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파리를 슬퍼함 "내가 문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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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파리를 슬퍼함 "내가 문밖에 있다"
  • 한상봉
  • 승인 2018.12.2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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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묵시록 묵상-7

[오늘의 성경] 요한묵시록 3,14-22

파리 소탕작전

경오년 여름에 파리가 극성을 떨어 온 집 안에 득실거리고 점점 번식하여 산골짜기에까지 퍼져 나갔다. 높고 큰 다락집에서도 일찍이 얼어죽지 않더니 술집과 떡가게에 구름처럼 몰려들고 윙윙거리는 소리가 우레 같았다. 노인들은 탄식하며 괴변이라 하고, 소년들은 성을 내며 소탕전을 폈다. 파리통을 설치하여 거기에 걸려 죽게 하고, 또는 독약을 쳐서 그 약기운에 쏘이게 하여 전멸 시켰다.

이에 다산 정약용이 이렇게 말했다.

“아! 이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는 굶주려 죽은 자의 몸이 옮겨 붙은 것이다. 아! 기구하게 사는 생명이다. 애처롭게도 지난해 흉년이 들어 식량이 크게 모자랐고, 또 겨울의 혹한을 겪었다. 그로 인해서 전염병이 돌게 되었고 게다가 또다시 가혹한 세금장수까지 당하여 수많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고, 그 시체를 버린 들것은 언덕을 덮었다. 수의도 관도 없는 시체에 훈훈한 바람이 불고 기온이 높아지자, 그 피부는 썩어 문드러져 옛 추깃물(송장이 썩어서 흐르는 물)과 새 추깃물이 고여 엉겨서 그것이 변해 구더기가 되어 항하(갠지스강)의 모래보다도 만 배나 많았는데, 이 구더기가 날개를 가진 파리로 변해 동네로 날아든 것이다. 아! 이 파리가 어찌 우리의 살붙이가 아니랴. 너의 목숨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이에 음식을 만들어 널리 손님을 청해 와 모이게 하니 서로 기별해 모여서 함께 먹도록 하라.”

그리고서 다음과 같이 조문했다.
 

케테 콜비츠(Kathe Schmidt Kollwitz)

목을 축이고 창자를 채우렴

“파리야, 날아와서 이 음식 소반에 모여라. 수북이 담은 흰 쌀밥에 국도 간을 맞춰 끓여놓았고, 무르익은 술과 밀가루로 만든 국수도 겸하였으니 그대의 마른 목구멍과 그대의 타는 창자를 축여라.

파리야, 날아와 훌쩍훌쩍 울지만 말고 너의 부모와 처자식을 모두 거느리고 와서 여한 없이 한번 실컷 포식하라. 그대의 옛 집을 보니 쑥대가 가득하며 뜰은 무너지고 벽과 문짝도 찌그러졌는데, 밤에는 박쥐가 날고 낮에는 여우가 운다. 금년에는 비가 많아 흙에 윤기가 흐르건만, 마을엔 사람이 살지 않아 거친 폐허가 되었다.

파리야, 날아와 이 기름진 고깃덩이에 앉아라. 살진 소다리의 그 살집도 깊으며 초장에 파도 넣고 농어 생선회도 갖추어 놓았으니 그대의 굶주린 창자를 채우고 얼굴을 활짝 펴라. 그리고 또 도마에 남은 고기가 있으니 그대의 무리에게 먹여라. 그대의 시체를 보니 이리저리 언덕 위에 넘어져 있는데, 옷도 못 입고 모두 거적에 싸여 있다. 장마비가 내리고 날씨가 더워지자 모두 이물로 변하여, 꿈틀꿈틀 어지러이 꾸물거리면서 옆구리에 차고 넘쳐 콧구멍까지 가득하다. 이에 허물을 벗고 변신하여 구속에서 벗어나고 송장만 길가에 있어 행인이 놀라곤 한다. 그래도 어린아이는 어미 가슴이라고 파고 들어 젖통을 물고 있다.

파리야, 날아와서 관청으로 들어가지 마라. 깃대와 창대가 삼엄하게 나열하여 꽂혀 있다. 돼지고기국, 쇠고기국이 푹 물러 소담하고 메추리구이와 붕어지짐에, 꽃무늬 아름다운 중배끼(유밀과의 한 가지) 약과를 실컷 먹고 즐기며 어루만지고 구경하지만, 큰 부채를 흔들어 날리므로 그대는 엿볼 수도 없단다. 수령이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살피는데, 쟁개비(무쇠나 양은으로 만든 작은 냄비)에 고기를 지지며 입으로 불을 분다. 계피물 설탕물에 칭찬도 자자하나, 호랑이 같은 문지기가 철통같이 막아서서 애처로운 호소를 물리치면서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한다. 안에선 조용히 앉아 음식을 먹으며 즐기고 있고, 아전놈은 주막에 앉아 제멋대로 판결하여 역마를 들려 백성들 사는 곳은 별일 없다고 급히 달려가 알리면서, 길에는 굶주린 사람 없고 태평하여 걱정이 없다고 한다.

파리야, 넋이 다시 살아나 날아오지 마라. 지각없이 영원토록 정신이 가물가물한 그대를 축하한다. 죽어도 앙화(지은 죄의 갚음으로 받는 온갖 재앙)는 남아 형제에게 미치게 되니 6월에 벌써 조세를 독촉하는 아전이 문을 두드리는데, 그 호령은 사자의 울음 같아 산천을 뒤흔든다. 가마솥도 빼앗아 가고 송아지와 돼지도 끌어간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관가로 끌어다가 볼기를 치는데 그 매를 맞고 돌아오면 기진하여 염병에 걸려서 잡풀 쓰러지듯, 고기 물크러지듯 죽어가지만 수많은 백성들의 원망 천지사방 어느 곳에도 호소 할 데가 없고, 백성이 모두 죽을 지경에 놓여도 슬퍼할 수가 없다. 어진 이는 위축되어 있고, 뭇 소인배가 날뛰니 봉황은 입을 다물고 까마귀가 짖어대는 격이다.”

백성 부엌엔 찬바람만 쌓이는데

정약용은 조선시대 영,정조 때의 실학자로 어릴 때 이름은 귀농, 자는 미용, 송보, 호는 다산 이었다. 성호 이익의 저작을 보고 백성의 삶을 돌보는 경세제민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공부하여 삼사와 성균관 등 두루 요직을 거치면서 민생을 살폈으나 그를 아껴 주던 정조가 죽고 나서, 이른바 벽파에 의한 천주교 박해에 엮여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강진에서 18년동안 귀양살이 하면서 정치기구의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평등한 토지점유와 노비제도 폐지 등을 제시하는 책을 썼는데, 이른바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등이다. 그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꿰뚫고 있었기에 그만큼 백성들에 대한 연민도 클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 뒤주에는 해 넘길 것 없는데, 관가 창고에는 겨울 양식 풍성하다. 궁한 백성 부엌에는 바람, 서리만 쌓이는데, 부잣집 밥상에는 고기, 생선 갖춰 있네.” 하고 고발하는 정약용은 그렇게 굶어 죽어간 백성을 ‘파리’에 비교하여 추도하는 잡문을 쓰기도 했다. 조선시대 후기 최대의 학자가 가장 깊은 연민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려 하다가 오히려 유배당하는 고초를 겪기까지 얼마나 마음이 애달팠을까.

낯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

묵시록에서는 부자의 미지근한 신앙을 질책하고 있다.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부유하고 자만심에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그저 ‘자비로우신 분’으로 비추어질 테지만 묵시록은 이들을 ‘책망하고 징계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가르친다(묵시 3,19). 이들은 스스로 부자라고 자랑하지만 그의 풍족함과 부족할 데 없는 생활이 그들을 고발하고 있다.

그네들 눈에 부유한 것이 실상 하느님 보시기에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다.”(3,17)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참된 부자로 살려면 제 잘못을 뿌리부터 뉘우쳐야 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네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3,15-16)

그 걸림돌에 걸릴까 참으로 무섭다. 예수님은 먼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한 분이 되시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길을 걸으시면서 대화를 나누셨다. 그네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냈으며, 그네들처럼 이슬을 피해 산기슭 나무 아래서 잠을 청하셨다. 하늘을 천정 삼고, 돌멩이를 베개 삼으셨다. 죽은 라자로 소식을 듣고 눈물 흘리시던 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부족함 없이 흥청거리는 교회는 하느님 보시기에 저주에 지나지 않았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다 해도 그네들 마음속에는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는 그 많은 신자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전한다. 그 뿐이 아니다. 이들은 일곱 부제를 선택하여 과부들과 다른 궁핍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공동체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성금을 모아 보내주었다. 그러나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저들끼리만 풍족함을 누리는 까닭에 단죄받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신앙이란 전례생활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제 집으로 받아들이냐는 데에 구원의 당락이 결정된다. 타인의 목숨을 제 목숨처럼 받아들일 때에야 그분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서도 머무르게 될 것이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3,20)

오늘 우리 집 처마 밑에서 낯선 누군가가 신세를 한탄하면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면, 그가 곧 또 다른 그리스도임을 잊지 말라고 묵시록은 신신당부하고 있다.

[마무리 묵상]

눈길이 머물지 않는 곳에서도
소리는 들리는 법입니다.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 소리,
까닭 없이 꺼억꺼억 지르는
외마디 소리,
인생이 피곤하다고
어김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
한 푼 두 푼으로 싸움박질하는
거친 숨소리마저
귓가에 또렷또렷 들리는데
그걸 좀 막을 수 없나요.
그 마음 다 접어둘 수 없는 것인가요, 하느님.
찰랑찰랑 진흙소가 물 건너는 소리,
살강살강 나뭇잎 바람 타는 소리,
햇살 같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귀 주어지면 어떨까요,
하느님.
밑모를 바닥에서 진흙탕 속에서도
연꽃 화안히
피어오르는 그 소리마저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우리 주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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