레와 같이 코를 골며 잤다고 한다. 그는 “옥황상제가 벌써 내 행동을 아시거니 제깟 귀신들이야 마음대로 시비를 한들 내버려 두어도 좋다.”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이 풍습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경신일에 왕은 투옥된 죄수들을 재심사 해서 석방 또는 감형 해 주는 사면조치를 내렸다고 한다. 신하들에게는 연희를 베풀고, 수만명의 승려에게 음식을 내리거나 행려자들에게 밥과 국을 먹였으며, 늙은이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는 삼시가 죄를 고자질하는 날 오히려 왕이 덕을 베풀어 액운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속은 조선시대까지 내려왔으나 영조 때 폐지 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삼시 신앙이 사뭇 오락의 기능마저 담당하였다. 노인들은 늙고 병든 몸이라 이제 탐욕도 성냄도 이미 다 끊어버려 삼시의 고자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했으며, 다정한 부부들은 아내와 술잔을 마주 놓고 도란도란 얘기하며 밤을 지새우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양곡 소세양(1486-1562)이 썼다는 ‘경신야’라는 시에는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아이들 둘러앉아 경신일을 지키니
떡, 과일 앞에 두고 웃고 떠들고 장난치네.
곁에서 손뼉치며 즐거운 일 함께 하니
늙은이도 참으로 그 가운데 사람일세.
북소리도 더디어라 오경을 알리는데,
백년 인생 이와 같이 잠깐 사이 지나가리.
이웃 닭 홰쳐울자 숲 까마귀 흩어지고,
동창에 새벽 잘빛 환해옴이 반갑고나.”

한편 이런 신앙과 풍습에 대해서 비판적인 유학자들도 있었다. 김효원(1532-1590)이 쓴 시는 이렇다.

“경신일 밤 잠 안 자고 꼬박 새우니 삼충이 하마 벌써 없어졌더냐. 사람들 삼충을 두려워하니 생각하매 부끄러움 견딜 수 없네. 진실로 그 마음이 거울 같다면, 물듦에 꾀는 바 되지 않으리. 설령 103마리 벌레가 있다 해도, 또한 장차 어찌 두려워 하리. 그럴진대 한밤중에 잠을 푹 자고, 닭 울어도 마음은 편안하리라. 어찌하여 일상 이치 거꾸로 하여 한밤에 앉았다간 새벽에 자나. 그대에게 나의 말을 부쳐보노라. 이제부터 착한 일에 힘을 쏟아서, 치우치지 않음을 기약해 둘 뿐 좌술은 숭상치 말으시게나.”

 

하늘의 문을 여는 전례의 시작

모든 전례는 상징으로 그득하다. 경신일에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곧 시시때때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밤잠 자지 않고 꼬박 새면서 골똘히 다시 한번 삶과 죽음의 뜻을 되새겨 보자는 것이라면, 모든 그리스도교 전례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올곧게 맺어져야 할 관계를 가만히 일러준다. 묵시록은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하느님과 인간 및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웅장한 모습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묵시록의 비전을 보여주는 예배는 ‘하늘의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드러난다(묵시 4,1).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것은 이제 결정적인 ‘때’가 왔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처음 하늘이 열리고 나서 하늘의 기운이 지상에 내려오고, 비로소 단군 성조가 사람을 두루 이롭게 할 뜻으로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어떤 이들은 이제 선천세계가 끝나고, 후천세계가 시작될 때가 왔다고도 한다. 새로운 파천황의 시대가 오기 때문에 이윽고 다시 하늘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새로 오게 될 세계를 다스릴 분이 등장한다.

그분은 ‘옥좌’(4,2)에 앉아 계시며 역사를 다스리는 왕이자 심판관이며, 옥좌 둘레에 걸려있는 무지개(4,3)처럼 자비로 다스리실 것이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요한이 성령으로 가득차 있었기에 이런 광경을 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요한은 결코 두렵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 신실한 믿음을 지켜왔던 자가 아니라면 당연히 그분을 보고 온몸을 떨며 겁먹을 것이다. 마음이 담백한 사람은 삼시, 삼충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분 둘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고, 그분의 승리를 상징하는 금관을 쓴 스물네 명의 원로가 앉아 있다. 이 하느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느님께서는 ‘번개’와 ‘천둥소리’처럼 거세게 역사 속에서 활동하실 것이다. 그리고 네 마리의 생물이 있는데, 그들은 피조물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사방에 눈이 박힌 생물들처럼 언제나 깨어 계시고, 생물들의 날개처럼 신속하게 중단없이 활동하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스물네명의 원로와 네 마리의 생물은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을 찬양한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는 한 가지 뿐이다. 그분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에게서 당신의 뜻대로 창조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만이 만물의 주인이시고, 세상 만물이 복종해야할 분은 그분 뿐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껏 우상에게 절하고, 미지근한 신앙으로 엉거주춤 살아왔던 이들은 마음을 돌려 그분께만 오롯이 의지하라는 것이다. 이제 우주의 주인이신 분이 종말과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 오늘 복음말씀을 듣고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해방과 자유를 갈망해왔던 모든 피조물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스물 네명의 원로가 지르는 찬양의 소리와, 네 마리의 생물이 지르는 환성을 듣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사람은 복되다. 그러나 이 소리에 귀 막고 싶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내일은 새로운 날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무리 묵상]

문이 열린답니다.
하늘의 문,
그 문이 이젠 그만 홀연히
빗장 제껴 열린답니다.
좋은 세상 보려고 기웃거린 세월이
이젠 그만 소원성취된다는데,
어수선한 저희 마음
또 누구의 죄일지 모르겠어요.
눈썹 새하얗게 변할 지경에
새벽이 오도록 마음 죄며 생각하여도
우리 마음, 저희 세상 헤아릴 수 없음은
또 누구의 업보란 말인가요
오늘 밤 그저 그만 곤한 잠결에
새로 열린 당신 나라 뵈올 수 있다면
이승에선 그로도 족할 터.
당신께서 열어놓으신 그 문간으로
두 눈 딱 감고 달음박질해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하느님. 나의 주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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