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을 휩싸고 부르는 사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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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을 휩싸고 부르는 사랑의 노래
  • 한상봉
  • 승인 2019.01.14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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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종교심성으로 읽는 요한 묵시록-10]

당신이 계실 때에

알뜰한 사랑을 못 하였습니다.
사랑보다 믿음이 많고, 즐거움보다 조심이 더하였습니다.
게다가 나의 성격이 냉담하고 더구나 가난에 쫓겨서
병들어 누운 당신에게 도리어 소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가신 뒤에 떠난 근심보다
뉘우치는 눈물이 많습니다.
(한용운, 후회)

[오늘의 성경] 요한 묵시록 6. 1 – 17

다문 입은 열리고, 봉인은 떼어지리라

먼저 네 개의 봉인이 떼어졌다. 장차 악의 지배를 받는 진노의 때가 올 것이다. ①악의 원천은흰 말을 타고 승리자의 월계관을 쓰고 활을 들고 서 있는 사람, 즉 권력욕과 정복욕이다. ②붉은 말을 탄 사람은 평화를 없애고 큰 칼을 받고서 서로를 죽이게 하는 권한을 받았다고 말하듯이, 경쟁과 전쟁이 시작된다. ③검은 말에 올라탄 사람은 저울을 들고 있으며, 하루 품삯이 변변치 못한 까닭에 굶주림을 낳는다. ④푸르스름한 말을 탄 사람의 이름은 ‘죽음’이며, 그 뒤에 지옥이 따르고 있다.

다섯 번째 봉인이 떼어졌을 때,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순교자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서, 불의한 자들에게 내려야 마땅한 심판과 복수를 부르짖는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순교자의 숫자가 다 찰 때까지 잠시 쉬라고 말씀하시며, 이미 부활하신 분의 승리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흰 두루마기를 입혀주신다.

심판의 때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배반하고 자기 백성을 밀고할 것이며,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 이다. 그러나 여섯 번째 봉인이 떼어지면,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해가 검게 변하며 달은 온통 핏빛으로 변한다. 별들은 바람에 흔들려 땅에 곤두박질치고 하늘은 사라져 버리고 제자리를 지키는 산이나 섬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자 세상의 왕들과 고관들, 장군들과 부자들, 그리고 그들의 노예들과 자유인들까지도 동굴과 바위틈에 숨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서 일곱 번째 봉인이 떼어지기를 기다린다.

조선독립을 향한 소리없는 아우성

봉인이 떼어질 때마다 전개되는 죽음의 상황은 한국전쟁 당시와 유사하다. 목숨 가진 생명들이 고통받고, 천지가 황폐화되며, 인간성마저 말살되는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알아볼 사람은 모두 이때를 심판의 때로 알아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종말의 때는 결정적인 심판이 오기 전에, 인간이 인감임을 포기하고 인간이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폭력을 행사할 때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다.

만해 한용운은 일제의 식민지 상황이 빚어낸 죽음의 질서에서 피워 올린 한 송이 향기로운 꽃이었다. 그가 독립운동가이기 전에 승려였으며 또한 시인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는 예언적 통찰을 통하여 조선 땅의 백성을 위해 온몸을 봉헌한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투명한 사람을 노래했던 시인 만해의 육성이 그리워지는 때다. 투명한 영혼은 감언이설에 속지 않는다.

만해는 <조선독립의 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강대국, 즉 침략국은 군함과 총포만 많으면 스스로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도의(道義)를 무시하고 정의를 짓밟는 쟁탈을 함부로 행한다. 그러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할 때는 세계 또는 어떤 지역의 평화를 위한다거나 쟁탈의 목적물, 즉 침략을 받는 자의 행복을 위한다거나 하는 기만적인 헛소리로써 자기를 정의로운 천사 나라(天使國)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일본이 폭력으로 조선을 합병하고 2천만 민중을 노예로 취급하면서도, 겉으로는 조선을 병합(倂合)함이 동양 평화를 위함이요, 조선 민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오히려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고자 했다. 그는 민중의 힘을 믿었기에, 일제에 대한 어떠한 타협이나 투항도 거절하고 민족해방은 역사의 순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조선의 독립은 산 위에서 굴러내리는 둥근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이르지 않으면 그 기세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침묵이야말로 님의 목소리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1926)은 요한의 「묵시룩」처럼 상징에 가득찬 언어의 보물창고이다. 이 시집에 실린 88편의 시는 예술적 감동과 종교적 체험, 그리고 민족 현실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두루 무르녹아 있다. 그래서 만해의 시편들은 젊은이에겐 사랑의 노래로, 종교인에겐 구원의 언어로, 민족주의자에겐 민족해방의 암호로 새겨질 수 있었다.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이 ‘님’인 것처럼 만해도 '님'을 노래한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美)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별은 미의 창조’)

만해의 ‘님’은 이별하고서야 발견되고 만날 수 있는 ‘님’이다. 님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님의 소중함, 님이 우리 마음에 드리웠던 그림자를 발견하고 못내 아쉽고 적적한 눈물을 짓는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은 이럴 때 해당되는 게 아닐까. 떠나고 나서야 회환이 쌓이고 님을 그리워하고 없음을 느끼는 것은 곧 있음을 갈망하는 마음이다.

식민 통치를 받는 백성에겐 조국이 곧 빼앗긴 님, 떠나간 님이 된다. 그 님이 떠나간 뒤에는 아무도 그 님의 목소리를 들을 길이 없다. 오직 남은 것은 ‘님의 침묵’뿐이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가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랫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반비례’)

그러나 님은 그 침묵 속에서야 똑똑한 발음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런 말일 것이다. 나라는 없어졌어도 우리가 님이라고 부를 대상이 없어졌어도 님은 신음소리, 외마디 비명 속에서, 때로는 살강거리는 풀벌레소리에서도 살아 있다.

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강요당한 침묵은 압축된 용수철처럼 긴장 속에서 말을 숨기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님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주저앉거나 아예 다른 님을 찾아 님을 배신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님이 죽었다고 생각한 많은 식민지 지식인들이 옹졸한 자기만의 사랑과 연애에 빠져 있거나, 민중의 가슴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또는 새로운 지배자에게 정신마저 굴복당한다면 이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군말’)

사실상 님이 죽은게 아니라 자신의 양심이 죽어버린 것이며, 결국 님이 죽었다 하면 우리가 마음속에서 님을 죽인 셈이다. 여기엔 자유로운 정신도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도 없다.

 

창현 선생, 만해 시화. 不如歸 不如歸(불여귀 불여귀), 1991

죽음을 넘어서 다시 찾은 님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슬픔도 희망의 원천으로 뒤바꿀 힘을 갖는 법이다. 슬픔을 느끼는 까닭은 내 사랑이 깊은 까닭이며, 그 사랑을 깨닫는 순간 님은 이미 곁에 와 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이별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 더 분명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님이 멀어질수록 사랑은 더욱 간절해지고, 티끌과 같은 우리 자신을 통해서 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있는 한 님도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희망을 낳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그 희망이 죽음조차 뛰어넘은 사랑을 낳는다.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에 무궁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오셔요’)

죽음보다도 숨막히는 사랑의 열정 속에서 마침내 문학과 종교, 사상과 행동이 하나가 된다. 보살과 중생, 꿈과 현실이 하나로 된다.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없는 형제적 사랑이 도타운 세상, 군함과 총포가 한낱 티끌로 변하는 종말론적 순간이 온다.

종말의 때에도 죽음을 뛰어넘은 사랑을 노래하는 예언자들은 있기 마련이다. 만해 한용운 역시 그처럼 위기 시대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막바지에 이르러 더욱 전쟁욕에 사로잡힐 때, 이른바 민족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마음속에서 ‘님’을 갈아치웠다. 그러나 식민지가 해방되고 추방당한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안고 햇발 같은 걸음으로 고향을 되찾을 것이라는 예언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은 그 끝이 불행하다.

만해는 비록 1944년 5월 9일에 해방을 앞두고 죽었으나, 겨레의 가슴에 영원한 빛으로 남았듯이, 그의 삶의 끝은 축복 가운데 머물렀다. 마찬가지로 ‘님 향한 일편단심’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으며, 심판이 오히려 은총이 된다.

“풍란화야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손가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가 이 외 없으니
혼하 돌아오소서.”

뒷날 위당 정인보가 만해에게 바친 이 조사처럼 우리는 그날이 오면, 묵시록의 부자들과 장군들처럼 바위틈에 몸을 숨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흐뭇한 영혼을 맡길 것인가?

[마무리 묵상] 

침묵이 당신의 음성인가요.
노래하지 않아도
당신 모습 뵈지 않아도
천둥처럼, 번개처럼 빗발치며
다가서는 당신을
저희는 막을 수가 없어요.
이젠 이별인가요.
아님 슬픔인가요.
이마저 사랑을 깨우치는 힘인 줄을 알기에
저희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비나리를 칩니다.
당신이 침묵하는 세상,
당신이 떠난 듯한 세상에서
오히려 당신을 향한 그리움으로
내 몸을 당신 삼아 기쁜 소리 삼아 
가난하고 억울한 생명을 보살피는 마음을 심어갑니다.
거기선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사랑 노래 불리고
그 노래 속에 당신 계시겠지요, 그렇지요, 하느님.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나의 주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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